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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19. 2023

19. 분리의 벽을 넘는 결합의 미디어

[ 제6부. 소오생의 耳順 ]

※ 이 글은 앞선 글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글의 내용을 부각해 보기 위해 소제목을 타이틀로 내걸었습니다. 계속 똑같은 제목을 내거는 것도 조금은 식상하니까요.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핵심은 '소리'에 있다. 앞선 글 참조. 


'소리'란 대체 무엇일까?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소리'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필자의 오랜 화두였다. '소리'에 얽힌 추억의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했던 '낭송의 밤'이 근원의 샘물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소리'를 화두로 붙잡기 시작한 것은 필자의 전공인 중국 고전 산문(고문古文, 흔히 말하는 한문漢文) 교육 때문이었다. 


우선 [ 표지 사진 ]을 보시라. 필자가 처음 유학 갔을 때 필수로 들어야 했던 학부 수업의 교재다. 느낌이 어떠신가? 옛날 선장본線裝本 고문 책을 처음 대하면 숨이 턱 막힌다. 이 책은 그나마 사이사이 점이라도 찍혀 있지만, 진짜 옛날 책에는 여백도 전혀 없고 표점도 아예 없다. 


그런 글을 가르치고 배운다고 생각해 보시라.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으신가? 배우는 학생도, 가르치는 선생도 고문拷問을 당하는 것 같아서 우스갯소리로 고문古文 교육은 고문拷問 교육이라는 말도 있다. 대체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리'로 가르쳐야 한다. 논리와 분석을 위주로 하는 서구식 교육은 이를 테면 문자 중심의 교육이다. 그에 비해 지혜와 감성을 추구하는 동아시아의 전통 교육 방법은 '소리' 중심이다. 예컨대 눈으로 보면 이렇게 질식할 것 같은 '고문'도 '소리'로 재현하여 낭송해 보면 너무나도 멋들어진 음률이 탄생한다. 


청나라 문인들은 "(작가는 독자에게) 소리로 감정을 전달하고 以聲傳情, (독자는 글 속에서) 소리를 근거로 (작가의) 감정을 추적해야 한다. 因聲求情"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문학의 참된 가치를 느끼려면 반드시 낭송을 해봐야 한다. 소리로 두드려봐야 하는 것이다. 옛날 서당에서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 그렇게 훈장님 따라 낭랑하게 낭송하며 소리로 공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리'로 가르치니 수업 시간이 너무나 재미있어졌다. 전체적인 뜻은 담당교수인 내가 요점 위주로 해석하고 해설해 준다. 학생들은 뜻을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 대충 그러려니 알면 된다. 어차피 그런 시험은 보지 않으니까. 시험은 낭송 파일 제출. 내가 낭송하면 학생들은 녹음을 해서 몇 번이고 계속 들으며 흉내를 낸다. 마치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자꾸만 들으면서 무작정 흉내 내듯이. 


놀랍게도 우수한 낭송 파일이 상당히 많았다. 효과음까지 세밀하게 삽입한 파일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 그런 파일을 학생들과 함께 들으면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까르르 웃고, 우와~ 감탄하며, 하하호호 재미있어한다. 원문을 치밀하게 해석할 줄 아는 학생은 별로 없지만, 모두가 그 글의 가치를 충분히 음미하고 감상하며 좋아할 줄 안다. 


인간도 마찬가지고, 대자연과 우주도 마찬가지고, 문학도 마찬가지다. 소리를 통해야만 그 내부적 본질을 가장 효과적으로 엿볼 수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는 문자 위주의 차가운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메마른 감성을 일깨워주는 소리의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아래의 글은 필자가 주장하는 '소리의 글쓰기', '소리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편지 형식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연지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소리 편지 (2)


선배님. 소리는 또한 ‘결합의 미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는 분리의 벽을 넘어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지혜의 미디어입니다. 딱딱하게 죽어있는 문자의 굴레 안에 갇혀 메말라 가는 우리들의 감성을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미디어입니다. 차가운 시멘트 건물 속에 외롭게 고립된 현대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아름다운 결합의 미디어입니다. 


분리의 벽을 넘는 결합의 미디어   


저는 대형 교양 강의를 많이 합니다. 커다란 강의실에 수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흔히 외국어 교육은 학생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효과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많은 학생들을 놓고 무슨 외국어 교육을 하느냐고 빈정대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분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대형 강의에서는 먼저 강의실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일이 필수적이지요. 그 넓은 강의실 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청각을 배제한 채 시각에만 의지한다면 반드시 눈을 전후좌우로 이리저리 한참 동안 움직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토막토막 시야에 분리되어 들어오는 여러 개의 이미지를 뇌리腦裏에 모아 이성理性의 힘으로 종합 분석하여 최종 결론을 내려야겠지요. 시각이란 통합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성의 힘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청각은 다릅니다. 소리는 나의 전방前方뿐만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에 골고루 퍼져가지요. 소리는 동시에, 그리고 순간적으로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우리의 귀로 몰려들어옵니다. 때문에 저처럼 미숙한 선생일지라도 청각 하나에만 의지해도 강의실 안의 분위기를 금방 파악할 수 있지요. 학생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에 화를 내기도 하고 흐뭇해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소리를 통해 우리의 감정은 금방 한 덩어리가 됩니다. 


어수선하고, 냉랭하고, 차분하고, 즐겁고, 뜨거운, 강의실 안의 그 모든 분위기는 소리에 의해서 조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청각과 소리는 이렇게 통합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결합시켜 주는 신비한 힘이 숨어 있었습니다. 


