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구미의 산업 중심지에 위치한 금오산1)은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이자 경북 8경 중 4경에 속하는 명소이다. 1970년 6월 1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구미 지역에 큰 이익을 준다는 대혜 폭포,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2)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도선굴, 그리고 보물 제490호로 지정된 5.5미터 높이의 마애보살 입상, 의상대사3)가 창건한 약사암 등 다양한 볼거리로 유명하다. '금오산'이라는 이름은 황금빛 까마귀가 선형물 속으로 날아드는 모습을 본 아도 스님이 태양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오늘은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기암괴석이 많아 볼거리가 풍부하며, 등산로 주변에는 유명한 유적지가 많아 산악인들에게 사랑받는 명산인 금오산을 충덕, 종원이와 함께 산행했다. 오늘 금오산에는 빨간색, 노란색 단풍잎으로 곱게 단장한 가을과 앙상한 가지에 세찬 바람이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하는 겨울이 있었다.
잔뜩 흐린 날씨 속의 오늘의 등산 코스는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금오산성, 해운사, 도선굴, 대혜폭포, 할딱 고개, 오형돌탑, 마애여래입상, 약사암을 거쳐 현월봉에서 원점으로 돌아오는 9.5킬로미터 거리의 5시간 30분 코스였다.
금오산 관광안내도
금오산 산행 기록
주차장에서 출발해 대혜교를 건너면서 양쪽으로 서 있는 주황색 옷을 입은 메타스퀘어 가로수를 따라 걸으며 탐방안내소를 지났다. 탐방안내소 위에 있는 조형물은 금오산 정상을 바라보는 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한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금오산
메타스퀘어 가로수 길
구미시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기원하며 21개의 돌탑을 세웠다고 한다.
21세기 돌탑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이블카 매표소 근처에 도착했다. 케이블카매표소에서 대혜폭포까지는 1.2킬로미터이며, 걸어서 약 40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정상까지는 3.3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금오산 케이블카 매표소에서 대혜폭포까지는 경사가 완만하고 나무 계단이 잘 조성되어 있어 어린 아기도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길이었다.
대혜폭포 가는 길
금오산성 주변은 곱게 물든 단풍으로 둘러싸여 있어 대혜문의 전체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완만한 돌계단을 올라서 천장의 청룡 두 마리를 바라보고 대혜문을 통과해 금오산성을 걸었다. 금오산성은 금오산 정상부에 쌓은 외성과 계곡을 둘러싼 돌로 쌓은 이중의 산성이었다. 고려 후기에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으며, 외성의 길이는 3.7킬로미터, 내성은 2.7킬로미터였다.
대혜문
대혜문
영흥정은 지하 약 170미터의 암반층에서 솟아나는 맑고 신선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물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영흥정 앞 안내판에서 정상까지는 2.3킬로미터가 남아 있으며, 좌측으로 가면 정상에 도달하고 우측 계단은 해운사 방향이었다. 해운사의 담벼락에는 나옹화상의 '청산가'가 적혀 있었다.
영흥정
영흥정 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해운사는 신라 말기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며, 창건 당시에는 대혈사라고 불렸다. 고려 말기 길재 선생이 해운사와 도선굴에서 은거하며 도학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폐사된 이후, 1925년에 복원되었으며, 복원 당시 해운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후 다시 해운사로 변경되었다.
빨갛고 노란 단풍 나무가 가득한 해운사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다.
해운사 계단
해운사
해운사
해운사 앞에 위치한 계단을 통해 정상과 도선굴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 길에서 직진하면 대혜폭포와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우회전하여 도선굴로 향했다. 도선굴로 가는 길은 천길 낭떠러지 절벽에 설치된 철근 기둥과 쇠사슬 안전시설 덕분에 안전했지만 안전시설 아래는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절벽길을 오르면서 멀리 금오산 입구가 보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도선굴 계단
도선굴에서 바라본 전경
도선굴은 자연 암벽에 형성된 큰 굴로 원래는 대혈이라 불렸다. 하지만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도선굴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길재 선생이 이곳과 해운사를 오가면서 도학을 공부했다고도 한다. 도선굴의 폭은 7.5미터, 높이는 4.5미터에 달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굴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절벽 구간을 칡넝쿨을 이용해 올라와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류폭포
도선굴에서 내려와서 약 200미터를 걸어 대혜폭포에 도착했다. 이 폭포는 해발 400미터, 높이 27미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금오산 전체를 울리는 듯한 웅장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명금폭포'라고도 불린다. 폭포 아래에는 선녀들이 물보라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는 전설이 깃든 '욕담'이 자리하고 있었다. 폭포라는 이름에는 걸맞은 물줄기였지만 오늘은 금오산 전체를 울릴 만큼의 물줄기는 되지 못했다.
