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신경 쓴 옷차림은 추위에 의해 기세 꺾여 어차피 두루뭉술하게 묻혀버릴 참이었다. 무릎 밑까지 길게 떨어져 온몸을 휘감는 검정 울 코트 안에 니트며 카디건이며 보온성 의류를 꽉꽉 껴입고, 빨간 타탄체크무늬 목도리를 얼굴까지 덮도록 맨다.
동그래진 몸통 위에 세모꼴로 펼쳐진 머리카락은 건조주의보 내려진 날씨로 인해 정전기를 만들어 삐죽삐죽 뻗쳐있다.심술궂은 꼬마 마녀 같은 모습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장갑과 핸드백을 챙겨 집을 나선다. 형광 핑크색 스티치 들어간 양모와 양가죽의 오트밀색장갑이 유독 도드라져 유치한가 싶었지만, 침울한 색의 겨울옷 사이에서 굴하지 않고 발랄함을 뽐내고 있어 그대로 손에 낀다.
타닥타닥 내려가는 계단 벽면이 말끔해졌다 했더니 크림색으로 새로 도색되어 있다. 누군가가 새겨놓았던 목적 불분명한 낙서들이 페인트 아래로 묻혀 자취를 감췄다. 그 은닉에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매끈하게 광택 나는 도료의 질감은 근사하고 공기 중 코 끝 싸한 화학 약품 냄새는 박하향만큼 개운하다.
카페에는 약속시간보다 십오 분 빨리 도착했지만, 지원은 나보다 먼저 와서 두껍고 윤기 나는 이파리를 매단 고무나무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있었다. 지원이 정한 이 카페는 주원과 만날 때와 동일한 장소로 남매 두 명 모두 선호하는 곳인 것 같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사람들로 북적여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안나씨, 빨리 왔네요? 오는데 고생했어요. 밖에 너무 춥죠?”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물었다.
“정말 추워요. 칼바람 불어서 코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요. 근데 많이 기다리셨어요?”
나는 목도리를 풀고 머리를 정리하며, 그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직사각형으로 네모 각진 물건을 바라본다.
‘부유한 좀도둑’이라는 이름을 새긴 하얀색 커버의 책은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던 남미계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한때 유행을 타고 베스트셀러의 정점에 올랐다가 지금은 스테디셀러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은 나도 읽어보았는데 전개가 느려도 너무 느려, 페이지 수에 과도한 욕심을 가진 사람이나 쓸만한 글이라고 언뜻 생각했었다. 스피디하게 흘러가는 생활에 질린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하여 사들인 걸까.
“아니요. 기다리지 않았어요. 읽던 책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일부러 빨리 나왔는데, 카페 안이 시끄러워서 전혀 집중이 안 되지 뭐예요. 결국 다 못 읽었어요.”
말과는 다르게 아예 집중이 안 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책갈피가 표시하는 나머지 분량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미련 남은 눈빛으로 이제 사건 종결 단계에 다다랐을 하드표지의 책을 톡톡 두 번 두드린다.
“제가 좀 빨리 도착하기도 했으니까 못 읽으신 거 끝내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시간도 얼마 안 걸릴 텐데 찜찜하잖아요?”
나는 카페 안을 구경하며 서성거려도 상관없었고, 오히려 몇 쪽 남지 않은 페이지를 다음번으로 밀어놓는 것이 태만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래도……. 그런 실례를……. 해도 괜찮겠어요?”
그녀가 유감이라는 듯 나에게 되물었을 땐 이미 책으로 손을 뻗은 상태였다.
“세 남매 중에 내가 유일하게 딸이기 때문에, 나는 알아요. 우리 아버지는 내 남동생들이 그렇게까지 무서워할 만큼 엄격하기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아버지가 아들은 강인하게 키워야 한다는 교육관을 투철하게 고집하시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따뜻한 포옹력도 발휘하시는 분이라고요. 못된 남자애들. 그런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철벽이니 독단이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함부로 말할 수가 있어.”
지원이 두 동생에게 서운함을 호소하며 원통해한다.
