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 선배가 저번에 안나와 제대로 얘기 한번 못 나눴다고 아쉬워하셔서……. 갑작스럽겠지만 바쁜 중에 때마침 내일 시간이 나신다네.”
은혜가 이렇게 되어 유감이라는 듯 개운치 않게 말을 전한다. 푹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스멀스멀 움직이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전화기 속에서 흘러나온다.
“정말요? 무서운 분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만나 뵈려니 긴장되네요. 이제 와서 피할 수는 없지만 말이에요.”
응석 부리는 투로 말을 질질 끌어보지만 속마음은 딴판이었다. 직면한 상황에서 비켜설 용의는 일절 없다.
은혜는 나에게 물러설 마음이 없음을, 그 찰나에 간파하고선 “역시 그렇지? 하지만 그 사람이 강경파긴 해도 실은 허점도 꽤나 있는 아저씨야. 그렇게 무서워할 것까진 없어.”하며 나를 안심시킨다.
“그럼 말이야. 단 둘이서만 대면하는 건 아무래도 겁나니까, 아틀리에에서 다 같이 집결하는 걸로 하자. 어때? 그러면 한결 마음이 놓이지?”
그녀는 나에게 전화하기 전부터 고려해 놓았을 제안을 마치 즉각 떠오른 것처럼 ‘마침 좋은 생각났다!’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풀어놓는다.
“그렇게 해주신다니 저도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요. 성민이라든지, 귀여운 하원이라든지, 모두 틀림없이 도와줄 거니까요.”
나는 넉살 좋게 유들유들 거리는 하원과 한쪽에선 바보짓하는 성민을 한 세트로 상상하며 내일의 저녁식사도 제법 즐겁게 지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걸어본다.
“응. 모두 상림 선배와 작업도 해봐서 그 성격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안나가 SOS 청하면 다들 책임감 갖고 곧바로 구조해 줄 거야.
내일 저녁 몇 시간 동안만큼은 아틀리에 사람들의 가드에 의지하여 폐를 끼치게 될 터이니, 그런 나 자신에게 못마땅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일단 고비를 넘겨야 한다.
실은 이런 때에 믿음직스러운 사람들이 든든하게 곁에 있어 마음 깊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정말 그럴 거 같아요. 그럼 덕분에 한시름 놓을게요. 내일 제가 준비할 건 없을까요? 저녁식사 후에 올릴 디저트라도.”
“흐음……. 상림 선배가 단 건 입에 절대 안 대니까 준비하려면 와인이 좋을 거야. 메인메뉴는 비프스테이크로 정했으니까 잘 어울리게 드라이한 걸로 골라와 줘.”
“네. 알겠어요. 단 걸 전혀 안 드시는구나. 모리와는 다르네.”
“그렇게 생각해? 알고 보면 속속들이 닮은 게 많은 부자야.” 은혜의 의외의 반대 입장에 깜짝 놀란다.
‘둘이 닮았다니, 어느 부분이?’
은혜와의 전화를 끊고서 괜찮은 와인도 사고 장도 볼 겸 외출 준비를 한다. 첫눈 내린 어제의 추위를 기억하여 두둑한 점퍼를 옷장에서 꺼내어 걸치고 집에서 나와 건물 밖으로 발을 내딛자 ‘철퍽’ 소리가 나더니 그 발이 물에 잠긴다.
밤새에 눈이 비로 바뀌어 내렸는지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겼다. ‘그랬지. 어젯밤 천둥번개가 쳤었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젖은 신발 그대로 언덕을 내려간다. 축축해진 오른쪽 발이 점점 시려오지만 물 먹은 운동화가 푹푹 거리는 것이 재밌어서 발을 멈추지 않는다.
술을 못하기 때문에 와인이라면 단맛 나는 스파클링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는 것이 적성인 나는, 겉모습이 고급스러운 몇 개의 프랑스산 와인들 중에서 고민하던 중이었다. 여러 종류 중에 모리에게서 귀동냥으로 비교적 훌륭하다 들어둔 마고산의 와인으로 두 병을 골라 포장을 부탁한다. ‘모두 비슷해 보이는데, 정말 맛이 다를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까다로운 모리를 믿어보기로 하며 꽤 비싼 값을 치르고 매장을 나온다.
