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계의 명콤비인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대표작 중 1949년 초연 된 ‘남태평양 (South Pacific)’이 있다. 2차 대전 당시 남태평양 어느 섬에 주둔한 미국 간호사와 프랑스 농장주, 해군 장교와 원주민 아가씨 간의 사랑을 그린 유쾌한 작품인데 ‘어느 멋진 저녁’ (Some enchanted evening), ‘해피 토크’ (Happy Talk)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대표 곡이라 할 수 있는 노래들이 흘러 나온다. 더불어서 해군 수병들의 멋진 합창을 들을 수 있는 ‘여자보다 좋은 것은 없네’ (There is nothing like a dame) 또한 주옥 같은 명곡이다. 이 곡은 해군 수병으로서 전장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여가 활동을 할 수 있지만 딱 한가지 부족한 것이 바로 교제 할 ‘여자’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노래의 가사에 보면 우리는 “도쿄 로즈로부터 충고도 듣지” (We got advice from Tokyo Rose) 라는 부분이 있는데 도쿄 로즈란 2차 대전 당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일본군의 선전 방송을 말한다. 도쿄 로즈는 유명 뮤지컬의 가사에 등장할 정도로 전쟁터의 미군에게는 유명 했는데 지금부터 도쿄 로즈 및 그 중 유일하게 신원이 밝혀진 한 여인의 기구한 삶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운명의 장난
‘아이바 도구리 다키노’는 일본계 미국인 2세였다. 1916년 태어날 때의 이름은 미국식으로 ‘아이바 이쿠코 도구리’였고 당시 아시안계가 다수 거주하던 서부의 로스엔젤레스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중산층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대단히 사교성이 좋고 붙임성이 좋아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테니스부 활동도 열심히 하는 등 아시아계로서 위축되지 않고 학교 생활을 열심히 이어갔다. 결국 1940년 명문인 UCLA에 동물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게 되었는데 본인은 의사가 되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그녀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바로 그 이듬해에 발생하게 된다. 1941년 여름에 도구리 일가는 일본에 사는 아이바 도구리의 이모가 위중한 병중에 있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다는 전갈을 받게 된다. 가족 및 혈연의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일본계 미국인 부모들은 그들의 딸인 아이바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그녀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부모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을 석권한 이후 아시아에 있는 이들의 식민지들은 사실상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 된다. 1937년부터 중일전쟁을 벌이며 장기전의 수렁에 빠져있던 일본은 이들 식민지들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데 결국 1940년 9월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 베트남)를 점령하게 된다. 이는 미국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하게 되었고 미국은 즉각 대일 금수 조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수 불가결한 석유는 여전히 금수 품목에서 제외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1941년 7월 남부 베트남 마저 점령 하자 미국은 석유를 대일 금수 품목에 포함 시키고 일본에게 중국 및 베트남에서의 철군을 강하게 압박한다. 일본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지만 극단적인 강경파 군부들의 입장에서 철군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미국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양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선제 공격을 위한 칼을 갈고 있었다. 아이바 도구리는 이러한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일본에 가게 된 것이다.
아이바 도구리는 1941년 7월 5일 로스엔젠레스 내 ‘산 페드로’ 항구에서 일본을 향하는 ‘아라비아 마루호’를 타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이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1942년에 5월에 아리조나의 일본계 민간인 억류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여권 없이 임시 신분증을 가지고 3주 간의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한 그녀는 도쿄 인근의 이모 댁으로 찾아 가는데 이미 이모의 상태는 병세가 상당히 악화된 상황이었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에게 일본의 모든 것이 낮 설고 어색했는데 특히 언어와 음식이 맞지 않아 상당히 고생 했다고 한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미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고 도쿄의 미국 영사관에 여권 신청을 하게 되지만 당장 여권을 받지는 못했고 단지 ‘신분확인서’만 수령하게 되었다. 여권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미국과 일본의 평화 회담은 그 파국적인 결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고 1941년 12월 1일 일본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배가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2월 8일 (미국 시간으로는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시한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 중인 미국 전함 아리조나
적국에 홀로 남다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 연합함대가 미국 태평양 함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자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엄청난 기쁨과 환호가 터진다. 하지만 일본 내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는데 미국적이었던 도구리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전쟁 발발 후 일본에 체류하던 미국 및 영국의 민간인들은 민간인 수용소에 수감 되었는데 도구리는 일본계라는 점이 작용 했는지 수용되지 않았고 일본 헌병대의 감시를 받게 된다. 그들은 도구리에게 미국 국적을 포기 할 것을 종용 하는데 그녀는 끝내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게 되었고 ‘전시 배급권’을 박탈 당한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인으로서) 당연히 친미적인 사고를 가진 그녀는 같이 살던 일본인 친척들 및 이웃들 과의 갈등이 쌓여가게 된다. 그녀는 결국 독립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고 도쿄로 이사한다. 진짜로 적국인 일본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이사하여 독립한다는 것은 자신 만의 생활을 위한 수입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였다. 낯선 땅에 완전히 홀로 남겨진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어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녀는 관련된 일자리를 알아보게 되었다. 1942년에는 ‘도메이 통신사’에서 미군 방송 등을 모니터링 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고 결국 1943년 8월에 라디오 도쿄 (지금의 NHK)에서 비서 업무 및 타이피스트로 옮기게 되었다. 그녀는 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대외 선전 방송을 하는 연합군 포로들을 만나게 된다.
