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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5. 2021

카렐 추르다, 저항의 중심에서 추악한 배신자로

체코의 군인 (1911~1947)

 

 카렐 추르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백탑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많은 수려한 경관과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자랑한다.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광장과 화약탑을 지나 카를로프 다리로 건너가는 여정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중세로 돌아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계속 걸어가면 멀리 프라하 성 및 비투스 성당이 보이게 되는데 가까이서 보면 그 웅장한 모습에 압도되고 만다.


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다양한 조각상으로 장식 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들이 현재 프라하를 유럽에서도 제일 고풍스러운 도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관 속에서도 건물 일부분에 총탄 자국이 무성한 다소 의아해 보이는 곳도 있는데 바로 카를로프 다리 인근에 있는 ‘성 키릴과 성메토디우스 성당’이다.  프라하가 2차대전의 전화 속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보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18세기에 지어진 이 바로크 양식의 성당에 있는 총탄 자국은 더욱 의아함을 자아내게 한다. 사실 이곳은 체코인들 에게는 하나의 성지와 같은 곳으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바치고 경의를 표하는 곳이다. 이 성당이 성지가 된 이유가 바로 지금 설명 하려는 인물과 관계가 깊으며 그의 행위로 인해서 체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한 장면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1930년대의 체코 사정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뮌헨 회담 당시 영국 수상 체임벌린과 독일의 히틀러의 악수하는 모습

국가의 해체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에 집권한 후 그는 점진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하고 있는 재무장을 실시하여 본격적인 재군비에 들어갔으며 1936년 3월에는 라인강 서안의 독일 땅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켜 ‘로카르노 조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다. 그리고1938년 3월에는 같은 독일어를 쓰는 게르만 민족의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며 본격적으로 대외 확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동남쪽 지역에 위치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 지역의 300만 독일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대전 후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여 만든 신생 공화국으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다수였지만 소수 인원으로 독일인, 루테니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등 다양한 민족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특히, 독일계 주민들은 1938년 5월 이후 나치의 은밀한 지원을 뒤에 엎고 자신들을 독일에 귀속 시키라며 격렬히 저항 했는데 이에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히틀러는 군부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 수립을 지시 한다.  


체코 정부는 독일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으로 독일 국경 지대에 ‘마지노선’에 버금가는 강력한 요새를 건설 하였고 서류상으로는 나름 최신 장비를 갖춘 100만 병력을 동원 할 수 있었다. 더불어 당대 육군 최강국인 프랑스와 상호 방위조약을 통해 독일의 침공 시 지원해 줄 든든한 우방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영국 도움 없이는 독일에 전쟁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영국 역시 1차대전의 막심한 인명 손실의 공포에서 아직 깨어 나지 못한 탓인지 섣불리 독일과 전쟁을 할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9월이 되자 당장 전쟁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고 각 국은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유럽의 주요 강국들과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가 함께 모여 9월 28일 독일 뮌헨에서 회의를 진행하며 역사적인 뮌헨 회담이 열리게 된 다.

       

뮌헨에 모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태리의 유럽 내 4대 강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내린 결론은 어이 없게도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주변국에 할양하는 것이었다. 비록 체코의 주권은 유지 한다고 하지만 국경 지대의 일급 방어 시설을 잃어버린 이상 체코가 외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일 것은 너무나도 분명 하였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중 주데텐란트는 독일에, 중북부의 테센 지방은 폴란드에, 코시체 등의 남부의 땅은 헝가리에 할양 되었으며 슬로바키아는 1939년 3월에 독립국 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체코는 그 영토의 핵심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독일의 ‘직할 보호령’이 되어 버렸고 지구상에서 체코라는 나라는 사라져 버리게 된다.


뮌헨 회담 직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수상은 런던에 돌아와 회담의 약정서를 보이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여기에 있다” 라며 자랑스럽게 얘기 했다. 하지만 그 종이의 내용이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통해 휴지가 되는 데는 체 일년도 걸리지 않았다.

 

영국본토항공전 당시 참전한 체코 출신의 조종사들

체코 망명 정부 수립과 카렐 추르다

체코가 해체되기 직전 대통령이었던 ‘에두아르도 베네시’는 뮌헨 협정 직후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미국을 거쳐 1939년 7월경 프랑스의 파리에 거처를 두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체코인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체코 국가 해방위원회’를 조직한다. 불과 두 달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전쟁이 공식화되자 베네시는 자신의 국가해방위원회를 ‘체코 망명정부’로 격상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들의 공인을 받게 된다.  체코 망명 정부에는 망명한 체코인들로 구성된 군대도 있었는데 대부분이 과거 체코슬로바키아군 출신 이었고 독일의 점령을 피해 주변국으로 도망친 후 결국 프랑스까지 오게 된 사람들이었다. 체코군인들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프랑스 전투에 참가하였고 프랑스 항복 이후 대부분 영국으로 이동 하게 된다.

