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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빼이의 노포 일기[충북 청주시 남주동 남주동해장국]

쇠락한 구도심 무인도처럼 오롯이 홀로 서 있는, 남주동 해장국

by 초빼이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카피로

우리나라 음식 배달 시장을 휩쓸었던 모 기업의 광고가 문득 생각나는 저녁.

진정으로 '우리가 어떤 민족인지' 고민하다 보면 참으로 '술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초빼이다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술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에둘러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초빼이는 이 중 '음주(飮酒)'와 '가(歌)'를 특별히 더 즐기는 편.

'음주와 가'까지만 즐기는 사람들의 특징은 보통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말하는 '아재'들의 대표적인 특성.

뭐 '아재가 아재스러운 것'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는’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 굳이 부인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청주에서의 하루를 묵고 일어난 첫 아침은 고요하고 적막한 편이었다.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아 청주에 도착 후 호텔을 예약했는데 정말 말 그대로 '호텔'이라 쓰고 '모텔'이라 읽는 그런 수준의 숙소였던 것. 조금 늦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세상이 고요하다. 지난밤의 그 열정적인 커플들은 집에 들어갔거나 이미 출근했을 시간이니.

전날 밤 혼자 마셨던 술자리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청주의 노포 해장국 집을 찾았다. 다행히 숙소가 있던 동네 근처라 이동 시간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숙소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나와 해장국집으로 운전해서 가는 길엔 사람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어젯밤 택시 기사님의 말처럼 숙소가 있던 동네는 한때는 청주 최고의 번화가로 사람들의 뜨거운 욕망이 불타올랐던 곳이었지만, 요즘은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보기 힘든 시들어가는 지역이 되고 있었던 것. 가끔 보이는 사람들도 얼굴에 남은 어제의 삶의 고단함을 미처 지우지 못한 채 다시 일터로 향하는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라 애잔한 마음마저 들더라.


오늘 찾은 집은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해장국 집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마지막 언저리쯤인 1943년에 개업하여 한국전쟁을 견뎌내고 현재까지 영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지만 청주는 원래 경기도의 수원, 경북의 의성과 함께 전국 3대 우시장(牛市場)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지리적 위치상 전라도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거대한 우시장이 청주시 남주동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우시장 한편에는 소의 부산물을 재료로 하는 해장국집들이 성업하면서 자리 잡았다. 한 때 이 주변에는 수십 곳의 해장국집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한두 집씩 사라지다가 현재는 유일하게 이곳 '남주동 해장국'만이 남아 청주 해장국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가게 근처에 주차를 하고 내리니 골목 전체가 해장국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해장국 향이 대신하는 걸까?'라는 감수성 가득한 생각을 하며 해장국 집의 문을 연다. 이미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어르신 부부 두 팀과 단체 한 팀(대화를 조금 훔쳐 들으니 어떤 행사를 위해 청주에 들린 듯하다)이 식사와 해장술을 함께 하고 있다.


그렇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해장국집의 아침은 모두가 이렇게 닮아있다.

해장국의 재료가 무엇이든, 해장국집의 위치가 어디든 상관없이 우리는 아침 해장을 하기 위해 좀비처럼 그곳에 들려 해장술이라는 핑계로 다시 혈관 속 알코올의 농도를 채우고 있다.


지난밤 치열했던 '녹색 마법의 병들과의 전쟁'은 다음날 아침엔 격렬한 속 쓰림과 후회와 한탄으로 가시화된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눴던 헛된 맹세와 언쟁의 말들은 이미 세상에 흔적을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렸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어젯밤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고통을 잊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들려 지난밤의 기억을 조금 더 연장한다. 누구나 다 공감하겠지만 이른 아침 해장국 집을 찾으면 사람 수에 상관없이 딱 '한 병'의 소주만 청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집이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주문할 메뉴를 고르는 데 허비하는 시간을 과감히 줄인 것.

특해장국과 소고기 해장국 그리고 선지해장국이 전부이다. 선지의 양과 유무가 해장국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 집에선 꼭 선지 해장국을 먹어봐야 한다. 초빼이도 맛없는 선지에 대한 기분 나쁜 기억이 많아 어지간한 곳에서는 선지해장국을 잘 찾지 않지만 이곳은 완벽하게 달랐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신선한 선지를 입에 넣는다.

선지를 한 숟갈 베어 물면 마치 '내가 푸딩을 먹고 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부드럽고 신선하다. 게다가 사장님이 식재료를 아끼지 않는 분이신지 커다란 선지 덩어리가 몇 개씩 들어 있다. 소고기와 선지, 천엽, 우거지, 무 그리고 파 등의 재료가 소뼈를 잘 고아낸 국물과 함께 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이 맛있는 해장국의 최종 변신은 밥 한 공기 뚝배기에 들이미는 것으로 비로소 완성이 된다.


한 숟갈에 잘 삶아진 소고기 한 덩이가 올랐다. 잘 삶아 낸 후 따로 빼놓았다가 뚝배기를 낼 때 다시 올리는 소고기도 꽤 식감이 좋다. 재료의 구성만을 보자면 약간은 경상도식 소고기 국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맛. 경상도식 소고깃국은 그 칼칼함으로 더 큰 고통을 주며 쓰린 속을 잊게 하지만 이 집 해장국은 국물의 부드럽고 포근함으로 쓰린 속을 잘 감싸주는 듯한 느낌. 금세 속이 편안해진다.


