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시간

by 흘흘

모든 관계가 변이와 갱신을 거듭하며 오래 가면 좋겠지만, 어떤 관계는 시절이 다 하여 끝을 맺는다. 자연스럽게 뜸해지는 일도 많지만 한번에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사람이 사람을 떠나는 것에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이별은 끝끝내 이유를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한때 나는 이별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가 어느새 포기했다. 분명 그 관계가 더 이상 나한테 유효하지 않다고 느껴졌기에 그런 선택을 했겠지만, 결국은 제3자가 듣기에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들은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모든 것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다고 있고 그것을 찾아가려는 과정. 스스로가 납득가능한 존재로 이해되기를 바랐던. 내 자신이 납득 가능한 존재인가? 는 지금까지의 생에 걸쳐 늘 나를 힘들게 했던 문제였던 듯 싶다.

보통은 나 이래서 그 사람이랑 헤어졌어, 라고 얘기하며 다른 사람이 듣기에도 납득이 되는 이유들을 늘어놓지 않던가. 그러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 제3자가 이별의 양상을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그러나 감각으로만 그만해야겠다고 느꼈던 그 무언가를 제3자는 논리적으로 찾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와 너가 아닌 제3자의 발견이 딱히 중요하지는 않다.


나르시시스트의 예를 들어서 얘기해봐야겠다. 요즘에 sns나 블로그에서 정말 자주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나르시시스트를 구분하는 방법, 나르시시스트들이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혹시 나르시시즘을 나쁜 성격이나 일종의 병증과 혼동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든다. 성격 나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든 뭐든 그냥 누구나 다 싫어하는 사람일 뿐이고, 병은 자기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문제기에 때때로 치료가 필요한 영역이지만 (적어도 요즘에 나도는 류의) 나르시시즘은 병이 아니고, 자기 상태를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며, 어쩌면 그것을 자신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능력도 있는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는 남달리 견고한 논리와 믿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나르시시스트들은 그 구분법과 유형을 오히려 누구보다 유창하게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며 충고해줄 수 있을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나르시시스트를 구분하는 방법 같은 걸로 나르시시스트를 분별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장기적으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 문제도 있고) 당사자의 정신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후적으로 그런 해석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떤 관계가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런 논리나 언어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감각의 문제라고 느낀다. 지금 이 관계(상태)는 위험하다, 정도의 감각말이다. 그게 나르시시즘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뜨거운 냄비에 손을 짚었다 얼른 떼어내듯, 어떤 상황이 비등점에 이르러 이 이상 가면 안 된다고 직감하듯 그냥 그렇게 관계는 끝날 수 있다.

다만 그 감각이 무뎌졌을 때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허나 그 감각도 어떻게 벼릴 수 있는가도 저런 식으로 보편화된 언어로 쉽게 제시하기란 곤란하다. 자기 경험에 비추어 개개의 상황이 달라질 수 있고 관계 자체가 어느 정도는 상호 나르시시즘적인 성격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 시행착오이고, 어떤 경우는 관계의 생명력 자체가 시행착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우리는 서로를 끝까지 모를 것이며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당하며 서로를 침해하고 침해당할 것이다. 이런 측면을 용납하지 못하고 순결무해한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고 정작 그렇게 보이는 관계에 당사자들은 전혀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저런 기준에 해당하는 어떤 유형의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할 것 같다. 다만 이 경우에서의 나르시시즘도 일개인에 의해 독창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가 이것을 완성하는 것 같다. 관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에 의해 구축된 것이고, 한 관계 안에서 각각의 역할이 존재하며, 그 역할 중 하나가 나르시시스트의 영역이 되는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그렇기에 그 관계를 해제한다는 것은 그 관계의 질서와 논리로부터, 역할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나르시시즘이 아닌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로: 난 너 때문에 헤어지는거야, 라고 말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어떤 관계는 그렇게 말하기가 모호한데,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된 역할과 질서, 논리에 스스로가 길들여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미 타당한 언어를 찾기 어려워진 상태. 이 관계를 해제해야 할 '위험성'조차 감지하기가 무뎌진 상태. 나는 누구에게도 더 이상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고, 나 스스로도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중엔 물론 안정감의 문제도 있다. 관계는 일종의 관성이고 그 관성을 구성하는 안정감도 그만큼 두터워졌다. 안정감의 기반 위에서 스스로가 성장하고 성숙해졌으며, 좀더 단단한, 완성된 나인 것처럼 느껴질 때 헤어지기는 더더욱 어렵다. 물론 제3자가 보기엔 그 안정감 자체도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고 어떤 관계는 바로 끊어져야 한다고 믿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이 관계는 평생 갈 수밖에 없다, 헤어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는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많은 부분이 얽히고 설킨 경우 헤어짐은 쉽지 않지만(관련된 사회적 문제는 또 그것 자체의 해결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즉 헤어지기보다 유지하는 게 더 그럴싸하고 타당해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헤어짐은 이유없이, 느닷없이, 타당하지 않게 이루어지며 그럴 수 있다. 무뎌져 버린 감각도 믿을 수 없고 관성 속에서 논리에 길들여진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을 때, 오래된 관계의 논리와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역할을 취하지 않는 것, 던진 공을 더는 받아서 다시 던져주지 않는 것, 왜 저래야 하는데?에 대한 질시에 응하지 않고 떠나가는 것. 지금 이 순간 헤어짐의 핵심은 오히려 그 뒷감당, 앞으로 다가올 그것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겠다는 것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유는 하나다. 나는 이제 그 역할을 하기가 싫다. 나는 공을 다시 던지기가 싫다. 그냥 싫다. 그만하고 싶다. 탓도 돌리기 싫다. 네 잘못도 아니다.(이 관계를 끊기 위해 굳이 네가 악마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하지말자. 그냥 이제 하기 싫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 어떤 것보다 그저 이제 싫다는 그것만이 중요했고, 절실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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