[ 제6부. 소오생의 耳順 ]
※ "나이 예순에는 귀가 순해져야 한다. 六十而耳順." 《논어論語 · 위정爲政》
사람은 예순 나이쯤 되면 남이 하는 말에 쉽게 섭섭해지고 노여워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공자는 예순 나이가 되면 그 점에 특별히 유념하여 타인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껄껄 웃어넘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귀가 순해질 수 있을까?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귀에 들려오는 '현상의 소리'가 아니라, 사색과 명상을 통해 삼라만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내면의 소리'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한다. 타인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더라도 액면 그대로의 소리로 듣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 저절로 귀가 순해진다는 이야기다. [ 제1부. 공자의 리즈 시절 ] 〈08. 예순 나이에는 소리를 들어라〉참고.
나는 귀가 순해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알아서 저절로 실천해 주는 것과는 정말 차이가 크다. 상대방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비록 액면의 소리 그대로 듣지는 않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조금은 섭섭하고 노여워지는 마음이 일어난다.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깨달음과 꾸준한 수련은 한 시라도 게을리할 수 없는 삶의 벗님이 되어야 하나보다.
아래의 글은 50대에 쓴 글이지만, 이런저런 의미에서 '소오생의 이순耳順' 시기에 귀속하여 아카이빙 한다.
달빛 살랑거리는 소리…. 가을이 찾아오는 밤입니다.
후드득, 설익은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숲 속의 어둠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산사山寺에 흐르는 새벽의 정적….
문득, 힘찬 목탁 소리와 함께 청아한 염불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옵니다.
삼라만상이 눈을 뜨는 소리, 제 몸속의 의식意識이 깨어나는 소리입니다.
소리 없이 일어나 산책에 나서 봅니다.
깊은 산 굽이쳐 내려오는 계곡물소리에 귀를 씻고,
연지蓮池에 피어나는 연꽃잎 이슬방울 소리에 마음을 씻어봅니다.
선배님. 언제부터인지 저는 늘 소리를 듣습니다. 비가 오면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눈이 내리면 눈 내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이 오는 소리, 새벽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성긴 대나무 숲을 스쳐 지나간 그때의 그 바람 소리를 듣고, 무심히 나타났다가 무심히 사라져 가는 구름 소리를 듣습니다. 미동微動도 없이 매달린 법당 처마 밑 풍경風磬 속에서 은은히 떨려 나오는 번뇌의 소리를 듣고, 하얀 연꽃의 정갈한 향기에서 부처님의 미소처럼 따스하게 풍겨 나오는 영혼의 소리를 듣습니다.
어디선가 선배님의 목소리도 들려오는군요. 고이 묻어둔 추억의 항아리에서 방울방울 솟아 나오는 지난 세월의 목소리, 포근한 하늘에 안겨 지구의 반대편에서 꿈결처럼 아늑하게 날아오는 목소리, 산들바람에 실려 아득한 미래의 시공 속에서 불어오는 그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연因緣의 소리에 조용히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선배님. ‘소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무엇이길래 이토록 자유롭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것일까요? 한 번 사라져 버렸으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시시때때로 귓전에 맴도는 걸까요? 저의 오랜 숙제요 의문이었습니다.
선배님. 우리는 ‘소리’라는 단어를 너무나 흔히 사용하면서도, 그 본질과 특성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문자’에 비해 훨씬 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데도 말이죠. 인류가 지상에 나타난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250만 년이나 되었다는데 문자가 등장한 것은 고작 6천여 년 전의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자에 의한 기록 이전의 선사先史 시대는 바로 곧 청각에 의한 소리문화만이 존재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시각視覺의 미망迷妄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요?
어리석은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를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현상 그대로만 믿으려고 하는 인간들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상학적으로 볼 때, 소리는 분명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으니까요. 소리는 사라지려고 할 때만 존재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기억의 보존에 탁월한 장점을 지니고 ‘있는 듯한’ 문자가 등장하면서 문자문화는 급속히 소리문화를 지배해 갔고,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소리는 문자의 종속물 정도로 잘못 인식되어 왔던 것 아닐까요?
