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한 마리를 모두 넣은 듯한 야성의 순댓국 성찬.
조금씩 추위가 물러가기 시작한 어느 날, 좋은 순댓국이 먹고 싶어졌다.
노트북 폴더에서 노포 리스트를 열어보니 그동안 찾았던 순댓국집보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이 남았다. 열렬한 노포 순례자로서 겸허한 마음으로 반성하며 오늘 찾을 집을 리스트에서 골랐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순댓국집 중 오늘 찾을 곳을 고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울의 노포 중 점찍어 놓은 곳 몇 곳이 있었는데 그중 마침 순댓국 집이 있었던 것.
오늘 찾은 곳은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삼거리먼지막 순댓국'이다. 꽤 눈길을 끄는 이름의 가게다. 삼거리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먼지막'이라니. 서둘러 검색을 해보니 '먼지막'은 원래 영등포 일원이 과수원이 있었던 곳이라 원지막이라 불렀는데 그 말이 와전되어 '먼지막'이라고 부르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 먼지막 마을 삼거리에 있는 순댓국집이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인 듯하다.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영등포구 대림과 도림동 일대가 과수원이었다는 것이 한편으론 믿기지도 않는다.
삼거리먼지막 순댓국은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신도림역과도 멀고 대림역에서도 접근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위치. 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 신관 뒷골목에 있는데, 이 지역을 자주 찾지 않은 초빼이의 입장으로서는 찾아가기가 나름 어려웠던 곳이다. 1호선 신도림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 대림역에서 하차한 후 7호선 대림역 13번 출구로 나와 택시를 탔다. 때마침 친절한 택시 기사님이 가게 앞까지 들어가서 차를 세워주셔서 편하게 찾았다.
택시를 내리자마자 설렁탕 집 근처에서 맡을 수 있는 꼬리 한 냄새가 나를 기습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방심하다 당한 일격. 꽤 묵직하다. 조금 더 냄새를 맡아보니 설렁탕집 냄새가 아니라 아주 어릴 적 시골 장터에서 팔던 돼지국밥 냄새에 더 가까웠다.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초빼이가 이때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 장터의 국밥이 꽤 충격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함안군의 대산장은 좋은 쌀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던 5일장이었다. 그 대산장 입구에 허름한 천막을 치고 장작불 위로 가마솥을 걸어 놓은 채 끓여 팔던 국밥집이 있었는데 그 국밥이 꽤 저렴하고 양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찾았었다. 1천 원인가 1.5천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산장을 찾은 많은 어르신들이 쪼그리고 앉아 국밥 한 그릇 먹던 그런 곳이었다. 초빼이의 아버지도 시장하다며 어머니와 함께 그 집으로 가 국밥을 주문했다. 김치 한 접시에 국밥 세 그릇. 국밥을 먹으려 수저를 들던 찰나, 국물 위로 드러난 돼지비계 위로 무성하게 솟아올랐던 돼지털에 기겁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골목 가득한 순댓국 냄새에서 어릴 적 강렬했던 기억이 떠 오르며 조금 두려워졌다. 솔직히 순댓국집 입구에서 잠깐 망설였다. '오늘의 노포는 쉽지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세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는 일도 없고 마음대로 되는 일도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항상 마음에 드는 일만 할 수 없다는 것도 오십 년을 넘는 시간을 살아오며 알게 된 하나의 깨달음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순댓국집의 문을 열었다. 음식점의 문을 여는 별것 아닌 것 같은 행위가 이렇게 무게감 있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골목의 그 꼬리 한 냄새는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순댓국 냄새의 십 분의 일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온몸을 덮쳐오는 진한 순댓국 향에 잠시 정신을 놓을 뻔했다. 정말 진하게 우려낸 순댓국물의 향이 정말 강력하게 느껴졌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점심 겸 반주를 들고 있었다. 예상대로 손님들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오래된 순댓국집의 '내공'이 가게 입구에 한 발 들이는 순간 느껴졌다. 종업원에게 혼자 왔다고 하니 홀로 식사를 하던 다른 분과 합석을 시킨다. "실례합니다"라고 먼저 자리한 분께 양해를 구하고 외투를 벗었다. "사장님 국밥 하나랑 '소'자 하나 주세요", "아 그리고 소주 하나요" 오늘의 험난한 일정이 시작되었다.
