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죄송합니다. 모리가 안나씨가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기에 전혀 생각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근데 어쩌죠? 저도 모리가 어디에 있는 줄은 모릅니다. 스페인에 있는지 어쩐 지도 확실치 않아서, 어떤 말씀도 못 드리겠네요. 이거 정말 면목 없습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앞에 놓인 머그잔과 스푼을 정신 사납게 만지작거리며 겸연쩍게 웃기만 한다. 내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가능성 제로의 일이라고 확단하고 한 술 더 떠 떠벌리기까지 한 모리가 야속하다.
“그럼 제가 보낸 편지들은?” 모리에게 친구로서 부탁받은 것에 불과한 사람을 원망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미운 마음이 든다.
“마지막 글까지 잘 모아두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모리가 안나씨에게 보낸 답장들에 명의만 빌려주었을 뿐이고, 그저 그 녀석의 사주에 따랐을 뿐입니다. 첫 글은 모리가 직접 만든 작품이고 나머지는 제가 썼지만 모리가 불러주는 그대로 받아 적기만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딱히 몰아세우지도 않았는데 그는 요목조목 일러바치더니, 정중히 머리 숙여 사죄의 뜻을 표한다. 내가 육체적 고문을 행하진 않았지만, 혼자서 정신적 고문을 받아 버린 듯싶다. 글을 읽은 사람이 모리가 아니라면 나로선 오히려 안심이다. 뒤죽박죽 된 감정에 삐뚤빼뚤한 글씨에, 그에게 들켜봤자 자랑거리 하나 없다.
“괜찮아요. 엄밀히 말하자면 모리에게 보낸 메시지였지만……. 그래서 지금은 모리와 전혀 연락이 안 되나요?”
아침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나의 둥지에서 동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이런 불상사를. 그래도 설마 했던 최악 상황이 실현되니 앞이 깜깜하다.
“이번 7월에 모리가 갑작스럽게 제 집으로 와서 이주 정도 머물고 떠난 뒤, 안나씨와의 일 때문에 전화통화를 한 번 하고 그러고 나선 연락이 안 됐습니다. 저도 연결을 안 해본 것은 아니고 몇 번은 시도해봤지만 아직까지도 모리에게 답신이 오질 않아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편지에 관한 일도 모리가 신신당부를 한 대로 안나씨에게 함구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모리와 연락두절 상태니 갈팡질팡하고 있기도 했고요.”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쉽게 긴장하는 타입의 사람은 거짓말이 금방 밖으로 탄로 나기 마련이다.
“혹시 모르니까 바로 연결되는 연락처라도 남겨주실래요?”
“그러는 게 좋겠네요. 여기 지금 묶고 있는 호텔 전화번호예요. 긴 일정으로 온 게 아니라 가망 없을 것 같긴 하네요.” 나는 핸드백에서 호텔 데스크에서 갖고 온 명함만 한 인쇄물을 꺼내 건넨다.
“그러시면 계속 혼자 실 텐데, 계시는 동안 제가 가이드라도?”
그가 나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몸소 가이드 역을 제안해 오지만, 모리도 없이 처음 마주하는 모리의 친구와 해외의 골목골목을 쏘다니는 과제를 떠안느니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번 여행의 목적이 딱히 관광은 아니니까요.”
“아쉽네요. 여긴 볼게 많은 나라잖습니까? 아무쪼록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도중에 그가 문을 열고 나를 불러 세운다.
“아, 빼먹은 게 있는데요. 모리가 여기에 묵었던 동안에 모리 아버지께서 집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하셔서 아주 고생했었습니다. 모리는 ‘가지 않겠다. 그리지 않겠다.’ 이런 부정적 말만 늘어놓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고집불통이시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안나씨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이 되어 다시 아래로 걸음을 내딛는다.
어떻게 스페인에 있는 친구 집을 통해 종적 감춘 모리와 연락이 통할 수가 있는 거야? 상림은 모리의 행방을 알고 있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는 거잖아?
그리지 않겠다는 것은 상림이 모리에게 의뢰했던 그 그림인가? 하지만 그것은 이미 승낙하고 완성단계까지 이르지 않았나.
떠나오기 전에는 재회를 확신했었으나 모리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홀로 타지의 거리를 걷는 나의 존재가 흐려진다. 모리가 사라진 건지, 내가 모리 없는 세계로 빠진 건지. 원래의 세계에선 모리가 나를 찾고 있을까?
호텔 가까이에 있는 레스토랑을 겸한 바의 테라스 자리에 앉아 가족, 친구 단위의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고 떠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스스로 사고에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않아 상그리아 한 병을 무작정 주문해 버리고 여간해선 여자 혼자 마시긴 힘들어 보이는 물 항아리 크기의 향긋한 향 가득한 술병을 앞에 놓고선, 저녁으로 시킨 대구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상그리아의 알코올 맛 나는 와인대신 그 안의 사과를 건져 먹었으나, 그것을 아삭아삭 씹어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목 뒤로 넘어온 눈물의 짠맛 밖에 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와 은혜에게 전화하여 모리의 무자비함을 일러바쳤다. 모리가 모두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친구에게까지 거짓말을 사주했다고. 그런 행동 정말 용서할 수 없고 지금은 허탈함에 머리가 윙윙 돌아 침대에 누워있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모리가 어째서 이렇게 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 너무 불안하다고.
아까는 가족들끼리 식사하는 곳에서 넋 놓고 있다가 울음이 났는데 흑흑 소리가 새어 나와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울고, 은혜에게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계속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