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먼저 성민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빠짐없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가는데, 어떤 궂은일에서조차 다른 이에게 좀처럼 선두자리를 내주지 않던 은혜가 평소와 다르게 당황한 모습으로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둘만이 남은 거실에서 나는 은혜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은혜선생님, 괜찮으세요? 안 좋은 일일까요?”
“나도 모르지. 큰 소리에 좀 놀랐을 뿐. 우리도 가볼까?”
은혜는 불안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순식간에 호흡이 가빠져서 손부채질을 하는 동시에 여러 번 숨을 크게 들이내 쉰다.
응접실 문을 열자 찬 공기가 피부에 닿는다.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열려있어 갓 겨울로 들어선 계절의 무례한 입김이 실내까지 이른 것이다. 문밖에는 일렬로 서서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들이 동상처럼 우뚝 자리에 멈춰서 있다.
정적에 싸인 부동의 사람들에게선 불길함이 새어 나오고, 삽으로 모래를 파내는 소리가 선두무리의 앞쪽에서 들려온다. 걸음이 빨라진 은혜를 따라 나도 발을 움직인다. 우뚝 선 채로 굳어진 사람들 너머로 늘 정원 한 편에 세워져 있던 삽이 자리를 옮겨 상림의 손에 들려져 있음이 보인다.
삽으로 흙을 파내 마른 연못을 메우는 상림은 내가 있는 자리까진 미치지 않는 어떤 말을 연신 내뱉는다. 은혜가 저벅저벅 상림에게 다가가지만, 나는 물론이고 다른 누구도 감히 은혜를 뒤따르진 못한다. 연못의 한가운데에는 근육질의 성인남자가 웅크린 형상을 떠오르게 하는 거대한 돌이 땅을 짓누르고 있었다.
“선배, 뭐 하는 거야?” 은혜가 묻는다.
“이 구덩이가 수연이를 삼켰으니까, 내가 복수해 주는 중이다.” 상림의 낮은 음성이 조용한 정원을 덮었다.
건물 뒤쪽으로 숨어 들어온 독립적인 작은 정원은 어린 왕자가 사는 B-612 행성처럼 고독한 세계가 되었고, 상림은 권위적이나 우스꽝스러운 임금의 역을 맡았다.
“우리가 도와줄까? 아님 그만할래?” 은혜가 자폐증상을 보이는 유아를 치료하는 유능한 심리전문가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상림에게 그의 의사를 묻는다.
상림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더니 삽에 몸을 의지하고 흐느끼기 시작하여서, 은혜를 제외한 우리는 그 자리를 피해 다시 거실 식탁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담배를 꺼내 물고 연기를 내뿜는다.
6줄의 회색 연기가 향연처럼 하늘로 스멀스멀 올라간다.
“상상치도 못한 기분 나쁜 경험이야.” 성민이 우리들 중 처음으로 감상을 털어놓는다.
“응. 떠올리기도 싫어. 대미술가가 어둠 속에서 삽질하는 그런 광경.” 선영이 공감한다.
“왜? 난 재밌던데. 그 의외의 광경이.” 지연이 건방진 표정으로 둘과 상반된 의견을 낸다.
“허세 떨지 마세요. 형, 겁먹은 거 다 보였거든요. 그 버릇 진짜 별로더라.” 하원이 불쾌한 의사를 밝히며 지연을 질책한다.
손아래 사람의 지적에도 지연은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하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지. 하원이 너, 더군다나 침체된 분위기 더 험악하게 만들지 마. 뭐,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대선배님이 망가지는 모습은 다시 보기 싫은 충격이지만.” 영수가 양 눈썹 사이를 좁히며 재난을 겪은 난민 같은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미친 남자.” 로난의 한마디에 나머지 사람들은 한숨 같은 담배연기를 동시에 내뱉었다.
“근데 그만한 바위를 한 사람 힘으로 옮길 수 있어?” 성민이 담배를 든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의문을 제기한다.
“정력가로 소문까지 났을 정도니까, 가능하지 않았을까? 온 힘을 다해 밀어서 옮겼다면 안 될 것도 없지. 술기운까지 합해서.” 선영이 두 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맞아요. 힘 좋은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힘이 대단해요. 장발장처럼.” 하원이 선영의 행동에 반대로 담배를 비벼 끄면서도 선영의 말은 두둔한다.
“그런가? 그랬다면……. 존경할만하네.” 성민이 감탄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어조로 차분히 말한다.