선배님. 그러나 고대의 인도인은 문자가 출현한 이후에도 신성神聖한 이야기들은 반드시 소리로 기록했다고 합니다. 문자란 윤회의 한 과정에 불과한 인간 세상의 세속적인 삶 속에서 발생하는 시시콜콜한 사건 따위나 기록하는 지극히 기능적인 도구일 뿐, 모든 것의 참된 본질을 담을 수 있는 도구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구요?
선배님. “옴 마니 밤메훔!”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티베트불교도들이 늘 입에 올려놓고 외우는 ‘우주의 진언眞言’입니다.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 그런 뜻이라는군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직역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티베트 곳곳마다 부적처럼 붙어있는 ‘옴’이란 단어는 각기 우주와 대자연의 ‘발생과 유지와 소멸’을 상징하는 [ a + u + m ]의 합성어라는군요. 바로 우주와 대자연이 발산하는 주파수의 상징인 셈입니다. 티베트인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주파수를 온몸으로 포착하고, 느끼고, 자신도 역시 하나로 동화되어 소리를 발산하는, 우주와 인간의 리드미컬한 교감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주와 대자연이 발산하는 신성한 메시지 ― ‘연꽃 속의 보석’, 그 실체는 바로 곧 ‘소리’였습니다. 소리는 진리요, 생명이요, 영혼이며, 천지만물의 주재자인 신神,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룩하고 신성하고 위대한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소리’로 보존하여 후대에 전승傳承시켜 내려갔다고 합니다. 마치 원시 초민初民이 소중하게 불씨를 보존하고 전승해 내려갔던 것처럼 말이죠.
선배님.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시는지요? 아마도 시각문화의 함정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들은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현대식 건물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며 숨 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신비주의에 사로잡힌 고대 미개인들의 어리석은 샤머니즘 정도로 치부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들의 인식에 전율을 느낍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 초월의 깊은 안목에 탄복을 금치 못합니다.
선배님. 틈이 날 때마다 삶의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을 골라 제게 낭송해 주시던 선배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은은히 들려옵니다. 저는 왜 선배님의 그 청아한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소리는 모든 것의 본질本質인 듯합니다. 월터. J. 옹과 같은 학자에 의하면 소리에는 ‘내면성內面性’이라는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사물의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감각은 청각이라는군요. 얼핏 생각으로는 시각을 사용하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하지요.
예컨대 우리 몸의 내부 상태가 궁금하다면 X―Ray나 내시경 따위를 찍어보면 될 듯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칼로 잘라서 내부를 들여다본다면 그 순간 그 내부는 이미 내부가 아니라 외부가 되어버리는 법이지요. 마찬가지 이치로 무엇이든지 우리의 시각 안에 포착되는 그 순간, 그것은 내면세계가 아니라 표면적인 현상세계의 일부로 귀속되어 버리겠지요. 그러므로 시각으로는 절대로 내면세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리는 다릅니다. 무엇이든지 내부 구조를 알고 싶으면 그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됩니다. 상자의 내부구조가 궁금하면 손으로 똑똑 두드려보면 상자 속이 비어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고, 책상을 두드려보면 그 속이 비어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여러 가지 소리로 그 내부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색소폰 소리가 플루트 소리와 다른 것은 악기의 내부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듯, 인간의 목소리가 다른 것도 우리들 몸의 내부구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제가 선배님의 목소리를 잊지 못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서로 다른 육체적 내부구조에서 울려 나오는 서로 다른 음색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한 송이의 작은 들꽃, 한 마리 작은 곤충조차 놓치지 않고 정겨운 대화를 나누시던 선배님. 그 시들지 않는 맑은 영혼의 세계에서 울려 나오는 당신의 목소리이기에 이토록 언제나 나의 귓가에 맴도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월은 떠나가지만 선배님의 목소리는 떠나가지 않습니다. 선배님의 본질, 그 준일俊逸한 정신세계가 어찌 떠나갈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과거로 떠나가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곁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 ‘소리’는 분명 모든 것의 내재적 본질이요, 우주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선배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