대혜폭포
금오산 등산 코스 중 가장 숨이 막히는 지점인 할딱 고개 입구에서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었고, 정상까지는 2.1킬로미터가 남아있었다. 할딱 고개를 오르기 위해서는 576개의 가파른 데크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할딱 고개 전망대에서는 멀리 금오산 저수지와 주차장이 내려다 보였다. 데크 계단이 끝나고 나서 다시 돌길이 이어졌다. 금오산 정상이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할딱고개 계단
할딱 고개 계단
할딱 고개를 지나면서 가파른 등산로가 계속되었고 이 코스는 결코 쉽지 않았다. 정상까지 1.3킬로미터가 남은 지점부터 경사가 훨씬 더 가팔라졌다. 이쯤에서부터 금오산은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 변화를 하여 매서운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고몸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할딱 고개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선굴
성안과 마애석불 사이의 정상 분기점에 도달했다. 여기서 오형돌탑과 약사암 방향으로 나아갔다.너덜바위길을 거쳐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길을 걸어서 오형돌탑에 도착했다.
오형돌탑
오형돌탑은 절벽 위에 세워진 정교한 돌탑이었다. 오형돌탑은 금오산의 '오'와 돌탑을 쌓은 사람의 손자인 형석의 '형'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 돌탑은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난 손자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할아버지가 10년에 걸쳐 법성사 방향 계곡에서 돌을 운반해 쌓은 것이라 한다. 한겨울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바람이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했다. 찬 바람을 뚫고 오형돌탑 인증 사진을 남긴 후, 쌍용문을 지나서 다음 목적지인 마애석불여래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애석불여래입상은 높이가 5.5미터이며, 자연석벽의 모서리 부근에 좌우로 나뉘어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바깥쪽으로 향한 손바닥은 여원의 자세로 중생들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490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마애석불입상
금오산의 마애석불에서 약사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194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경사는 가파르고 험난하여 도전적인 등산 경험을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우측의 화장실을 지나 약사암에 도달했는데, 이곳의 범종각 흔들 다리는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약사전
약사암
약사암 범종각
약사암은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약사봉의 봉우리 아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장엄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약사암 한편에서는 방문객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를 제공하고 있었다. 한 잔의 따듯한 커피는 찬바람이 부는 차가운 날씨에 언 몸을 녹이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에 충분하였다. '동국제일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약사암 일주문은 멋진 사진 촬영 장소가 되었다.
동국제일문
현월봉은 금오산 정상 부근에 달이 걸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금오산 정상 바로 아래 정상석은 예전 미군 부대가 주둔했을 때의 정상석이고 이곳에서 10미터 위에 실제 정상석이 있었다.
현월봉 옛 정상석
현월봉 현재 정상석
현월봉은 약사봉 아래로 깎아지른 절벽과 약사암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였지만 소백산의 똥바람에 비견될 만큼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세찬 바람과 추위 때문에 정상에서 오래 머물면서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없었고 결국 빠르게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정상에서 삼거리까지 내려온 후, 좌측으로 헬기장을 지나 원점으로 회귀하여 맛있는 고등어조림으로 하산식을 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현월봉에서 바라본 약사암 [출처] 경북여행찬스
1) 금오산: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중국의 오악 중 중악 숭산(崇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금오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삼국시대의 승려 아도(阿道)가 저녁 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지은 것에 유래한다.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일컬어졌다.
인동 방면에서 금오산을 보면 능선이 흡사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워있는 부처에 빗대 금오산 와불(臥佛)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기 도선대사도 금오산의 와불을 보고서 장차 왕(王)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무학(無學)대사도 이 산을 보고 왕기가 서렸다고 하였다.
예부터 경북 8경으로도 손꼽힌 산으로 기암절벽과 울창한 산림이 조화되어 경관이 수려하다. 산세가 특이한 편인데 정상 인근에 고원 분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해발 800m 지점에 '성안마을'이라는 촌락이 형성되어 심지어 해방을 전후해서 10여 가구가 살았다 한다. 반면 분지 아래 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산세가 가파르다.
