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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Dec 16. 2024

거구의 사내와 그를 닮지 않은 아들

평생 잊지 못해

 철 대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자동차 전조등의 노란 불빛이 전면 유리창을 통해 안까지 비춰온다.


 묵직한 문을 벌컥 밀고 들어오는 기개 당당한 걸음걸이의 주인공은 과연 소문 무성한 유명인다운 면모를 보인다.


 “우리 안나양은 여기 내 옆으로 와서 예쁘게 서있으세요.” 은혜의 부름에 나는 재빠르게 내 자리를 찾아간다.


 “자, 여러분, 스탠바이하시고! 허리 세우고 얼굴엔 미소!” 은혜가 이번에는 모두가 듣도록 탁탁 손뼉을 쳐서 주의를 집중시키더니, 하루의 첫 손님을 맞이하는 일류 호텔의 지배인 같은 대사로 명령한다.


 늘 흐물흐물거리던 사람들이 직립 자세로 기합 들어간 모습은 참을 수 없게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손쓸 도리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깔깔거리는 당돌한 나의 웃음소리는 한순간 주위로 전염되어 모두가 나를 모방한 소리로 크게 웃는다.


 때마침 웃음의 장내로 입장해 걸음을 멈춘 상림은 ‘이 바보 젊은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리도 경망스럽게 웃는가.’하는 감상을 찌푸린 얼굴에 만연히 드러낸 채로 우뚝 서서 우리를 구경한다.


 “어서 와요. 상림 선배. 역시 오늘도 멋쟁이시네요.”


 우리들 중 유일하게 웃음에 항체를 가지고 있던 은혜가 아직 웃음기 떠나지 않은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상림을 맞이한다.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상림이 목에 두른 멜란지 그레이의 목도리벗어 내리며 의아함을 표출한다.


 “아니요. 설명하자면 길지만, 새로운 서프라이즈의 시도랄까? 뭐, 그런 거예요.”


 은혜가 좀 전의 해프닝에 대해 얼버무리며 나를 ‘막내 자제 분의 애인’이라고 소개한다. 내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꾸벅 인사하자, 상림은 반가운 기색 없이 “그래요. 그렇군요.”라고 응답하며 냉랭하게 나를 스쳐 지나간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쇠약의 기운 없이 벌어진 어깨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걷는 상림은 키가 190은 돼 보일 만큼 위압적이다.     




 “백합향기와 함께 마시는 와인 맛은 꽤나 묘하군. 저렇게 붉은색이 진한 백합은 처음 보네만, 신개량종인가? 와인 빛보다 진하군.” 상석에 앉아 와인을 음미하던 상림이 테이블 가운데의 아마릴리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새로운 건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색이 붉기에 매혹되어서 몇 송이 사 왔어요. 전 원래 하얀 백합을 좋아하지만, 붉은 것도 그 못지않게 예쁘지요?”


 은혜가 핏빛 도는 색에 노심초사했던 일이 어제 일처럼 멀게 느껴질 만큼, 능청스레 꽃의 아름다움을 늦둥이 자랑하는 부모처럼 늘어놓는다.


 “그렇군. 아름다운 꽃은 그 색이 무엇이든 간에 변함없이 아름다운 거로군. 하지만 흰 백합의 순결함은 붉은 것이 당해내진 못하지. 우리 수연이도 하얀 백합을 참 좋아했어.”


 입에 머금은 와인 한 모금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상림이 나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상림의 왼쪽자리에 앉은 나는 그 시선이 찰나 일거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그라지지 않다가 은혜의 헛기침과 와인 품평을 요청하는 성민에 의해 상림의 오른쪽으로 넘어갔다.


 “음, 밸런스가 잘 잡혀서 마시기 좋군. 과일향이 돌아서 거친 느낌도 상당히 상쇄시켜 주고 있고. 이번에도 술 좋아하는 자네가 골랐나?”


 와인글라스에 코를 가까이 댄 상림의 눈동자가 성민을 향해 올려져 있고, 상림의 눈길이 머무른 성민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아……. 아니요. 이번만큼은 안나님이 직접 준비하신다고 하셔서…….”


 ‘모처럼 도와주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다시 그쪽으로 넘어가버렸어.’ 성민이 나에게 입모양으로 전하는 “미안”이라는 메시지가 그의 속마음을 투영한다.


 다시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 모리의 아버지라는 인물은 모리와 전혀 닮지 않아서 생소하기만 하다. 상림의 굴곡 강한 얼굴형과 다부진 인상을 주는 높고 큰 코가 목탄을 사용한 거친 크로키의 이미지라면, 모리는 얇은 붓으로 그림 수묵담채화의 이미지이다.


 “안나양은 술을 즐겨하시는가?”


 “아니요. 공교롭게도 술이 몸에 전혀 맞지 않아서 즐기지는 못합니다.”


