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떠나고 한동안 휴대폰을 해지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는데 두어 달쯤 지나면서 더 이상은 엄마의 명의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의 핸드폰을 해지할 마음이 아직까지는 없어서 명의를 내 이름으로 옮겼다.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폰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으려나...
명의를 옮기고 나니 이 세상에서의 엄마의 흔적이 또 하나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핸드폰으로 엄마의 실명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엄마의 다른 인터넷 계정들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없어진 셈이었다. 돌아가시고 두 달이 좀 넘은 시점이었지만, 모두 얼른 잊으라 종용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습관도 기억도.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엄마와 친했던 박 선생님이 두 명만 남은 단톡방에 남긴 문자가 계속 내 마음에 남았다. '경우회'란 과거 아빠가 근무하던 경찰서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과 배우자들의 모임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앨범을 보면 198,90년대에 읍내에서, 혹은 근교의 뒷산이나 놀이동산, 무령왕릉 같은 데서 단체사진을 찍은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나이 50을 넘어가면서 아빠처럼 일찌감치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사람도 있었고, 뺑소니 사고를 내고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었으며, 급작스러운 암 발병으로 40여 일만에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은퇴 후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모임과 공간으로 흩어졌는데, 정작 아빠와 경찰서 동료들 간에는 연락이 뜸해진 반면 엄마는 그들의 배우자였던 동현 엄마, 박 선생님, 민호 엄마 네 명과 이십수 년 간 친분을 유지하다, 얌체 같은 행동을 연발하여 미움을 산 민호 엄마가 은연중 배제된 가운데 세 사람이 종종 모임을 가졌던 것 같다. 박 선생님은 몇년 전 남편과 오빠를 거의 비슷한 시일에 암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고, 오랜 애도의 기간을 가졌다.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었던 박 선생님은 그 시절에도 자신과 남편이 떠난 여행 얘기를 즐겨 들려줬었는데, 이후에도 부부끼리 해외 여행이나 등산 등등 여러 곳을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다. 엄마는 종종 박 선생님의 '애도'가 지나치게 길다며 언짢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시일이 지나 박 선생님은 취미생활을 찾았고 엄마와 동현 엄마를 차에 태우고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곤 했다. 엄마의 투병이 시작된 후로는 픽업을 하러 집까지 찾아오기도 했고, 엄마의 컨디션을 살펴가며 약속 시간이나 장소를 잡고는 했다.
2021년 식목일- 엄마는 두 사람과 함께 여주의 벚꽃축제에 갔다. 투병한 지 3년이 넘는 기간, 지치고 힘든 모습만 지켜본 가족들은 엄마를 데리고 어딘가 갈 엄두도 내지 않던 상황인데, 꼬박꼬박 상황 봐 가며 안부를 묻던 아주머니들에게 엄마는 기꺼이 함께 드라이브를 갈 생각을 했고 이날 엄마는 '너무 고마워서 콧잔등이 시큰거리고 눈에 이슬이 맺혔다'며, 이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 했다.
엄마 생전에 엄마는 누나의 이름을 붙인 엄마가 공식 호칭이었지만, 단톡방에 남긴 마지막 인사에서 엄마보다 두 살 아래였던 박 선생님은 처음으로 언니라는 호칭을 썼다. 엄마 떠나고 3달이 아직 안 된 지금, 아직 두 분은 퇴장하지 않았지만(대화방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 것 같다. 엄마는 퇴장한 대화방에서 나가진 않아서 그 흔적이 남아있다) 언젠가는 이 대화방도 모두 퇴장하고 (이름없음)으로 남아있겠지. 하지만 박 선생님의 말은 계속 기억하고 싶다.
"잘가요 언니!! 아픔의 연속이었던 삶의 끈을 놓고 주님의 곁으로 떠나셨군요 이제 고통없는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세요 더 많이 만나 좋은곳 같이 가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자신의 고통을 감추고 해맑게 명랑함을 보여주시던 언니의 용기와 의지를 존경합니다.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인기척도 없이 조용하게 외출할 때 쓰던 모자와 외투를 벗어놓곤 했다. 일기장 속 엄마는 늘 외롭고 쓸쓸하게만 느껴져서 안타깝기만 했다. 식구들은 잘 몰랐을 엄마의 해맑은 명랑함은 어떤 것이었을까.
비록 배우자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지만 40여 년에 걸쳐 은근한 친분을 유지하며 거리낌 없이, 엄마 특유의 그 마음의 부담감 없이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엄마에게는 아주 잘 된 일이었으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