주문하고 잠시 있으니 '소(모둠순대)'가 먼저 나온다. 조금 잘지만 상태가 나쁘지 않은 새우젓과 매운 고추, 간 마늘도 함께 테이블에 올려졌다. 오소리감투와 머리 고기, 순대, 돈설 그리고 간이 담긴 모둠순대는 이 집에선 이름이 없다. 그냥 '대, 중, 소'이다. 아주 오래전 주어를 생략한 누군가의 말을 연상시키듯(?), 음식명이 없었다. 음식의 양을 지칭하는 말이 음식의 이름이 되었다. 얼마나 바빴으면 '모둠순대 또는 순대모둠'이라는 음식명까지 생략할 정도일까라는 생각이 들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좋아하는 오소리감투를 먼저 집었다. 된장을 살짝 덜어 오소리감투에 올려 입에 넣었다. 설겅설겅한 식감이 역시 상태가 좋다. 당면으로 채운 순대도 너무 많이 삶아지지 않고 딱 적당하다. 껍데기가 붙어 있는 머리 고기는 상태가 너무 좋았다. 게다가 어지간한 순댓국집에서는 만나기 힘든 '돈설' 몇 조각에 감동은 더욱 커졌다. 우설과는 조금 다른 식감이었지만 쉽게 만나기 힘든 부위라 새로운 경험의 기회이기도 했다. 식감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간은 접시 한쪽으로 쓱 밀어 놓는다. 1만 원짜리 작은 접시 하나로도 충분히 소주 한 병은 마실 수 있을 정도다. 차갑게 식혀 나와 우려했던 잡내조차 맡을 수 없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윽고 국밥이 테이블에 오른다. 앞자리의 손님이 조금 게걸스럽게 먹는 양반이라 눈에 조금 거슬렸지만 먼저 자리를 잡은 분이니 어차피 복골복. 순댓국의 향에서 초빼이는 먼저 압도당했다. 그 어릴 적 돼지국밥처럼 강력한 향이 화산처럼 피어오르는데 굉장히 진한 국물의 향이 인상적이었다. 간 마늘을 주는 것은 아마 이 야성적인 향을 마늘향으로 중화시키라는 의미인 듯했다. 간 마늘을 모두 넣어 휘저으니 그제야 야성의 향이 조금 진정된다.
국물의 향보다 더욱 압도적이었던 것은 순댓국에 들어있는 내용물의 양. 수저를 뚝배기에 넣어 들어 올리니 수저 위로 올라오는 부위도 굉장히 다양하고 보통 순댓국의 두 배가 넘을 것 같은 압도적인 양에 또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다. 보통의 순댓국에는 잘 넣지 않는 간과 허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머리 고기와 탄탄한 뽈살도 들어 있다. 게다가 인상적인 것은 돼지 곱창과 새끼보 부위도 소량이지만 들어 있었던 것. 순댓국을 먹으러 왔는데 돼지 한 마리의 모든 부위가 들어있는 돼지 국밥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에 다시 한번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머리 고기의 껍데기에 여전히 듬성듬성 붙어 있던 돼지털의 존재. 돼지털은 아직 조금 어렵다. 어릴 적 기억이 자연스레 떠 오르며 조금 주춤거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를 이제야 극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급하게 들이켜는 소주잔에 위험신호가 울렸다. 저녁때 만나게 될 분들은 엄청난 초빼이들이라 자제가 필요했는데 도저히 이런 음식을 앞에 두고 진정할 수가 없었다. "케세라세라(Que Sera, Sera)".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눈길을 돌린다. 순댓국 국물이 사골육수처럼 뽀얗고 진하다. 이 뚝배기 한 그릇에 몸이 그냥 건강해질 것 같은 확신마저 든다. 마늘 때문인지 얌전해진 국물의 맛이 굉장히 풍성해졌다. 순댓국이 나온 그대로 먹다가 들깨가루와 다재기를 푼다. 이젠 새로운 국면이다. 전분을 잔뜩 머금은 국물에 매운맛까지 더해졌으니 끼닛거리에서 국물 안주로 정체를 바꿨다. 다시 "케세라세라(Que Sera, Sera),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젠 어떤 부위가 입안으로 들어가는지 의식하지 않은 채 소주와 국밥을 들이켠다. 이른 아침 서해안 낙도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한 여정에 허기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빈 속에 함께 마신 소주가 거침없이 흡수되며 온 세상이 나른해진다. 경직된 몸도 풀어지고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눈동자도 조금씩 그 힘을 덜어낸다. 골프 스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몸에 힘을 빼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아마도 지금 스윙을 하면 제대로 힘을 뺀 스윙이 가능할 것 같다. 정신은 또렷하나 근육은 조금 이완된 상태. 적절한 수준의 낮술을 하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하지만 과하게 하면 큰일 난다)
저 멀리 순댓국의 재료를 썰고 계시던 사장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리를 정리하며 사장님 모습과 주방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여쭸다. "아이고 뭐 이런 걸 찍으려고"라며 흔쾌히 허락해 주시며 다시 도마 위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바쁜 점심시간에 나와 행여 주문이 밀릴까 사장님이 직접 순댓국과 모둠 순대 재료를 다듬는 모습이 남다르다. 소매를 걷어 부치고 직접 일을 하신다는 것보다는 사장님이 직접 관리를 한다는 점이 또 하나의 인사이트가 된다.