가장 높은 봉은 현월봉으로 정상에 오르면 북동쪽으로 구미시내, 낙동강이 보이며 동쪽으로 구미국가산업단지가 내려다 보인다. 정상 부근에 길이 2km의 금오산성이 있고 암벽 밑으로 벼랑 끝에 지지대를 세워 만든 약사암이라는 사찰이 있다.
북쪽 계곡의 중턱에는 도선굴이 있고 북서쪽의 거대한 암벽에는 보물 제490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해발 400m 지점에는 높이 27m 대혜폭포(일명 명금폭포)가 있어 시원하게 물이 떨어진다. 옛날에는 이 고장의 관개에 있어서 유일한 수자원이었다고 한다.
북쪽 기슭에는 고려의 삼은 중의 1명인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고자 조선영조 때 지었다는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채미'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길재 선생이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은나라의 충신 백이 숙제 형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외에도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 석조 석가여래 좌상(보물 제245호) 또한 금오산에 있다.
마애보살 입상의 근처에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왔던, 한 할아버지가 죽은 손자를 위해 만든 돌탑들과 돌조형물들이 있다.
구미시내에서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입구로부터 산 중턱의 해운사 옆까지 가는 케이블카가 있다. 2022년 3월 대인 기준으로, 대인 기준 편도 6,000원, 왕복 10,000원인데 5분 남짓한 탑승시간을 생각하면 좀 비싸다.
불과 11년만 운영되다 사라져버린 금오산역이 근처에 있었다. 답사를 하고 싶다면 구미시 쪽으로 가지 말고 산 뒷편 칠곡군-김천시 경계 지점(부상고개)으로 가면 된다.
구미시의 대표적인 진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데 크게 등산로가 4곳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가장 대표적인 등산로로 주차장, 금오랜드, 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해운사 방면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2번째는 법성사에서 올라가는 등산로, 3번째는 북삼고등학교에서 올라가는 등산로, 4번째는 지경마을에서 올라가는 등산로이다. 차량으로 금오산 주차장으로 들어올려면 2갈래 길이 있는데 하나는 경북외국어고등학교 쪽으로 들어오는게 정석이고 아니면 형곡중학교 뒷길로 들어올 수도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하루 8회 운행하는 27번 버스가 전부다. 한편, 김천과 칠곡의 경계에 있는 지경마을로 갈 경우 구미 11-1번, 162, 162-1번, 김천 13-7, 113-7번, 김천 13-8, 113-8번, 김천 13-9, 113-9번을 이용할 수 있다. 이 중 13-9, 113-9와 11-1번은 왜관까지 가므로 참고하길 바란다.
원래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에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주한미군 통신기지가 있었기 때문에 헬기장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1953년 한·미행정협정(SOFA)에 따라 미군 통신기지(22,585㎡)가 들어서면서 일반 시민의 출입이 통제돼 왔으며 구미시는 금오산 정상의 출입을 풀기 위해 10차례에 걸친 미군과의 협상을 통해 2011년 정상을 포함한 부지 5,666㎡를 돌려받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구미시는 2014년 3월부터 11억 원을 들여 미군이 설치한 통신기지 시설물 중 사용하지 않는 건물들을 철거한 뒤 산 정상에 1.5m 높이 새 표지석을 세우고 주변 등산로 정비도 마쳤다. 그리고 10월 말부터 개방되어 61년 만에 금오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2)도선국사: 속성은 김씨(金氏). 태종무열왕의 서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에 대한 자료는 고려 태조의 〈훈요10조 訓要十條〉와 1150년(의종 4) 최유청(崔惟淸)이 편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 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竝序〉 등 10여 편이 있는데, 최유청의 자료인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그 내용만이 〈동문선 東文選〉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841년(문성왕 3) 15세 때 월유산 화엄사에서 불경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대의를 통달하고 법문을 깊이 깨달았다. 846년 화엄종의 관념적·현학적 성격의 한계를 인식하고 선종으로 개종했다. 이때 당(唐)의 서당 지장의 가르침을 받고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 자리잡아 동리산파를 개창한 혜철의 문하에서 선을 수업했다. 23세 때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운봉산·태백산 등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수련을 했다. 당시 선승들은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수련하다가 후원자를 만나거나 인연있는 곳에 자리잡아 선문을 개창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그도 37세에 광양 백계산 옥룡사에 자리잡았다. 죽을 때까지 35년간 제자들을 키웠는데 그 수가 언제나 수백에 이르렀다 한다.