소리는 감정을 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흔히 문자나 그림과 같은 시각적인 도구를 통해서도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문자나 그림 속에는 이미 정감과 생명력이 담긴 소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그 많은 학생들에게 자료나 나누어주면서 지식과 정보만이 담긴 딱딱한 문자를 읽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강의의 일체성은 필경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문자로 대표되는 모든 시각적인 것은 이토록 감정의 교류를 차단하고 인간의 마음을 차갑게 분리해 버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자로 이루어진 교재 따위를 그토록 맹신하며 숭배하고 있다니요! 


선배님. 저는 교양 중국어를 대형으로 강의하는 그 시간을 몹시도 사랑한답니다. 어떻게 강의하는지 아십니까? 수업시간에는 절대로 교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필기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로지 저의 동작과 소리에만 몰두하게 합니다. 


학생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 제 몸동작을 고대로 따라서 신나게 춤을 추고, 제 입에서 나오는 중국어의 리드미컬한 멜로디를 고대로 따라서 큰 소리로 노래하는 일이지요. 수 백 명이 하나 되어 춤추고 노래하는 강의실! 거대한 노래방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성령이 충만하게 넘치는 부흥집회 같다고나 할까요. 어떤 학생이 그러더군요. “히히, 선생님은 교수님이 아니라 교주님 같아요!” 


물론 숙제도 내줍니다. 제가 쓴 책을 진도 나간 부분만큼 읽고 나서 공부한 증거를 자유롭게 글로 써서 가져오라는 숙제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러더군요. “어머, 신기해요, 선생님! 책에서 선생님 목소리가 들려요!”     




선배님. 삶과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인간 사랑의 따스한 마음이 가득 담긴 선배님의 그 혼이 담긴 목소리로, 사랑하는 저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목소리도 선배님의 목소리를 닮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목소리로 벼락을 내리치게 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의 내면세계에 벼락을 내리쳐서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싱그러운 지혜와 감성의 눈을 번쩍 뜨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 순간 강의실 안에 충만하게 넘쳐흐를 그 감정의 일체감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그런 것이 바로 학풍學風의 전승 아니겠습니까? 


선배님. 학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놀랍게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학문은 ‘學文’이 아니라 ‘學問’이지요. 다시 말해서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물어보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언제나 겸허하게 작아지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머리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 학문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무엇으로 후학들에게 전수해주어야 할까요? 차갑게 죽어있는 문자일까요? 아닙니다. 소리입니다. 따스하고 싱그럽게 살아 숨 쉬는 소리입니다. 학문은 소리로 배우고, 소리로 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의 교육으로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소리의 글로 작가와 독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문학의 위기가 극복될 것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독서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의 풍토를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각적인 면에 치중한 문자텍스트에 얽매인 글쓰기는, 언제나 맞춤법이나 어법 등 연역법적인 명제에 구속되어 그 글의 모든 내용이 규격화되기 십상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칫 인간의 다양한 말투와 개성이 사라진 천편일률적인 죽어버린 글로 전락하기가 쉬운 것 아닌가, 그래서 독자들이 그렇게 규격화된 책들만 읽다 보니 독서에 재미를 못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배님. 저는 ‘소리의 글’을 읽고, 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만 그런 것일까요? 딱딱하고 엄숙하게 지식과 정보만을 전해주는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단어만 가득 찬 그런 글은 웬일인지 읽히지가 않네요. 모든 것을 정해진 틀 속에 구속하고,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끝없이 따지기만 하는 분석과 논리만이 가득 찬 그런 글을 읽으면 웬일인지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소리는 생명입니다. 호흡입니다. 


소리는 없고 문자만이 존재하는 그런 글은 정적만이 감도는 회색의 차갑고 음침한 세계입니다. 그런 글을 누가 읽고 싶겠습니까. 그런 글은 작가와 독자, 화자와 청자, 인간과 인간 사이를 더욱더 분리시킬 뿐입니다. 


저는 소리가 살아있는 글을 읽고 싶습니다. 작가의 감정의 기복이 멜로디처럼 넘쳐흐르는 생동감이 충만한 글을 읽고 싶습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작가의 독특한 억양과 리듬의 변화가 춤을 추는, 개성이 살아있는 그런 말투를 책 속에서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소리의 글을 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선배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氣’라는 것도 소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중국의 문인들은 예로부터 ‘기’가 넘치는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요. 이른바 ‘문기론文氣論’입니다. 작가는 생명력이 넘치는 글을 써야 하고, 독자는 낭송으로 소리를 재현하면서 작가의 감정과 하나가 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유협劉勰(465~521)과 같은 문인은 “언어는 문장의 관건이요, 지고지순한 정신 영역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입술에 의해 탄생되고 전해진다 言語者, 文章關鍵, 神明樞機, 吐納律呂, 脣吻而已"라고 선언하였지요. 《문심조룡 文心雕龍 · 성률 聲律》소리는 작가와 독자의 정신적 만남의 광장입니다. 분리의 벽을 넘어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가교입니다.


선배님. 이제는 소리를 복원해야 합니다. 


지식과 정보, 분석과 논리 위주의 ‘문자의 글’, ‘문자의 교육’을 버리고, 지혜와 감성으로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소리의 글’, ‘소리의 교육’을 복원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미디어인 소리로 메마른 감성에 싱그러운 생명력을 주입하고, 시멘트 빌딩과 차가운 기계의 장벽 속에 외롭게 고립된 현대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어야 합니다.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계속 ―




[ 표지 사진 ]

◎ 유종원 문집 중의 한 쪽. 눈으로 보면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소리로 들으면 작가의 간절한 정서가 그대로 우리의 것이 되고 만다. 문학은 소리로 해야 한다. 특히 동아시아 문학의 전통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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