매장 내부, 곳곳에 걸려있는 이전 자료들을 보니 이 또한 노포의 사료들이다.
많은 성공한 기업들이 어느 순간에 들어서면 기업의 연혁에 대한 백서들을 만드는데 그 과정이 참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업의 초창기 시절부터 미래를 위해 사료들을 모아 놓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 의외로 이 집에는 잘 보관된 자료들이 많다. 또한 그것들을 이미 매장 내부에 걸어놓고 노포임을 알려준다. 사장님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대림동 한 귀퉁이, 강남성심병원 인근 골목에 숨어있는 이 집은 1959년 개업한 집이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서울에서, 그리고 수도권에서 가장 오래된 순댓국집이기도 하다. 처음 개업하였을 때 냈던 음식에 큰 변화를 주지 않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이어왔다. 그러하기에 이 집 음식은 예전 순댓국의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의 무수한 순댓국집들이 시대의 변화에 음식맛을 조금씩 변형시키고 외형을 바꾸고 재료들을 가감하는 등 시대의 입맛에 맞게 변화를 줄 때, 이 집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려 했다. 서울식 옛날 순댓국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형태가 아닐지? 심지어 주방 안을 들여다보면 예전의 맛을 그대로 잇기 위해 아직도 무쇠 가마솥에 순댓국을 끓여 팔고 있다.
초빼이의 관점에서는 이 집의 음식은 젊은 층이나 성별에 따라 호불호는 갈릴 수 있을 듯하다. 너무나 원초적이고 마초적인 이 집 음식의 특징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 집의 음식이 가지는 거칠지만 원초적인 야성은 이 집만의 장점으로 바뀐다. 결정은 어떤 가치를 더 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를 것 같다.
하지만 꼭 한번 경험해 보시라 추천한다.
* 참고 : 오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조금 일찍 글을 올립니다. 올해 3번의 이사가 예정되어 있는데 그중
첫 번째 이사가 내일이라 이래저래 준비할 것들이 많네요. 7월과 10월에도 또 이사가 있어 올 한 해는 이사
만 하다가 다 보낼 것 같습니다.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메뉴추천]
1. 1인 이상 방문 시 : 순대국 + 소(수육) + 소주
2. 2인 이상 방문 시 : 순대국 + 중 또는 대(수육)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공간은 없다. 가게 앞 갓길에 주차가 가능하나 복잡하다.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실 것을
권해 드린다.
2. 수~월 08:00~19:30 / 정기휴무 화요
3. 참고
- 식사시간엔 꽤 오래 기다릴 수 있다.
- 꽤 진한 순댓국이 매력적. 다양한 순댓국의 재료가 이색적이다. 국밥은 토렴식, 따로를 주문하면 밥과
순댓국을 따로 받을 수 있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고추는 조심할 것. 정말 맵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동해반점, 삼우치킨센타, 제주도초밥, 바지락손칼국수, 이가네돼지국밥순대국, 초원양꼬치,
은진포차 등
- 2차는 대림역 인근 차이나타운 거리를 추천한다. 양꼬치부터 마라탕까지 제대로 된 중국 음식을 다양
하게 만날 수 있다.
- 인근 문래창작촌도 돌아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