이러한 체코인들 중에는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카렐 추르다’도 포함되었는데 그는 1911년 체코 남부의 ‘스타리 흘리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범한 농촌 대가족의 일원으로 초등 교육을 마친 후 잠시 벽돌공으로 일을 하였고 1933년에 체코군에 입대 하였다. 29 보병연대에 배속 받은 그는 착실히 진급하지만 1938년 이후 체코군이 해체되자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고 전쟁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에 알제리에 있는 ‘프랑스외인부대’ 1연대 소속으로 근무한다. 이후 프랑스 내 체코군에 합류하게 된 그는 이곳에서 독일과의 투쟁을 이어 나간다. 프랑스 항복 이후 극적으로 영국에 도착한 그는 체코군 소속으로 계속 복무하게 되는데 1941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 아크나케리에서 영국군 특수전 과정을 이수하게 되며 낙하산 교육도 받는다. 이후 그는 체코 본토에서 사보타지를 전개 할 요원으로 선발되어 ‘아웃 디스탄스’ 작전에 투입 되는데 요원들의 임무는 프라하의 ‘프라하-미흘리 가스 정유소’ 등 사회 기간 시설과 독일군의 핵심 군수 시설인 스코다 공장 폭격을 유도하고 현지 저항 세력에게 무전기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추르다는 1942년 3월에 영국군의 ‘핼리팩스’ 폭격기에서 다른 2인의 멤버들과 함께 강하하여 4년 만에 조국인 체코로 돌아오게 된다. 함께 강하한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의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유인원 작전  (Operation Anthropoid)

추르다가 체코로 다시 돌아올 때 즈음 체코 망명 정부는 또 다른 중요한 계획을 진행 시키고 있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이후 많은 이들이 소련의 붕괴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점령된 체코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스코다 중공업을 통해 독일군에 전차 및 트럭을 대량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특히, 스코다에서 생산된 ‘38톤 전차’는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어떤 전차 보다 우수했고 독일군 침공의 선두에 있었다. 영국 측은 체코 망명 정부에게 전쟁 수행에 더욱 많은 역할을 하도록 압박 하였는데 북아프리카 전선에 체코군을 파견 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요구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네시 대통령은 영국 측의 요구도 만족시키면서 국제적으로 체코인이 더 이상 독일 측의 고분고분한 노예가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그 형태는 암살이었고 최종적으로 선정된 대상자는 당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최고 실권자이자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였다.

하이드리히는 금발에 장신으로 해군 정보장교로서 근무했고 당시에는 나치 친위대 소속으로 체코에서 최대한의 수탈을 통해 독일 전쟁 기구를 돌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강온양면책을 적절히 활용하여 체코인들을 통치하였는데 저항하는 체코인들은 강력하게 탄압하는 동시에 임금 인상 등을 통해 공장의 태업을 막으면서 생산량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수완을 발휘했다. 더불어 나치 친위대 내 최고 고위급 인사 중 한 명 이었는데 런던의 체코 망명 정부에게 자국민을 탄압하고 분열 시키는 동시에 높은 대외적 인지도를 가진 하이드리히 만큼 적합한 암살 대상은 없었다. 더구나 그는 독일 점령지 내 유대인의 최종적 해결 (학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위험한 인물이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공식화한 1942년 1월의 ‘베를린 반제 회의’ 주동자가 바로 하이드리히였다.