일본의 선전 라디오를 담당했던 찰스 쿠슨스 소령
그 중에서도 호주 출신인 ‘찰스 쿠슨스’ 소령은 1942년 2월 싱가포르에서 포로가 된 이후 버마를 거쳐 7월에 일본까지 끌려 왔는데 협조를 안 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라디오 도쿄의 선전 방송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전쟁 전 호주로 이민을 간 후 현지 라디오 방송국에서 뉴스 제작 등에 관여하여 방송에 관한 한 베테랑이었다. 처음에 쿠슨스는 도구리가 일본 헌병대의 밀정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지만 결국 그녀의 속내를 알게 되었고 도구리는 그를 위해 여러 생필품을 몰래 구입해 주는 관계로 발전 한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연합군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좋지 않았으며 포로 중 사망률이 무려 25%나 되었다. 나치 독일에 포로로 잡힌 연합군 포로들의 사망률이 3% 이내 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거의 학살 수준의 사망률 이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던 쿠슨스 및 다른 연합군 포로들에게 도구리가 전달해 준 각종 생필품은 이들 및 다른 포로들에게 생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목숨을 거는 행동 이었고 훗날 도구리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있어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도구리가 비서 및 타이피스트로서 일하던 몇 개월 동안 쿠슨스는 그녀의 명료한 발음과 목소리에 주목하게 되었다. 찰스 쿠슨스는 도구리에게 ‘제로 아워’라는 대연합군 선전 프로그램에 참여 할 것을 권유 했는데 훗날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투박하고 남성적이며 유혹하는 말투가 아니었는데 이것이야 말로 내가 찾던 목소리였다.”라고 말했다.
쿠슨스의 제안을 받은 도구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과연 이런 행동이 조국 및 연합군 병사들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결국 프로그램이 음악을 위주로 하고 연합군 포로들의 편지를 소개하는 정도의 내용이라는 것에 마침내 참여를 수락한다. 1943년 11월에 그녀는 라디오 도쿄에 있던 20명 남짓한 영어 방송 아나운서 중 한 명이 되었다.
선전 방송 중인 아이바 도구리
제로 아워와 ‘도쿄 로즈’ 전설의 탄생
그녀가 진행한 프로그램은 제로 아워라고 불리는 음악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방송용 닉네임을 미국의 인기 만화에서 따온 ‘고아 앤’ (Orphan Ann) 또는 그냥 ‘앤’으로 정했다. ‘제로 아워’라는 프로그램 이름은 ‘제로센’이라 불렸던 일본군의 주력기, ‘0식 함상 폭격기’에서 따온 것인데 (연합군 사이에도 이 비행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청 거리를 늘리기 위해 단파 주파수를 사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일본 육군 소속 8국 G2 섹션(심리전 전담)에서 담당 하였고 인원 구성이 주로 영미권의 유학파 출신 장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회장 분량은 75분 정도 되었고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저녁 6시에서 7시 15분까지 방송 되었다. 도구리의 분량은 대략 20분 정도 되었다.
