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첫 일정으로 전날 가지 못했던 구엘 공원을 돌고, 내려오는 길에는 10명 정도로 구성돼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거리 악단을 만나 사진을 찍고 그들에게 소정의 관람료를 지불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름난 시장에 가서 과일도 사고 줄 서서 바게트도 사서 이것저것으로 손이 한가득 찼다. 시장 과일 진열대에서 반짝거리는 사과들은 나로 하여금 어떤 불온한 상념도 떠올리지 않게 할 만큼 사랑스럽게 까르르 웃고 있었다.
넷째 날은 모리를 통해 알게 된 가우디의 건축물들 중 두 가지만 골라서 관광했다. 번화가 중간에서 경계선 없이 자연스레 묻어든 까사 바트요를 배경으로 하여 카메라 프레임에 내 얼굴이 들어갈 수 있도록 팔을 한껏 뻗어 사진을 찍었다. 다른 한 곳인 까사 밀라에는 직접 입장하여 1층부터 옥상까지 구석구석 돌아보느라고 다리가 욱신거렸다.
까사 밀라에서 나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데, 행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삐죽이 나와 있는 빡빡머리의 하얀 두상을 발견하고 점점 다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곧 모리와 전혀 닮지 않은, 그저 마른 체구의 서양인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기운을 잃은 채저벅저벅 걸었다.
모리를 만나고 몇 달이 지나서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들어섰나 싶었던 어느 날, 그는 머리가 민둥 해진 채로 집에 돌아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비명 지르듯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모리는 “선영이밀어줬어.”하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만져볼래?” 그가 머리를 내 쪽으로 들이밀자, 나는 얼떨떨해하며 까칠한 그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귀밑까지 내려오는 얇고 푸석한 머리 감촉이 너무 좋았는데. 외간여자의 손에 맡겨져 털썩털썩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내 손바닥 안으로 받아내 가슴에 품고 싶었다.
체리 한 근을 사가지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 방송을 보며 피곤함에 잠들었다.
다섯 번째 날에는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호텔 조식을 먹고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향했다. 겨울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바다와는 다르게 스산한 분위기는 없었고 날씨도 어김없이 하늘 푸르게 맑아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래사장 옆으로 깔끔하게 깔린 벽돌 길을 걸으며 뒷목과 어깨로 내려앉는 햇볕의 따스함이 바람막이의 화학섬유를 뚫고 피부로 내려앉았다. 길 곳곳에 키 큰 야자나무와 내 키보다 조금 큰 오렌지 나무가 섞여 사랑스럽게 심어져 있었고, 주위 건물과 조화이룬 예술 조형물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모리를 인식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도록, 이 도시는 내 시선을 악착같이 빼앗아가며 물신양명으로 도와주는 중이었다.
모리를 잃고 미망인처럼 바르셀로나 거리를 헤맨 지도 내일이면 열흘이 되고 오늘 외출 전에 대략 짐을 챙겨 놓았다. 몬주익 언덕에 샌드위치를 싸 가서 점심을 먹고 저녁이 되어 시작하는 분수 쇼를 피날레로 하여 낯선 도시에서의 일정은 마감된다.
어느새 익숙해진 지하철을 타고 에스파냐 역에서 내려 몬주익 언덕으로 향한다. 걷기엔 꽤 긴 길이다. 언덕 위에 멀리 자리한 카탈루냐 미술관을 목적으로 계속 걷고 있다. 그늘을 만들어 줄 가로수도 없는 불친절한 이 길이 여름엔 곤욕일 테지만, 지금 계절엔 황량하긴 해도 걸을만하다.
그리스 유적지에 서있을 법한 기둥들을 지나고 많은 계단을 올라와 정상에 도달했다. 내려다보니 내 발자국 찍힌 직선의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지면 있을 분수 쇼의 명당자리를 눈으로 찜해놓고 미술관을 바라보는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다.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도망간다.
나는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멀찌감치 흩어져가는 바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한 시간가량 바람의 장난에 너그러이 호응해주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미술관 왼편 길로 걷기 시작한다.
