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흘흘

혐기성 세균 보툴리누스균이 분비하는 독소 보툴리눔의 맹독성은 30나노그램(1나노그램은 10억분의1그램)만으로도 60kg의 성인에게 치명적인 근육마비를 유발하여 즉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하지만 그 독소를 희석시키면 피부를 팽팽하게 만드는 보톡스라는 의약품이 된다.

독이 가진 어떤 성질이 일정 수준 이하의 농도가 되었을 때 나름의 유익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문득 작가들의 작업을 떠올렸다. 모든 작가들은 자기만의 독을 품고 있다. 어쩌면 사람마다 제각기 어떤 연유인지 알게모르게 독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독은 독인지도 모른채 타인에게 발산하여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가령 스스로는 장난이라고 알고 있지만 타인에게는 치명적인 폭력이 되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후유증을 일으킬 수 있다. 자신은 너스레라고 떨었는데, 개인 혹은 집단으로부터는 불쾌감과 모욕을 유발하여 상대로부터 절교를 당하거나, 만인 앞에서 비웃음이나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다. 때로는 독이 스스로를 상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남은 물론 나를 해치는 독. 그저 독이라고만 생각하면 한없이 해롭기만 하고 위태롭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마음들, 어떤 성향들. 어떤 욕망들.

작가들의 작업은 바로 그 독을 다루는 일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독을 스스로의 과정 안에서 규명하는 일. 그 고유의 독을 다루는 일이란 말 그대로 해독의 과정일지도 모르지만 그 독을 그대로 다루는 일일 수도 있다. 즉 보툴리눔을 보톡스로 만들듯 그 독을 치명적 위해를 가하는 수준에서 나름의 독특한 효능이 있는 수준까지 희석시키는 일이다. 선을 지키지 못한 무분별함과 막말을 일삼는 이가 아예 안 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길들일 수도 있지만, 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 짜릿하고 흥분되는 재기로 만들 수 있다. 대개 눈길을 끄는 작업들은 대체로 작가 각자가 품은 독의 본질은 그대로 놓지 않은 채 위해가 될 듯 안 될 듯 아슬아슬한 수준정도로만 '희석'시킨 정도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왕이면 결과적으로는 정말 해가 되진 않는 그런 수준일 때 '무해함'에 대한 확신을 품은 채 친밀감마저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다소 미숙하게나마 약간 불쾌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할지라도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거쳐 스스로의 독을 다뤄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작품에도 감동을 받는다. 그들은 차마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단순히 자기통제나 검열의 의도가 아닌, 정말로 선한 마음에 이런 짓은 하면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의 과정에서 온 사람도 있다. 분별없이 불화하고 타인이나, 혹은 스스로에게 폭력이 되었을 수도 있는 어떤 무수한 행위들 끝에 '살아남은' 이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거쳐온 숱한 희석의 과정 속에서 한 자리에 만난 것이다. 많은 실험과 어쩌면 한없이 처절했을 시행착오의 과정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분투했을 것인지. 나 또한 내 자신의 '독'에 대해 늘 고통받아왔는지, 그 독에 어떻게 면역되어 왔는지, 아니 면역되지 못한 채 여전히 통증을 호소하지만 전보다는 내성이 생긴 스스로를 체감할 수 있기에 이렇게 무사히 이 자리에 함께 만난 다종다양한 '독'들을 보며 감동하고 황홀하게 혹은 불쾌하지만 짜릿하게 감응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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