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평생 잊지 못해

by 새아

“어제는 지원이랑 단둘이 만난 거야?”


은혜가 지연과 전면 유리창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명과 어우러진 조경을 조망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래? 아참, 지연아. 안나한테 응접실 쪽 정원 보여줬니? 그걸 안 보고 넘어가면 안 돼. 어서 가보자.”


은혜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응접실 쪽으로 이끈다. 응접실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지난여름에 오늘과 같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던 생소한 감회가 재차 밀려온다.


이 부분은 골목의 가로등 불빛 비치는 대문 쪽 정원과 다르게 평상시 밤이면 담장에 가로막혀 칠흑의 어둠뿐이었다. 배경이 어두운 만큼 스위치 올린 조명과의 경계선이 또렷하여 불빛의 산란한 움직임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것은 은혜의 낯선 뒷모습을 좇아 처음 봤던 하계의 정원처럼 호화롭다.


“마음에 드니? 틀림없이 좋아할 줄 알았어. 깜빡이는 빛 계속 보고 있으며 두통 난다. 이제 여기 와서 좀 앉아볼래?”


은혜가 내 쪽을 바라보는 테이블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앞으로 손가락을 까딱인다. 그녀가 이런 가벼운 제스처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다리를 움직여 그녀가 시킨 대로 그녀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는다.


“오늘 스튜 너무 맛있더라. 소스를 어쩜 그렇게 잘 만들었니? 파이도 디저트로 아주 그만이었고. 단 거 영 싫어하는 하원이도 두 조각이나 먹게 만든 정도면 훌륭한 거야.”


원래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은혜이지만 방금은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기 위해 급조한 목소리를 내어 억지스러운 칭송의 인상을 남겼다. 참을 수 없게 껄끄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속에 걸려있다.


“어제 지원이랑 이야기 잘 됐니? 뒤에서 이런 말은 좀 험담 같지만, 나는 그 아이하고 잘 안 맞거든.”


은혜가 느닷없이 지원의 이야기를 꺼낸다. 심기 불편한 골자를 바로 밝혀온 것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아서 좀 얼떨떨했어요. 모리 아버지와 은혜선생님에 대한 지원 언니의 생각을 전해 들었어요. 아무래도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더 자상하게 느끼셨나 봐요. 모리의 두려움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셔서 저도 좀 울컥했지만, 유익한 대화였어요.”


“그래? 그럼 나에 대한 생각은 뭐였는지도 말해주겠니?”


이것은 반가운 요구였다. 은혜의 진실은 무엇인지 짐작하며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어 어젯밤부터 잠 한 숨 못 자고 지금에 이르렀다.


“은혜 선생님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했다고 믿고 계시던데요. 오늘 가져오셨던 복숭아술을 흉기 삼아서요.”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쿡쿡 웃는 소리를 냈다. 와인 한잔과 도실주 한잔을 마셔서 인지, 합당치 않은 부분에서 괴이하게 나오는 웃음을 억누를 수 없어 나조차도 의아함을 가진다.


“응. 그랬구나.”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래서 안나는 그 애 이야기를 듣고 간밤에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하고 물으며 속내 읽을 수 없는 미소를 툭 던진다.


“판단 보류 상태예요. 은혜 선생님 본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까요.”


나는 나에게로 돌려진 발언권 화살을 다급히 은혜 쪽으로 쳐냈다.


“나에게 자기변호를 원한단 말이지. 그건 곤란한데……. 너같이 어린애한테까지 변명할 마음은 안 들어.”


그녀가 얼굴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검은색 터틀넥 니트가 답답한지 목 부분을 조금 끌어내리며 말했다.


나는 앞에서 들려온 어린애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아님 어디 다른 데에서 흘러온 것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은혜는 타인을 비하하는 말을 조합해 낼 수 없는 사람일 텐데, 누군가 질 나쁜 대본을 쥐어준 게 분명하다.


“안나야, 이 일은 단 하나의 감정에서 기인한 일이란다. 여자들이 질투심을 느끼는 상대가 누구인지 아니? 질투심이 없는 여자야. 자기 안에 오직 자기 자신만이 존재해서 다른 여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여자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제일 잘났어. 제일 예뻐.’ 하고 다니는 그런 여자는 결코 아니야. 이 여자는 아무리 공주병 걸린 꼴불견이라도 너그러이 수용해 버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 그 여자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 하나이기 때문이야. 다른 여자가 어떤 품위 없는 행동을 하던지 그게 자신이 아닌 이상 시야에도 안 들어오는 거지. 그건 아량이 넓다거나 상냥하다는 성격이랑은 거리가 멀어. 오히려 이기적이지. 널 보면 또다시 시기심이 차올라. 멋진 여자로 탈바꿈한 줄 알았는데, 그런 꾀죄죄한 감정을 다시 품다니 나 자신에게 실망이 크단다. 단순히 수연씨와 판박이인 너의 외모나 발레리나라는 공통점 때문만이 아니야. 네 안에는 너 자신밖에 없지? 너……. 질투라는 감정이 뭔지나 아니? 모리가 잘 알아본 거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자와 같은 부류다!’ 하고 한눈에 골라낸 거야. 놀랍지? 안나가 기뻐할 만한 이야기 해줄까? 너는 모리에게 수연씨의 대신이 아니야. 모리는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인 거야. 아버지인 상림선배처럼.”


모리가 나를 내팽개친 이유를, 그에겐 더 이상 사랑하는 여인의 대리인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모리의 아름다운 어머니는 다른 누구로 대체될 수 없어서, 그 외의 자격미달의 여자는 체념하며 돌아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은혜가 어느 밤 의미심장하게 전해준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은혜는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선생님이 죽였다는 건가요?”


질투를 아니, 모르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나는 결말을 알고 싶다.


“아니. 경찰에게도 말했다시피 난 그날 아틀리에에 가지 않았어.”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모리와 나만 아는 사실을 알려줄게. 원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내 눈앞에 흉계를 꾸미는 데 능수능란한 모사꾼의 교활한 얼굴이 있다.


‘모리와 당신, 단 둘만 아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