이내 함께 주문한 수육이 테이블에 올랐다.

수육 접시에 국물을 부어 촉촉한 상태의 수육을 오래 먹을 수 있게 배려했다. 마치 사장님이 '촉촉하고 따뜻하게 드릴 테니 천천히 드시라'라고 곁에서 속삭이는 듯 한 느낌이다. 사소하지만 이런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참 좋다. 게다가 수육을 주문했는데 포들포들한 식감의 질 좋은 '양'까지 함께 담아주시니 전혀 기대하지 않던 보너스나 성과급을 받은 느낌이랄까?


미리 내 주신 양념장을 잘 섞은 후 수육을 찍어 입에 넣으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이 집만의 양념장은 수육을 먹을 때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레어템이 맞다. 간 마늘을 잔뜩 넣어 마늘 냄새에 대한 부담은 조금 있으나(당분간 키스에 대한 약속은 없을 예정이다), 시큼하고 깔끔한 양념장이 수육의 기름기를 모두 잡아버리기 때문에 굉장히 산뜻한 기분으로 먹을 수 있다.


사람 수에 관계없이 시켜야 하는 '소주 한 병'이 아쉬워지는 시간.

심지어 혹시 '잔술'은 팔지 않냐고 여쭤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너무 '아재'인 것을 티 내는 것 같아 간신히 진정시킨다.


전국의 노포를 돌아보는 게 그래서 힘들다. 전국 구석구석에 자리한 노포들을 일일이 찾아가기 위해선 직접 운전을 해서 찾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항상 '딱 한잔'에 대한 유혹이 사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법은 지키고 살고자 하는 편이라 이런 좋은 음식들을 두고도 술 한잔 제대로 마시지 못할 때마다 남는 아쉬움이 크다.

전성기를 누리다 점점 시들어가는 옛 도시들의 구도심을 볼 때마다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건물마저 힘에 겨워 옆 건물에 기대어 있던 모습을 보았던 목포의 구도심을 걸을 때도, 도심 한가운데인데도 오래된 폐가가 덩그러니 있던 제주의 어느 동네를 걸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남주동 해장국이 있는 남주동 일대도 전형적인 구도심의 쇠락을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아침 해장을 마친 후 동네를 찬찬히 걷다 보니 일제 강점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도 보이고,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해 무너져가는 건물들도 꽤 많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도시에서 도심의 흥망성쇠는 '돈'이라는 먹이를 쫓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생물과 같은 특성을 지녀, 젊은 사람들과 일자리, 편의시설이 좋은 곳을 따라가는 특성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도심의 쇠락을 바라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리 마음이 편치 않다.

구도심은 여러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스며들어 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 때문.


사실 초빼이가 즐겨 찾는 노포들도 구도심의 흥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노포는 삼대, 사대가 함께 찾아오며 가족의 추억을 제공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가족의 입맛을 대물림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며, 가끔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 혼자 찾아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위안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노포들은 거의가 오랜 시간을 한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최소 몇 십 년 이상) 도심과 같은 배를 탄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지역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계된 공간으로서 역할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남주동 해장국은 모두가 그 동네를 떠날 때도 자리를 지켜온 곳이라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해장국 집의 주변도 다양한 시도와 정책적 지원을 통해 다시 활기가 넘치는 지역으로 되살아 나길 기원한다.

또한 남주동 해장국도 맛있는 해장국으로 많은 사람들의 상처 입은 속과 마음을 위로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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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해장국(특, 소고기, 선지 중 선택) + 수육(소, 선택) + 소주(해장술)

2. 2명 이상 방문 시 : 해장국(특, 소고기, 선지 중 선택, 인원수대로) + 수육(대) + 소주(해장술)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청주의 구도심인 남주동에 위치하고 있다. 대중교통으로 찾기에는 조금 불편한 위치.

택시나 자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

2. 남주동 해장국 건물 앞에도 주차는 가능하며 전용 주차장이 건물 앞편에 있다. 또한 주변이 거의 창고나

도매상들의 가게가 많아 주변 건물의 빈 골목 등에 주차할 수 있어 주차 스트레스는 없는 편.

3. 영업시간은 06:00~20:00까지. 15~17시까지 브레이크 타임. 매주 월요일은 휴무.

4. 여행 및 관광정보

- 행정구역상 남주동이지만 성안길에 위치하고 있다. 청주 성안길에는 남주동 해장국집 외에 많은 노포가

자리하고 있는데, 중앙모밀(1969), 상주집, 공원당, APM떡볶이, 서문우동(1960) 등이 있다.

- 청주는 공예비엔날레가 유명한 곳. 2023년 9~10월에 개최되었다.

- 청주는 직지심경의 고향이기도 하다. 청주 고인쇄박물관도 볼 만하다. 최근 30여 년 만에 재단장을 마쳤

다고 한다

- 복합문화공간인 청주 동부창고도 방문해 보시길. 옛 청주 연초제조창 담뱃잎 보관 창고를 다양한

콘텐츠로 채워 '시민문화 예술공간'으로 변신시켰다.

- 청주 인근에 청남대가 자리 잡고 있다. 사전 예약제도 폐지하여 언제나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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