898년(효공왕 2)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이 요공선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징성혜등이라는 탑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념했다. 이러한 선승으로서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도선이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왕건이 얼마나 도선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는가는 〈훈요10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제2조에서 도선이 정한 곳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지 말 것, 제5조에서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므로 서경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 제8조에서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슬리므로 그 지방사람은 등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부분이 풍수지리설과 관련되어 있다. 태조에 의해 고려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로 등장한 도선은 이후 역대왕들에게 주목되면서 고려 현종 때 대선사, 숙종 때 왕사, 인종 때 선각국사로 추증되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배우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에 유학가서 밀교 승려이며 중국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꼽히는 일행에게서 전수받았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옥룡사에 자리잡기 전 지리산 구령에 머물 때 이인을 만나 구례현의 경계인 남해변에서 전수받았다는 설이다. 그런데 첫번째 설은 일행이 당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은 당 말기에 생존한 인물이기 때문에 연대상 모순이 있어 신빙성이 없다. 저서로 전해지는 것은 〈도선비기 道詵秘記〉·〈송악명당기 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 등이 있다.
[출처] 다음백과
3) 의상대사: 해동(海東)의 화엄초조(華嚴初祖)라고도 한다.
문헌에 따라 '義相'·'義想' 등으로도 표기되고 보통 '義湘'으로 통용되지만, 의상의 법손(法孫)들은 거의가 '義相'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의 저술에도 '義相'으로 표기된 것이 많다.
의상의 전기(傳記)를 싣고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송고승전〉·〈백화도량발원문약해〉 등인데 그 내용에 많은 차이가 있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속성은 김씨(金氏) 또는 박씨(朴氏)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어려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8세 위인 원효(元曉)를 만나 친교를 맺고 그와 함께 고구려 보덕(普德) 화상에게 〈열반경 涅槃經〉을 배우기도 했다. 650년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던 길에 요동(遼東) 변방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잡혀 있다가 겨우 빠져 나왔다. 육로를 통한 첫번째 입당의 시도는 실패하고, 661년 다시 원효와 함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가던 중 원효는 한 고분에서 깨친 바가 있어 발길을 돌리고 의상 혼자만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했다.
의상은 양주(揚州)에 이르러 그곳의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을 만나 관아에 머물면서 성대한 대접을 받고, 다음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당시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서 새로운 화엄학풍을 일으켜 문하에 법장(法藏) 등의 제자를 두고 있었다. 지엄은 특별한 예(禮)로써 의상을 맞이하며 전날 꿈에 그가 올 징조를 보았다며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후 의상은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더욱 새로운 이치를 탐구하여 깊은 것을 끌어내고 숨은 뜻을 찾아내어 나중에는 스승을 능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에 머물면서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인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했으며, 동문수학한 19세 연하의 법장과도 각별한 교분을 맺었다.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 화엄종의 제3조로서 중국 화엄종을 교리적으로 완성했던 인물로 항상 의상의 학식과 덕망을 흠모했다. 법장은 의상이 귀국한 후에도 그를 극찬하는 서신과 함께 자신의 저서 7부 29권을 신라 승려 승전(勝詮) 편으로 의상에게 보내어 상세히 검토하고 부족한 점을 깨우쳐주기를 청하기도 했다.
의상은 668년 지엄이 입적하기 3개월 전에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스승의 인가를 받고 670년 귀국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귀국 동기는 당 고종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신라로 돌아온 후 적극적인 교화활동을 펼쳤다.
귀국 직후 낙산사(洛山寺)에서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어 관세음보살에 기도하고 그를 친견(親見)했다고 한다(〈백화도량발원문〉). 그후 전국을 유람하다가 676년 태백산에 화엄의 근본도량이 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것을 비롯해 많은 사찰을 세우고 각처에서 교화활동을 폈다. 원효가 저술에 힘쓰고 개인적인 교화활동을 편 데 반해, 의상은 교단 조직에 의한 교화와 제자들의 교육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의상은 부석사에서 40일간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문답하고,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 태백산 대로방(大盧房)에서 행경십불(行境十佛),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간 〈화엄경 華嚴經〉 등을 강의했는데, 추동에서 강의할 때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운집했다고 한다.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난 1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으로 당시 아성(亞聖)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고 한다.
그외에 범체(梵體)·도신(道身)·신림(神琳)·법융(法融)·진수(眞秀) 등도 의상의 법계(法系)에서 나온 훌륭한 제자들이다. 이처럼 제자들을 육성하고 사찰을 건립하는 등 실천수행을 통하여 화엄의 선양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