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본래의 자기처럼 연기하기 위해선 그 배역에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시켜 표현하는 방법밖에 없음을, 나는 발레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무대에 섰을 때 깨달았다. 한 단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는 관중들에게 내 배역을 이해시키기 위해 얼굴 위에 가느다랗게 날 선 근육 한 다발의 이완과 손끝의 떨림조차도 함부로 여길 수 없었다.
“숀펜과는 뭐야?”
“잘생긴 것도 아니고 남성답게 박력 있지도 않은데, 묘하게 섹시한 사람.”
“에이, 그거 박해일 서양 버전 아니야?”
“아무렴 어때요. 어쨌거나 난 숀펜과 할 거예요.”
나의 소신을 확고하게 전하며 두 개의 그릇을 소서에 받쳐 지연에게 건네자, 그는 한 손에 하나씩을 받아 들고 조심조심 식탁으로 걸음을 옮긴다.
데쳐놓았던 브로콜리에 올리브유와 발사믹식초를 살짝 두르고, 단맛과 신맛의 비율이 딱 맞게 익은 파인애플도 몇 조각 잘라 함께 담는다. 마지막으로 푸들푸들하게 흔들리는 반숙의 달걀 프라이를 팬 째로 식탁으로 옮겨 놓고 조촐한 식사를 시작한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합장해 인사한 후 손으로 바게트를 뜯어 수프에 찍어먹는 지연은, 모리와 오랜 친구인 주제에 자질구레한 취향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모리는 수분이 닿아 질겨진 바게트는 질색했었다.
식사와 그 뒷정리까지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자 지연이 소파에서 창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앉아 건물 뒤쪽으로 사라지는 해를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눈에 잔상 남아서 두통 나요.”
나는 해와 지연 사이에 몸을 끼워 둘의 소통을 가로막고 섰다. 반짝거리는 지연의 까만 생머리가 탐스러워서 손을 갖다 대자 그제야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가 빨리 지네. 겨울은 이래서 싫어.”
그는 내가 겨울을 불러온 당사자이기라도 한 듯이 자신의 머리에 얹어진 내 손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며 투덜거린다.
“겨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이제 모리에게 가려고요. 따뜻한 바르셀로나에서 겨울을 보내는 현명한 계획을 세웠거든요.”
“너 의외로 약삭빠른 구석이 있네. 근데 눈 쌓인 겨울의 낭만을 포기할 수 있겠어?”
“난 원래 낭만 같은 거 실감 못하는 사람이에요.”
“어쩐지 전해지는 마음이 바삭거리긴 하더라. 모리랑 연락은 된 거야?”
“서신왕래만.”
그는 나의 결정에 딱히 반대는 하지 않고, “여자 혼자는 위험할 텐데…….” 하며 말끝을 흐렸을 뿐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왔다.
큰길로 나와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느긋한 기분으로 걸어 나간다. 호텔로 오는 택시 안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확인하고 오늘 오후는 그 명성 자자한 건축물 앞에서 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숙소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니 바로 길쭉하게 솟은 옥수수 모양의 구조물이 보인다. 가까이 있어 보여도 십분 정도는 걸어야 할 것이다. 눈비 내릴 리 없는 파란 하늘과 습도 낮고 차지 않은 공기는 결코 겨울의 특징이 아니지만, 상점들의 장식은 이곳도 어김없이 연말의 무드에 잠겨있음을 증명한다. 해 넘어가 쇼윈도 유리에 걸린 전구 조명이 켜지면 사진 찍어둬야지, 하며 가방 안의 카메라를 손으로 만지작하고 확인해 본다.
역시나 관광지 주변은 급격히 사람들이 많아져서 어지럽게 떠들썩하고, 길가에는 대절한 버스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주차되어 있어 내가 상상했던 가우디 걸작 성당의 고매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게다가 대대적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개운치 않게 미완성의 형태여서, 그것의 본모습은 오히려 나의 상상 속에 있었다.
모두 쌍둥이처럼 보일만큼 비슷한 생김새의 백인 소녀들이 해석불가의 언어로 생기발랄하게 떠들고 있다. 생소한 외관의 그녀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념사진에 집착하는 외국 관광객인 것에 아주 조금 동질감이 생겨나기도 한다.
입장하려는 줄이 어마어마하여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성당 주변을 돌아 사진 몇 장만을 남겼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꺾어 바라본 뾰족한 꼭대기에 까만 새로 변한 모리가 우두커니 앉아있어서 최대한으로 줌을 당겨 사진을 찍어본다.
마켓에서 마실 물과 먹을거리를 사서 돌아오는 길은 바삐 사라진 겨울 해 때문에 어둑했고, 나도 그 템포에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호텔 로비에는 도착하니 체크인 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한 조명 치장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따뜻한 무드를 자아내는 전구등이 오히려 내가 혼자임을 실감하게 만들었고, 쓸쓸해지려는 기분의 징조가 못마땅하여 괜스레 리셉션니스트에게 웃음으로 인사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방이 있는 층을 누른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발을 내뻗어 아슬아슬하게 엘리베이터를 잡아탄 백인 커플이 안도의 감탄사와 함께 눈인사를 전해온다. 나와 같은 층에 그들의 안식처가 있는지 버튼도 누르지 않고 품위 없게 시시덕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