“하지만 딸을 대할 때랑 아들을 대할 때의 아버지 분위기가 다르건 사실이잖아요. 딸자식만 있는 아버지는 점점 여성스럽고 자상해진다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말인가요?” 그녀가 내 말을 자르고 끼어들어왔다.
“아니요. 그냥 일반론으로.”
이야기가 고조될수록 공격적으로 대화를 이끄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차이가 당연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되는 거잖아요. 이제 둘 다 어른이고 독립도 했는데,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게 난 너무 속상해. 특히 모리는 유약한 면이 있어서 더 그래요. 주원이야 집에서만 고분고분하고 밖에 나가면 아버지 그늘 아래서 벗어난 지 오랜데, 모리는 그럴 기미도 안 보이니까 누나로서 불안한 거예요. 사회생활은 늠름하게 잘하는 애가 왜 아버지 앞에선 벌벌 떠는 걸까. 아버지가 모리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 줄 알아요? 당신이랑 판에 박은 성격이라고 얼마나 각별해하시는데,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리가 아무것도 모를 리 없어요. 당신의 아버지가 풍기는 기괴한 오라를 예민한 모리가 누구보다 잘 감지하기 때문에 그만큼 두려움이 큰 거예요.’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입장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가 제삼자인 나의 의견을 고분고분히 받아들일 리 없기 때문에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나의 앙다문 입술에서 불만의 증후를 발견한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우리 아버지가 유별나다고 말하고 싶겠지요? 다들 그런 말들을 하던데 말이에요.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우리 아버지가 특별히 강하지 않았으면 견뎌내지 못했을 거예요. 다른 남자들이라면 사랑하는 여자를 두 명이나 잃고 제 기능을 할 수 있었을 거 같나요? 모리의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에게 우리 아버지가 어떤 강인한 복수를 했는지 모르죠? 그것은 어느 누구를 상대로 하든 그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강한 남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방법이지요. 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아버지가 단 한 번의 타격으로 건장한 남성의 목숨을 빼앗는 장면을 말이죠. 바위 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악인의 얼굴을 함몰시키곤, 그 손에 더러운 찌꺼기가 묻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셨어요. 물론 그 사건은 판단 내리기 까다로운 화젯거리가 되었지만, 다행히 정당방위 사고라고 처리되어서 법적 문제는 없었어요.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분명 알고 있었을 거예요. 자신의 주먹에 실은 분노가 그 사람을 죽이리라는 것을.”
그녀가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듯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인 내용임이 틀림없었지만, 이미 상림이 쌀 한 가마니만 한 바위를 들어 옮긴 소란을 경험한 후여서인지 그의 힘에 대해선 그리 놀랍지가 않다. 도리어 자신의 아버지가 범한 살인을 미화시켜 떠받드는 지원의 태도에 당황스러운 불쾌함을 느낀다. 무엇보다 모리 친어머니의 죽음과 상림에 관한 그녀의 이야기는 앞서 들었던 주원의 묘사와는 상이했다.
“하지만 동생 분께서 말씀하시길, 그날 아버지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다고…….”
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주원이가 그랬어요? 그 아이는 아직도 쓸데없는 생각을 가지고, 한술 더 떠서 여기저기 함부로 떠들고 다니기까지 하는군요. 착각이에요.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질 나쁜 얘기를 지어낼 수 있는 건지……. 주원이 말은 깨끗이 잊어버려요. 남자애들이란.”
그녀의 확신에 찬 대답에 더 이상 의문을 표할 수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팽팽히 당겨진 분위기를 무너뜨리는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려온다.
두둥실 떠오른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액정 속에 갇힌 채로 응답을 기다려서, 맞은편 지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는다. 은혜에게 지원과 함께 있음을 알리자, 그녀는 내일 카운트다운 파티 때에 일찍 와서 장식 준비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청하고 속히 전화를 끊는다.
“자기네들이 선생님이라고 추켜세우는 그 여자의 본모습이 뭔지 알아요?”
그녀는 또다시 폭탄발언의 태세를 갖춘다. 담벼락 위로 도약하기 위해 허리를 움츠리는 고양이처럼,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한꺼번에 방출하는 것이 그녀의 말버릇인 듯하다.
나는 아무런 대꾸하지 않고 온기 사라진 찻잔의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