소파에 둘러앉은 여섯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동안, 나는 그들의 대화를 곱씹으며 상황 분석에 바쁘다.
지연이 언뜻 운을 떼었던 연못에서 일어난 ‘안 좋은 일’이 오늘의 소동을 야기했음이 분명하다. 자매 간의 다툼으로 마무리된 얼마 전의 제사 때에, 모리의 두 번째 이모님이 언급한 ‘살해’가 연못에 의한 죽음을 의미하는 걸까? 그렇게 되면 이상하다. 연못이 모리의 어머니를 삼킨 거라면 살해가 아닌 사고라는 표현이 맞다. 그 죽음에 어떤 인위적 개입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가?
음울한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가 그치니, 플라타너스나무에서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거리를 덮었다. 물기 머금은 갈색의 커다란 낙엽이 거대한 괴물 새의 발자국 같다.
“요즘 비가 자주 오는 거 같지 않아? 이맘때 원래 비가 이렇게 잦은 건가?” 지연이 턱을 괴고 창밖을 응시한 채로 말했다.
“비가 오면 급격히 온도가 떨어지니까, 본격적인 겨울이 되려고 그러나 본데요?” 나는 지연의 옆자리에 앉아서 그의 오른쪽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지도를 따라 동네 산책의 최적 코스를 돌고 있는데, 반환점 정도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오늘은 우연히 창가 테이블 자리에 앉아있는 지연을 발견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을 주체 못 하고 카페 안으로 난입하여, 허락 없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연은 스쿠터를 타고 목적지 없이 떠돌다가 내가 사는 동네까지 다다라서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담배를 입에 물고 화이트 클래식 스쿠터에 몸을 실은 멍한 눈의 그가 거리를 위태롭게 달리는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의 몸 가까이에서 코를 킁킁거리니 술과 담배가 섞인 고약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오늘은 몇 시까지 마셨어요?” 나는 복장단정을 중요시하는 학생주임처럼 그를 추궁했다.
“열 시까지 마시다가 열 시에 나왔어.” 그는 눈을 반만 뜨고 창밖 어느 한 곳에 초점 풀어놓은 채로 반성의 기색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나의 왼쪽 손목을 바라보니 열한 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너무 위험하다.’, ‘술도 마시고, 잠도 안 잔 상태에서 사고 나기 십상이다.’ 하고 설교를 늘어놓다가 그의 입에서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 시점에서 그의 생활 태도 개화를 포기해 버렸다.
“안나는 태어난 계절이 언제야?” 침묵하는 나에게 지연이 물어왔다.
“겨울이에요.” 나의 생일은 며칠 뒤로다가온 12월로, 사방에서 감지되는 연말의 들썩이는 진동과 언제나 함께였다.
“그래? 겨울이라니 의외네. 따뜻한 느낌인데.” 이제야 그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졸음 담긴 눈을 가까스로 제대로 뜬다.
“응. 엄마가 겨울에 태어난 아이는 따뜻한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 때문일지도.”
“아, 따뜻한 이름을 가진 따뜻한 안나구나.”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끝을 하품으로 잇는다.
“힘들면 우리 집에서 한숨 자고 가요. 아직 술도 안 깨서 운전하기 무리니까.”
축 처진 어깨에 고개를 푹 숙인 지연의 등에 쌀 한가마 무게의 피로가 얹혀있었다. 그 무게감이 안쓰럽다기보다 한심해서 늘어진 그와 그의 피로를 집에 들여놓을 생각일 쉽게 들었다.
“응. 고마워. 나 너무 졸리네.”
용케도 나의 집까지 무사히 걸어온 그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쓰러져 바로 코를 골았다. ‘이렇게 순식간에 잠이 드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그의 점퍼를 벗겨 옷걸이에 걸어두고 그가 내는 요란한 소리를 피해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아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모리는 잠자기가 스트레스인 사람이었다. 모리와 나는 나란히 새벽까지 뒤척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잠들었는데, 나보다 모리가 일찍 잠드는 날 아침에 그는 나에게서 “어제 나 배신하고 쿨쿨 잘 자던데?”라는 어처구니없는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 모리는 “내가 그랬어? 미안.” 하고 싫은 소리 하나 않고 사과했다.
그의 목에서 나오는 미안이라는 말은 내 체질에 잘 맞아서 몸속 깊숙이부터 내성이 생긴 수면유도체처럼 들으면 들을수록 그 효과가 미미해져 갔지만, 확실히 나를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