당시 태평양에 주둔하던 미국 육해군 및 해병대 장병들 중 이 프로그램을 듣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제로 아워는 병사들 사이에 회자 되었는데 전후 병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저 음악이 많이 나오고 내용이 좀 웃겨서 (어처구니 없어서) 듣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도구리를 비롯한 많은 여자 아나운서들에 대해 병사들 사이에 폭발적인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미군 병사들은 이들의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해 했고 여성 아나운서들을 통칭하여 ‘도쿄 로즈’라도 부르게 되었다. 여러 명의 여성 아나운서들이 방송을 했지만 미군 병사들에게는 오직 도쿄 로즈라는 하나의 객체로 각인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독일에서 반연합군 방송을 진행하던 아나운서를 ‘추축국 샐리’로 부른 것이나 베트남 전쟁 중의 하노이 방송국 아나운서를 ‘하노이 한나’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전후 1946년에 ‘도쿄 로즈’라는 동명의 헐리웃 영화가 나오기도 하는데 여주인공은 성적인 매력을 지닌 악하고 유혹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대다수 미국인들의 도쿄 로즈에 대한 보편적인 인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로 아워는 미군 병사들에게 관심은 받았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 시킨다든가 미국 국내의 분열을 조장 한다던가 하는 방송 고유의 목적에 있어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 수감 당시의 아이바 도구리의 모습
종전과 체포
1945년 4월 도구리는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 국적의 ‘펠리페 다키노’와 결혼을 하게 된다. 다키노는 도구리가 한 때 근무 했던 도메이 통신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업무상 라디오 도쿄를 자주 드나 들었고 이 과정에서 그녀와 친분을 쌓데 된다. 한편 그녀는 결혼한 이후에도 남편을 따라 포르투갈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으며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다음 날인 8월9일에는 소련이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한반도 및 사할린 섬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다. 이미 미군은 오끼나와를 점령하고 일본 본토 점령을 위한 소위 ‘몰락’ (Operation Downfall) 작전을 준비 중에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일본 정부는 군부 강경파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무조건 항복 이라는 결단을 내린다. 드디어 4년 간의 일본과 연합국 간의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도구리에게 종전은 많은 새로운 것을 의미했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가족 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 노력 했다. 한편, 전쟁 직후 일본의 궁핍한 생활 상은 그녀에게도 적용 되어 하루 하루 생존 하는 것이 또 다른 전쟁과 같았던 시기였다.
이 와중에 미국의 코스모폴리탄 잡지사에서 도쿄 로즈의 독점 인터뷰에 무려 $2,000 라는 거금을 내걸게 되었다. 그녀는 전쟁 중 방송국에서 한 행위에 대해 당연히 범죄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더불어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통신사와 접촉하여 자신이 바로 ‘도쿄 로즈’라고 밝히게 되었다. 도쿄 로즈로 불리는 여성 아나운서들은 십 수 명이었지만 전후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두 잠적했고 라디오 도쿄 에서는 이를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도구리 만이 금전적인 이유로 유일하게 ‘커밍 아웃’을 했는데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 9월 그녀는 반역 혐의로 요코하마에서 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일본의 전범들이 주로 수감 되던 도쿄 스가모 형무소의 6×9 피트 크기의 좁은 방에 갇히게 된다. 그 후 1년 간을 FBI, 및 ‘주일 미군 방첩부대’에 의해 철저히 조사 받게 되지만 이들은 도구리가 이적 행위를 했다는 여하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이듬 해 10월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도구리는 마침내 미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고 뱃속의 아이를 미국에서 출산 할 꿈에 부풀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는데 수감 생활로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낳은 아기는 출산 직후 사망하게 된다. 아이의 죽음에 따른 극도의 절망감과 슬픔 속에 잠겨 있는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 하는데 그녀에게 더 큰 시련이 닥치게 된다. 여권 신청 소식을 들은 참전 용사 단체 등 일부 미국인들 사이에서 반대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미국에서의 재판을 위해 1948년 9월 샌프란시스코로 송환되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법정에 입장하는 아이바 도구리
반역자의 낙인
