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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Dec 27. 2024

구엘 공원의 초입에서

평생 잊지 못해

 방문을 열자 창밖으로 보이는 낮게 깔린 유럽식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코너 윈도우가 설치되어 있는 복도 끝의 나의 방은 혼자서 쓰기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조망을 가졌다. 양 옆의 전면 창 앞에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치 않고 선다.


 아직 낮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남색의 하늘과 은근한 호박색의 거리 조명 불빛이 장인에 의해 세공된 보석처럼 고급스럽다.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너편 주택 출입문 앞에서는 젊은 연인 키스를 나눈다.


 중간에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던 이유는 장시간 비행의 피로와 비로소 모리와 가까워졌다는 안도감에서였다. 모리를 만나 나에게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을 영웅담으로 둔갑시켜 들려줄 요량으로, 피로회복을 끝마치지 못한 몸을 침대에서 일으킨다.


 창을 가렸던 무겁게 쳐진 커튼을 젖히니 잔잔한 햇살이 시냇물처럼 졸졸 비쳐와 실내를 적신다. 하늘의 파란색은 투명하게 맑고 떠다니는 새하얀 뭉게구름에선 천사의 하프 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청정함에 눈이 부신 날이다.


 샤워하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니 엄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남겨져있다. 도착 보고 없는 딸을 걱정하고 있을 엄마가 떠올라 시차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한국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엄마는 연결음 몇 번 만에 전화를 받는다.


 “너는 왜 전화를 안 하니? 엄마, 걱정되게.” 엄마는 나에게 나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사실 칭얼대고 있는 중이다.


 “미안해. 어제는 이것저것 구경하러 다니느냐고……. 나 때문에 잠 깼어요?”


 “아니, 잠이 안 와서 혼자 영화 보고 있었어.”


 불 모두 꺼진 집에서 자욱한 연기 같은 텔레비전 불빛 앞에 앉은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불면에 시달리는 밤이면 엄마는 조금 쓸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소파 위에서 담요를 덮고 고전 영화를 보았다. 엄마가 잠 못 이루는 날이 나와 겹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엄마가 틀어놓은 영화에 중간 합류를 하곤 했다.


 “그래? 왜 또 잠이 안 올까. 나는 지금 씻고 나왔어. 이제 준비하고 나가려고.” 나는 샤워가운을 입은 채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거울로 힐끔 본다.


 “모리는 만났니?” 엄마가 엄마답게 정곡을 찌른다. 이래서 나는 은연중에 전화하기를 밀어왔던 거였다.


 “아니, 아니. 아직. 오늘.”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좌우로 도리질하며, 나도 모르게 그와 만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해버렸다. 무작정 쳐들어온 주제에…….


 “그래. 그럼 모리 만나기 전까지 조심히 다녀. 여자애 혼자 보낸 게 엄마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된다.”


 “알았어요. 또 연락할게요. 엄마도 이제 한시름 놓고 얼른 주무세요.”


 “그래. 너도 어서 자야지. 아참, 넌 나간댔지. 특히 조심히 다니고 모리 잘 만나렴.” 호호, 웃은 뒤 달칵 소리를 내고 엄마가 멀어져 갔다.


 ‘오늘 무사히 모리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이 소망이 실현 불능 상태임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막연히 생각했던 일이 구현될까 말까 하는 분기점의 상태에 직면해 있는 나에겐,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징조가 나타나곤 했다. 성취 후를 상상해 보았을 때 머릿속에 펼쳐진 풍경이 마땅하게 여겨진다면 그 일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고, 얼토당토않다면 분명 실패할 것이다. 마치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아무래도 질 거 같은데.’ 하면 진짜로 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구체적 형태 없는 상대와의 기싸움에 패하여 모리와의 만남을 아무리 머릿속에 떠올려 봐도, 그것이 바로 오늘 오후에 있을 장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난센스로 느껴졌다.




 구엘 공원으로 향하는 오르막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나의 목적지는 이들과 같지는 않지만 시간이 된다면 모리와 함께 구엘 공원을 산책해도 좋을 것이다. 구엘 공원으로 가는 행렬에서 벗어나 나 혼자서만 왼쪽 길로 꺾어 들어간다. 동양인 관광객 여자애가 길을 잘못 안 거라 착각하고 방향을 바로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 해도 지나친 참견은 아닐 상황이다. 왼쪽이나 오른쪽 골목으로 빠지는 사람 한 명 없이 모두가 곧장 직진으로 길을 오른다.


 몇 번이나 편지를 부쳤던 ‘Larrard’ 길에서 51번째 집의 3층 B호를 찾아가는 길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내가 주소 적힌 종이를 들고 두리번거리자,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남성이 되레 나에게 어디를 찾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깔끔한 슈트 차림으로 외출하려 자신의 차문에 열쇠를 꽂으려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자상하게 몇 번씩이나 “Are you OK?" 하고 확인하는 다른 문화권에서 느껴진 헐거운 마음은 타인에게 지나친 경계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빡빡한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어 유감이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사라지는 차체 뒤에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가 알려준 대로 걸음을 옮긴다.


 높은 빌딩 보이지 않는 스카이라인 낮은 동네에서 어느 건물에서나 3층은 거의 맨 꼭대기 층이다. 베이지색 건물의 나무대문 옆에 ‘K. Bak’이라고 이름 적힌 맨 윗줄의 초인종을 누르니 “¿Quién es?” 하는 물음이 들린다.


 “저어……. 박경석 씨 되십니까? 저는 모리의……. 안나라고 하는데요.”


 안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K. Bak'이라면 분명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니다. 나는 계속 말을 잇는다.


 “연락도 없이 죄송합니다. 편지를 보낸다면 이주도 넘게 걸리고 달리 연락드릴 방도도 없어서 무작정 찾아왔어요. 실례가 되었나요?”


 드디어 건너편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한숨 섞인 곤란해하는 목소리이다.


 “아니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정말 큰일인데……. 일단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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