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구름도 없었고, 외출 시엔 꼭 찬물 가득 담은 물통을 가지고 나갔다. 밖은 땅으로 내리 꽂이는 햇빛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 그 햇빛에 노출된 피부는 금방 발갛게 달아올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원래의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까맣게 변했다.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점점 나에게로 이동해와 눈이 부시다. 해는 전쟁터 속 사람을 칼로 베는 것에 이력이 난 로마인 병사처럼 점점 광적으로 변해간다. 본격적으로 나를 공격해 오는 햇빛을 막기 위해 다가간 창가에서 내려다본 거리는, 전골냄비 속처럼 지글지글 끊고 있다.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반대편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시간이 되었음은 알고 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나가길 거부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젯밤 깊은 잠에 빠지기 전 얕은 의식 속에서 겁을 먹었기 때문일까.
하얀 민소매 티와 연청색 데님 쇼트를 입고 거울에 서니, 옷 밖으로 드러나는 팔다리가 앙상하여 보기 좋지 않다. 여름에는 움직임이 많지 않은데도 번번이 살이 빠진다. 아이보리색의 얇은 저지 소재로 된 반팔 원피스로 갈아입고 모리가 사준 에나멜 구두를 신는다.
문을 열고 나와서 아래로 향하는 층계와 맞닥뜨린다. 난간을 오른손으로 잡고 한 계단씩 따닥따닥 밟아 내려간다. 다른 한쪽 손으론 모리의 딱딱하고 얇은 손을 잡고 있다. 모리도 여름이 되어 살이 빠졌는지 손가락뼈가 유난히 앙상하게 잡힌다. 모리는 아무 말 없이 나와 같은 속도로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별 뜻 없이 옆을 바라보니 모리는 온데간데없고, 홀연히 눈에 들어온 푸르스름한 벽면 위에 “Revenir a Freud”라고 흘려 쓰인 한 문구가 엉뚱하게 머릿속에 각인된다.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에 둘러싸인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30분 정도 늦을 거라는 문자를 받고 더위 피할 곳을 찾아들어갔지만 다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거리를 걷다 보니 지난 겨울 모리와 자주 갔던 소규모의 카페가 머릿속에 떠올라 다시 방향을 돌려 걷는다.
이 동네로 나온 것은 오랜만이어서, 그동안 새로운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도착한 목적지에는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크게 프린트된 흰 종이가 입구에 붙어있고 불이 꺼져있다.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춰 가게를 들여다본 후 다른 곳에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걸음을 재촉하여 가게에서 멀어진다.
길 건너에는 대형 체인커피숍들이 성황이다. 좀 전에 들어갔던 카페도 손님들로 붐벼 간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으나 이내 공간을 가득 채운 소음을 참고 앉아있는 나 자신이 미련하게 까지 느껴지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간단히 자기편으로 만들어 어디에 있더라도 혼자는 아닐 것 같은 모리의 웃는 얼굴이,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붕 떠올라 부아가 올랐다.
그늘 없는 거리에 혼자 있으니 사막 한가운데 서있는 선인장으로 변해 양팔에 가늘고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는 듯하다. 한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기다리며 그녀에게 어떤 첫인사를 건넬까 고민하다가, 웃으며 자연스레 팔짱을 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고등학교 때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느새 해가 좀 기울었는지 내 쪽으로 건물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늘 안에 서있으니 선인장도 무엇도 아닌 온전한 나로 돌아오며 정신이 차차 뚜렷해진다. 고개를 들어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평일 한낮이라도 큰길엔 지나다니는 차들이 많다.
차들 사이를 비집고 오토바이 한 대가 커브를 돌아오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균형을 잃고 넘어져 오토바이는 도로 한복판으로, 운전자는 인도 쪽으로 분리되어 미끄러져 간다. 은색 승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피하려 오른쪽으로 운전대를 돌리고, 옆 차선에서 달리오던 택시는 피할 방법 없이 급회전한 그 승용차와 그대로 충돌한다. 교통사고의 목격보다도, 끼익하는 급정거 소리와 충돌 시의 거대한 굉음이 더한 충격이 되어 심장이 요동친다.
다행히 더 이상의 충돌사고는 없었고 사람들은 사고지점으로 모여들고 있다. 나는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찌그러진 택시 안을 들여다본다. 택시 뒷자리에 나의 친구가 정신을 잃고 앉아있었다.
친구의 온 식구들이 깜짝 놀라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금방 정신을 차려 걱정하고 있는 가족들을 향해 크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 한 무리의 가족들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서있었고, 그것을 본 친구의 어머니는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듯 내 등을 쓸어내리며 나와 눈을 맞추신다. 나는 그제야 안도하여 수줍게 미소 지었다.
친구는 당분간 통원치료를 해야 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그날로 퇴원했다.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는 친구의 가족들 사이에서 소담스레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함께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예상치 못한 큰 사고를 겪은 보상인지, 저녁시간은 유난히 천천히 그리고 평온하게 흘러갔다.
나의 집에 다다라 차에서 내리자 그 가족은 따뜻하게 인사말을 건넨다.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나는 차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든다. 차의 미등 불빛마저 보이지 않게 돼서야, 나는 뒤 돌아 집으로 들어간다.
노란 불빛아래 느리게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순간 가방 안에서 진동이 짧게 울린다. 잠시 걸음을 멈춰 가방을 뒤적인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다시 가방 안에 넣는다. 열린 창문으로 미지근한 미풍이 불어왔고 나는 짧은 숨을 몰아 내쉰 뒤 계단을 마저 오른다.
어젯밤에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재중으로 남은 전화 3 통과 냉랭함이 묻어 나오는 딱딱한 말투의 문자 한 통 때문이었다.
‘모리의 형입니다. 계속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 지금 모리와 함께 이신가요?’
연락을 줘야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모리가 없어지자 그전엔 만날 일 없던 사람들과 마주해야 할 일이 연속하여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