아름드리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있고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척추교정기를 착용하여 인위적으로 꼿꼿해진 사람처럼, 휨 없이 곧은 나무들이 하늘로 자라나 있다. 공산품처럼 똑같은 수목들의 나열 가운데에서, 어떤 변을 당했는지 뿌리 윗부분이 부러진 채 쓰러져있는 나무 하나만이 오히려 비범하게 돋보인다.
나는 보행의 진행을 막는 돌출된 나무로 달려가 줄기를 타고 올라섰다. 아직 생명력이 남아있는지 가지의 잎들이 푸른색을 띠었고, 나는 양팔을 펼치고 나무가 내쉬는 간당간당한 숨결에 맞추어 나무껍질의 세로 결 따라 이리저리 발을 옮긴다.
결국 한 바퀴 삥 돌아 미술관의 오른쪽으로 내려와 아까 점심을 먹던 벤치로 돌아왔다. 해는 슬금슬금 이불을 덮어 몸을 가리고, 그만큼 어두워진 하늘이 시계 역할을 대신한다. 나는 리와인드하여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가는데, 저문 해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때가 되어 한산했던 공간이 사람들로 메워지자 활기가 넘친다. 날은 어슬어슬해졌고 나는 중앙 분수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난간 위에 관광 열의 가득한 사람들과 다닥다닥 걸터앉았다. 겉에서 보기엔 위험천만해 보이는 자리이나, 제재하는 이 하나 없고 내부는 이미 균형이 잡혀 떨어질 염려 없이 안정감 있다. 물론 누군가 악의를 갖고 뒤에서 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가 나겠지만, 자리한 사람들은 위기의식 없이 쾌활하기만하다.
계단 앞에서 비보이 청년들이 노래를 틀어놓고 흥을 돋운다. 모자를 돌려 관람료를 걷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돈을 지불한다. 댄싱보이들이 물러나고 조금 지나자 중앙 분수대에서 효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동시에 계단 옆 소형 분수들도 물을 분출하여 그 위에 천연스레 앉아 있던 사람들이 기습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엉덩이 밑에서부터 물벼락 맞는 장면을 목격한 모두가 웃음을 숨기지 않고 깔깔 웃는다.
클래식, 세계적 팝송, 디즈니 OST 같이 어느 누구나 무난히 좋아하는 곡에 맞추어 분수가 춤을 추었다. 어둠이 하늘을 뒤덮자 분수의 조명이 진가를 발휘하고, 그 환상적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르렀다.
어느새 내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앉은 붉은빛 곱슬머리의 아기 천사가 자신의 뒤에서 허리를 붙잡아 주고 있는 할아버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사과 색 볼에 사파이어 눈을 한 아기를 몰래 사진 찍어 간직하고 나서, 난간에서 조심스레 내려왔다. 사그라져가는 분수의 물줄기를 아쉬워하고 있는 것보다 멀리서 계속되는 화려한 쇼를 뒤돌아보며 떠나고 싶어서, 그 특별하게 아름다운 물빛들과 빨리 이별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밤은 치솟는 분수처럼 고조되었다가, 카메라 렌즈에 희뿌옇게 잡힌 물방울 입자들처럼 쉽사리 가라앉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사방이 고요하고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만 있었다.
지금처럼 감정의 온도가 급격히 곤두박질치는 밤이면 그 부작용으로 불면이 일어났으나, 오늘은 잔꾀를 내어 괴로운 장거리 비행동안의 숙면을 염원해 본다. 창가에 테이블을 바짝 가져다 놓고 앉아서 냉장고 안에 숙제로 남겨뒀던 맥주 한 병을 꺼내 홀짝홀짝 마신다.
그러나 얕잡아봤던 맥주 한 병은 이겨낼 수 없는 졸음을 불러왔고, 커튼이 처지지 않은 창을 통과하여 달빛이 침범해 오는 침대 위에 쓰러져 깊은 단잠에 빠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