사실 과거 조사에서 별다른 혐의점도 없었고 대중의 관심에서도 사라져 가는 그녀의 강제 송환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의 언론인으로서 타블로이드판 신문의 칼럼니스트였던 ‘월터 윈첼’이었다. 그는 1930년 대에 그 특유의 농담이나 직설적인 진행 솜씨를 살린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는데 저널리즘을 엔터테인먼트의 경지로 변화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반공주의자이자 ‘메카시즘’으로 유명했던 조셉 메카시 상원의원과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그에게 전쟁 중에 적국을 위해 선전 활동을 했다고 알려진 도구리는 좋은 공격 목표였는데 윈첼은 라디오 방송에서 반일 감정에 편승해 도구리를 지속적으로 비난했고 그녀를 기소하기 위해 관련 기관에 로비까지 했다. 결국 그녀는 체포되어 미국에서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그녀에 대한 반역죄 재판은 그녀의 서른 세 번째 생일인 1949년 7월 5일부터 시작 되었는데 여덟 가지 반역 행위에 대해 세부 조사가 진행 되었다. 피고가 많은 미국인들이 알고 있었던 도쿄 로즈라는 것과 여자에 동양계라는 점을 통해 재판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12주 간 지속된 재판에서 도구리는 자신은 국가에 불충한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변호했는데 마침 라디오 도쿄에서 함께 일했던 ‘찰스 쿠슨스’가 재판에 참여하여 그녀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며 힘이 되어 주었다. 쿠슨스 자신은 이미 1946년 호주에서 반역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고 무죄 선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녀는 기소된 여덟 가지 죄목 중 대부분에 대해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최종적으로 1944 년 10월의 ‘레이테만 해전’ 당시 진행한 방송에서 “이제 여러분들은 태평양의 고아에요 지금 여러 분의 배가 침몰했는데 집에는 어떻게 가시겠어요?”라고 코멘트한 부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재판 결과 그녀는 10년의 징역형과 동시에 10,0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고 미국 시민권을 박탈 당했다. 미국 역사상 반역죄에 대한 일곱 번 째 유죄 판결 이었다. 이후 그녀는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엘더슨 연방 여성 교도소’에 수감 되는데 같은 교도소에서 일명 ‘추축국 샐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나치를 위해 선전 방송을 했던 ‘밀드레드 질라스’와 만나게 되었다. 서로 간의 동병상련의 감정이 통했던 것일까? 둘은 수감 중에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도구리는 수감 기간 중 모범수로서 얌전히 생활했고 결국 6년 2개월 만인 1956년 1월에 조기 석방 된다.
1977년 포드 대통령 사면 직후 인터뷰 모습
명예 회복 그리고 죽음
석방 이후 그녀는 가족들이 이미 이사했던 시카고 ‘노스 사이드’에 정착하게 되는데 아버지와 함께 작은 아시아 수입품점 겸 선물가게를 꾸려 나가게 된다. 그녀는 대중의 과도한 관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랬고 조용히 생활했다. 한편, 미국 정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추방 명령을 받기도 했는데 이러한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녀에게 대반전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1976년 2월 ‘시카고 트리뷴지’는 도구리의 재판 중 증언을 했던 주요 인물들이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위증을 했음을 밝혀 냈다. 이후 CBS방송국의 대표적인 탐사 프로인 ‘60분’ (60 Minutes)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는데 사건의 배심원이 재판장으로부터 유죄를 평결 하도록 압력을 가했음을 자백한다. 이후 도구리의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회자 되고 그녀를 옹호하는 동정 여론이 고조 된다. 많은 유명인들도 동참 하는데60년대에 일본주재 미국 대사이자 동아시아 문제를 연구했던 하버드의 학자 ‘에드윈 라이샤워’는 “단순한 전쟁 속 신화였던 ‘도쿄 로즈’의 판결 사례는 미국인들의 정의에 대한 불명예가 되었다”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1월 19일 그녀는 ‘제랄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면 된다. 이 날은 포드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날이었으며 ‘도구리 다키노’에 대한 사면이 그의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공적 업무였다. 더불어 도구리의 미국 국적도 다시 회복이 된다. 도구리는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얘기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4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2006년 1월 15일 그녀는 ‘미국 2차대전 참전용사 협회’로부터 ‘에드워드 헐리히 시민상’ (미국의 유명 언론인의 이름을 딴)을 수상하게 된다. 2차 대전시 자신의 의지에 반해 적국에 갇혔지만 미국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연합군 포로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생필품을 전달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 날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다”고 술회 했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동년 9월 26일에 9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무리 한다.
그녀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오히려 전쟁 발발 시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을 택했더라면 이후에 재판이라던가 투옥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오히려 미국 국적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에게 핍박 당하고 조국인 미국인들에게 조차 이용 당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밝게 웃는 모습이었는데 그 웃음 뒤에 숨겨진 내면의 고통을 뒤로 한 체 이제는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