 “그건 공교롭다기보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 여자가 술에 능숙한 것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니 말일세. 못하는 술에 비해 와인 선택이 꽤 훌륭한 편인데, 오늘은 전문가에게 따로 추천을 받아서 인가?”


 “추천이라고까지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모리가 와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걸 옆에서 들어서요. 저는 와인에 문외한이지만 입맛 까다로운 모리는 웬만한 소믈리에보다도 신뢰가 가는 전문가라고 생각해요.”


 “그 녀석이 인정한 맛은 믿을만하지. 어렸을 때는 어마어마했다네. 하루에 세 번씩 막내 녀석 입으로 한 숟갈 더 넘기게 하려고 나랑 아내랑 위의 두 아이가 갖은 설득을 다 하며 얼마나 애썼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거야말로 그저 고마운 추억이지만. 녀석이 땅딸보가 아닌 것은 다 온 가족이 포기하지 않고 지속한 노력의 산물이야. 고마운 걸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게. 지금은 모델같이 쭉 빠졌으니까. 여기 남자 중에서 다리 외국인을 제외하면 모리가 제일 크지, 아마?” 은혜가 동의를 구하며 옆에 앉은 성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찌른다.



   

 식사를 마치고 상림이 가져온 값비싼 와인을 한잔씩 맛을 보며 상림의 설명으로 그 와인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 역시 선생님이 오시면 배우는 게 많습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술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절대 따라가지 못하는 역량이 대단하십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하이라이트네요.”


 내 몫의 와인까지 도맡아 들이키던 성민이 거나하게 취해서 없이 알랑거린다. 그에 비해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상림은 아직 무난하게 달아오른 얼굴 정도이다.  


 “이 친구, 꽤나 취했군.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는 것이 좋아. 도가 지나치면 있는 말 없는 말 구분 없이 쏟아내게 되기 마련이지 않는가.”


 그의 말에 성민은 금세 풀이 죽어 잠자코 있다.


 “그래도 촐싹거리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분위기가 사는 법이잖아요? 선배, 학교엔 술도 안 마시고 입에 발린 말 하는 학생들 수도 없이 많을 텐데, 뭘.” 은혜가 재빨리 성민의 편을 든다.


 “나는 그런 성품에서부터 자격미달인 제자는 두지 않아.”


 상림이 은혜의 말을 딱 잘라 반박한다. 별안간 언짢음이 들이닥친 그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딱딱한 기류가 주위로 퍼진다.


 “그나저나 모리 녀석에게서 연락은 아직 인가? 은혜, 자네 말이야. 모리를 감싸주거나 하면서 나에게 무언가 감추는 거 아니지? 다들 알다시피 그 녀석이 건방진 구석이 있어도 무책임한 면모는 없지 않은가. 요즘 잠잠해졌나 했는데, 다시 말썽이라니.” 상림이 못마땅함에 혀를 끌끌 찬다.


 “고등학교 때 반항 좀 안 한 아들이 어디 있어요? 게다가 감히 상림 선배에게 어떻게 감출 수 있겠어요? 우리 쪽에도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지만, 걱정 마세요. 모리 나름의 계획이 있을 거라 생각하자고요.” 버럭 화라도 낼 것 같은 험악해진 상림을 은혜가 침착하게 설득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나? 짐을 챙겨 느닷없이 없어져 버리기나 하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계획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전시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모리가 없으니 곤란을 겪고 있겠군. 부모로서 자네들에겐 면목 없네.”


 “아니요. 큰 사항들은 모리씨가 이미 갤러리 사람들과 조율해 놓아서 다행히 문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 전시준비는 전번보다 순조로워요.” 선영이 빠릿빠릿한 비서처럼 야무지게 대답하여 위태로운 분위기를 무마시킨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자네에게 믿고 맡기겠네. 우리 예술가들은 작업할 때는 도무지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잘 돌봐주게나.” 싹싹한 선영의 태도에 마음이 가라앉은 상림은 다시 평정을 되찾고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가 어떠신지? 젊은 친구들이야 밤새 마시는 게 무리는 아니겠지만 나는 좀 노곤해지는군. 지연군, 택시 좀 불러주겠어?”


 지연이 택시를 부르는 사이, 상림은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 오늘은 무난했어.” 하원이 땀 닦는 제스처로 과장되게 이마를 쓸어내린다.


 “응. 다행.” 아기 얼굴과는 안 어울리게 주량이 센 영수가 와인 몇 잔을 맛있게 비우고 나서 발그레한 볼이 된 채로 중얼거린다.


 하원과 영수는 남매 참새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아 피해 없이 지나간 저녁 공습에 안도하고 있다.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녹아내려 따뜻한 수증기처럼 공중으로 흩어지려는 찰나, 밖에서 ‘쿵’하는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땅을 울리는 거대한 소음에 모두가 하던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한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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