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음흉한 마녀예요."
지원은 한순간 날카로운 눈빛이 되었다가 슬픈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안나씨에게 이런 말을 하면 반감만 사겠지만 사실인걸요. 내가 대학생 때 아저씨들이랑 우리 집에 놀러 온 그 여자를 처음 봤는데, 끔찍하게 촌스러웠어요. 유치한 캐릭터가 찍힌 티셔츠 아래에 사이즈도 안 맞는 면바지를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는 지저분한, 키만 큰 아줌마였어요. 그런 여자가 욕심을 가지니까 무서운 거예요. 주제넘은 걸 바라게 되니까요. 나에게 언제나 ‘너희 엄마는 너무 멋지셔. 특별한 분이야.’라고 말하더니, 급기야 자기가 특별하게 되고 싶어진 거죠.
나이에 걸맞게 꾸미는 법도 정원 가꾸는 것도 우리 엄마에게 배운 거면서, 자신의 오리지널은 없고 모방만 거듭하는 주제에 정말 뻔뻔스러워. 엄마는 발레리나였지만 몸이 약해지고 무대에서 물러난 후에는 젊은 미술가들에게 관심을 가졌어요. 엄마가 아틀리에를 세우겠다는 뜻을 밝히자, 은혜가 도와준다고 끼어든 거지요. 무슨 수를 썼는지 모리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본격적으로 작가들을 모으는 작업을 시작해서 완전히 입지를 굳혔어요.
아틀리에 개관 전날 엄마는 업자들을 불러 연못에 물을 채우고 수련을 심는 작업을 지시했어요. 그런 행사가 있는 날에 은혜가 참견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은혜는 개관 전에 처리할 일들이 많아 그날만큼은 아틀리에에 들리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분명 갔을 거예요. 기념으로 둘이 오붓하게 술 한 잔씩 하자고 꼬드겨서 우리 엄마를 살해한 거죠. 엄마가 살아있었을 때 은혜가 고향에서 보내왔다고 복숭아술 몇 병을 가져다준 적이 있어요. 엄마는 복숭아털 알레르기가 심해서 마시길 거절했는데 은혜가 말하길 ‘복숭아열매를 넣어 담근 술과 복숭아꽃잎으로 향만 낸 술 두 가지가 있어요. 꽃잎은 문제없으니 걱정 말고 마셔요.’라고 했죠. 꽃잎술은 정말 아무 탈 없었어요. 술 못하는 엄마도 옆 사람이 따라주는 데로 잘 마셨고요.
하지만 그날은 달랐을 거예요. 복숭아털이 엄마의 목을 조였을 거예요. 검시 때 엄마 위에서 복숭아꽃잎이 몇 장 나왔어요. 사인은 익사였지만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자기 키보다 얕은 물에서 익사라니, 엄마를 웃음거리로 만들 뿐이잖아요? 복숭아 알레르기가 심하면 손끝에만 닿아도 피부가 부어오르죠. 그걸 삼키면 식도가 부어서 기관지를 누르기 때문에 숨을 헐떡이게 돼요. 심할 땐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까지라서, 결코 경시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아틀리에에서 두 가지의 술 모두 발견됐어요. 그렇게 된 거예요. 복숭아꽃잎 술로 취하게 한 후에 복숭아열매 술을 준거예요. 그 여자가 목을 조른 거라고요. 어때요? 아직도 그녀가 젊은 예술가들을 조력하는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하나요? 그건 그저 윤리를 상실한 여자가 집착하는 롤모델 흉내 내기에 불과한데도요?"
아틀리에에 대문에 'Happy New year' 문구 적힌 큼지막한 갈랜드가 걸려있다. 문 건너편에서 “빨리 해가 지면 좋겠다.” 하는 선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원으로 들어서니 선영, 석민, 로난이 밖에 서서 나무 위에 걸어놓은 반딧불 전구들을 보고 있다. 지금 막 설치를 마쳤는지 상자들이 땅바닥에 널려있고 세워진 사다리 위에서 남은 전선이 달랑거린다. 정원수들을 감싸 안은 초록색 선들은 아직 그 존재감 미진하지만 날 저물면 한해의 마지막을 기념할만한 아름다움을 발할 것이다.
“일 안 하고 어디 갔나 했더니 안나씨 데리러 갔었구나.”
여는 때와는 달리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성민은 공동체의 의무에서 이탈한 지연에게 언짢아서가 아니라 고된 노동에 기운 빠져서 어깨가 처져있다.
은혜가 포틀럭 파티를 제안했고, 다행히 지연이 집으로 픽업 와준다기에 안심하고 용량 큰 음식을 준비했다. 그 덕분에 작년에는 남자 4명이서 했던 데코레이션 작업을 오늘은 두 사람이나 빠진 절반의 인력으로 처리해야 했다. 더군다나 실종한 한 명의 남자 때문에 곤란한 와중에 유용하게 쓰였을 다른 한 사람을 운전기사로 활용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파티 시작 전부터 지친 두 남자를 향해 사죄의 뜻을 밝히자, 로난이 "It couldn't be helped. Never mind." 하고 쿨하게 대답하고는 성민을 아틀리에 안으로 데려간다.
실내는 해지기 전부터 부지런히 깜박이기 시작한 트리 전구들이 연말 분위기 조성에 열중한 상태였다. 어제 은혜의 전화를 받고 한 시간 일찍 왔지만 아쉽게도 준비는 얼추 끝나있었다.
“안나는 뭐 갖고 왔어?” 영수가 천장에서 내려온 펜던트 조명의 먼지를 후후 불며 묻는다.
“전 닭고기 스튜랑 애플파이예요. 초보 티 나는 생김새지만 맛은 그럴싸해요.”
나는 스튜라기보다 조림에 가까운 냄비 속을 떠올리고 선수 쳐서 변명했다.
“집에서 직접 해왔어? 대단하다! 난 레스토랑 가서 사 왔어. 그래도 맛은 보장할게.”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영미권 영화의 파티장면에 나오는 가정식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런 간편한 방책은 생각도 못했다. 요령 있게 고생하지 않고도 파티 준비를 해낸 영수에게 존경심 담은 눈빛을 보낸다.
“미안해. 너무 성의 없지? 제발 그런 원망의 눈빛만은 보내지 말아 줘.”
드물게 약속시간에 늦는 은혜를 기다리는 동안, 성민은 다시 활기를 되찾아 자신이 가져온 와인을 식전부터 개봉했다. 코르크 마개 열린 와인 병에서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리는 자주색 액체가 각자 앞에 놓인 크리스털 글라스 안으로 졸졸 새어나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정원 조명에도 스위치를 올렸고, 콩알만한 그것들이 발광하는 모습은 지구 밖 우주에서도 보일 듯이 화려했다. 섣불리 진행된 파티 스케줄에서 한 타임 늦게 도착한 은혜는 양손에 직접 했음이 분명한 김이 나는 냄비 음식과 복숭아열매 담긴 술을 버겁게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