와인 두병과 생필품으로 채운 장바구니를 두 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엄마와 장을 보러 가던 시절에는 무거운 짐이 있으면 엄마와 내가 각각 손잡이 하나씩 잡아 무게를 나누어 들었었는데……. 여자 혼자 사는 것은 이따금씩 부당하게 생각될 만큼 외로운 구석이 있다.
붉게 물든 단풍 나뭇잎이 시들어 물기와 함께 음산함을 풍기며 바닥에 붙어있다. 그레이 아틀리에의 무거운 철문을 온몸의 체중을 실어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바닥에 깔린 철 지난 가을빛은 연극 무대장치처럼 인위적이어서 발을 들어놓기가 꺼려졌다. 내가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던 감독이 스탠바이 신호를 보내면 그제야 조명이 켜지고 막이 오르는 것 아닐까?
오싹한 기분으로 성급히 발을 움직여 정원을 가로지른다. 불빛 새어 나오는 현관의 문고리를 확 낚아채 연다. 손님이 올 때마다 대형 조립식 테이블이 자리하는 작업실에서 달그락거리며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과한가 싶을 정도로 일찍이 집에서 출발한 보람이 있었다. 유독 주광색인 아틀리에의 조명 아래 들어서자 막연히 일어난 불안감이 사라지고, 얼굴에 미소가 스르르 떠오른다.
나의 도착으로 한 명의 초대 손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집합했다. 손님맞이 준비도 막바지 단계로 들어서서 식기를 세팅하는 막내 그룹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느긋하게 손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은혜와 선영만이 식기와 크리스털 화병에 꽂힌 적색의 아마릴리스에 대해 절박하게 논의하는 중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키 큰 꽃이 오늘은 보통 때보다 색이 짙어서 유난히 멋져 보이더라고. 뭐, 괜찮지 않을까? 워낙 호화스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은혜는 걱정에 사로잡혀 테이블 가운데에 우뚝 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백합과의 식물과 온갖 종류의 꽃이 그려진 그릇의 균형을 따지는 동시에, 입 꼬리를 내리고 선영의 눈치를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위 맞추기 굉장히 어려운 분이시고, 어느 대목에서 태클 걸어오실지도 모르는데…….” 선영답지 않게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그 사람 기분에 따라 다르니까, 우리도 별수 없는 거야. 이쯤에서 운에 맡기자고!” 은혜가 선영의 등을 손바닥으로 탁 치며 ‘걱정하지 마.’하는 눈빛을 보낸다.
“안나야. 왔어? 짐은 나한테 줄래?” 성민, 로난과 함께 소파에 앉아 허드렛일 하는 하원과 영수를 감독하던 지연이 어느새 내 옆으로 와 내 양손에 들려있던 지참품을 자신의 손에 차지한다.
“일찍 도착했네. 예쁜 옷 입고 왔구나.” 그는 와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고개는 내 쪽을 향하고서 말했다.
‘예쁜 옷’이라는 평가에 고맙다는 인사치레의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적막이 흐르는 상황을 만들어버리고 만다.
‘안나는 생각이 많다.’라는 모리의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었는지, 나의 ‘고마워요’라는 한마디가 이끌어낼 수 있는 지연의 온갖 가지의 행동 확률에 지나친 염려를 갖고 사고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상대방에게서 내던져진 사소한 의미를 과대 판단하는 나의 이 문제점은 무익한 상상력의 무자비한 발휘에서 기인한다.
“오! 와인이네. 게다가 꽤 맛있는 구성이잖아. 기대되는데.” 지연과 내가 자존심 대결이라도 하는 것처럼 둘 중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눈싸움을 지속하고 있을 때, 성민이 우리의 정적 사이에 끼어들어 패키지 안의 와인라벨을 확인하고 눈을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