하이드리히를 암살 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2인의 정예 요원이 선발 되었는데 이들은 체코 출신의 ‘얀 쿠비스’와 슬로바키아 출신의 ‘요제프 가브칙’의 2인 이었다. 이들이 선발 된 데에는 나치 독일편에 선 슬로바키아가 체코와 함께 투쟁을 한다는 정치적 메시지도 내포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28일 이들은 다른 7명의 요원들과 함께 눈 덮인 프라하 동부의 ‘네흐비즈디’의 숲에 낙하 했는데 이곳은 원래 강하 예정지인 ‘플젠’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 이었다. 강하자들은 현지 지하 저항 세력과 접촉하여 프라하로 잠입하게 되고 추르다가 속한 ‘아웃-디스탄스’ 작전의 멤버들과 접촉하며 하이드리히의 암살 계획을 구상했다. 하이드리히의 일일 동선과 경호 상태 등을 분석한 결과 암살에 최적지는 하이드리히가 그의 집에서 프라하성의 집무실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급커브 도로로 판단 했다. 인근의 전차 트램 및 정류장이 있는 이곳에서 하이드리히의 차는 속도를 줄일 것으로 예상 되었고 쿠비스와 가브칙은 이 때 공격하기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던 중 하이드리히가 곧 프랑스로 부임지를 옮긴다는 첩보가 입수 되었고 이들에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1942년 5월 27일을 거사일로 잡은 쿠비스와 가브칙은 다른 요원들과 함께 무기를 숨기고 암살 장소인 프라하 북부의 8구 불로브카 병원 앞 벤치에 앉아 하이드리히의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 반에 그의 메르세데스 오픈카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가브칙이 코트에 숨겼던 스텐건을 발사 했지만 스텐건 특유의 악명 높은 총알 걸림 현상이 나타나며 총은 발사 되지 않았다. 당황한 가브칙은 도망가기 시작했고 하이드리히는 운전 기사에게 그를 쫓도록 명령했다. 그 직후 인근에 있던 쿠비스가 폭발물을 던졌고 하이드리히의 차량 우측 뒷바퀴에서 폭발했다. 쿠비스는 작전이 실패 했을 거라 생각하고 자전거를 타고 도망갔고 폭발의 충격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다. 작전은 실패한 듯이 보였다.                        


리디체 학살 추모상

리디체의 비극 그리고 배신

사건 당일 오후에 프라하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대대적인 검문이 이루어졌다. 쿠비스와 가브칙은 저항 운동원인 모라베츠 가족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이드리히의 암살 시도 소식에 히틀러는 광분하게 되었고 엄청난 규모의 복수를 지시했다. 독일 측은 사건의 배후나 여하한 정보를 주는 사람에게 10만 크로네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걸었는데 마침내 6월 4일 하이드리히가 패혈증으로 사망한 뒤에도 특별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하이드리히 사망 이후 나치의 추적은 대단히 집요했는데 체코 전국에서 3만 가구 이상의 집들이 수색을 당했고 최종 1만 3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체포 되었다.


한편, 추르다는 이 당시 체코 중부 콜린에 있는 누이 집에 머물렀는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동료들과 만나기 위해 프라하로 잠입하게 된다. 하지만 프라하에서 그를 숨겨주었던 저항운동원 가족 조차도 너무나도 위험해진 상황에 그의 체류를 거부하게 되고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고향의 집으로 가서 다락방에 몰래 숨게 된다.

이 와중에 나치는 역사에 길이 남을 악행을 자행하세 되는데 체코 서부에 있는 리디체 마을을 문자 그대로 지구상에서 소멸 시켜 버리게 된다. 리디체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농촌 마을 이었는데 게슈타포가 이 마을 사람들이 하이드리히의 암살자들을 숨겨 줬다는 거짓 정보를 믿게 되면서 즉각적인 보복 작전의 대상이 되었다.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지 일주일 된 6월 10일에 이 마을의 남자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총살 당했고 여자들은 독일의 라펜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105명의 어린 아이들은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로 이송 되었다. 나치의 기준에 인종적으로 적합 하다고 판단된 소수의 아이들만이 독일 가정에 입양되어 전후까지 살아 남았다. 이 마을 출신 남자들 중 전후까지 생존한 사람은 단 3명 이라고 전해 지는데 그 중 두 명은 조국을 탈출해 영국군과 함께 싸우던 군인들 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죄로 복역 중이었던 이 마을 주민이었다.


나치는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한 이후 리디체를 통째로 밀어 버리고 모든 공공 기록에서 지워 버렸다. 리디체의 비극적인 소식은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는데 특히, 영국과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고 미국 일리노이주의 한 마을은 이를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리디체로 개명했다. 전후 리디체 마을은 다시 복구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나치 학살의 희생자이자 불사조처럼 부활한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리디체의 비극은 체코 전국에 엄청난 공포로 다가 왔는데 이러한 학살을 통해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을 지라도 나치에 의해 아무 때라도 체포되고 죽을 수도 있다는 협박의 메시지로 여겨진 것이다. 하물며 특수 요원으로서 암살 사건에 개입한 추르다는 말할 것도 없었는데 그는 리디체 사건 이후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다 죽을 수 있다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에 억눌리게 된다. 그 와중에 그의 어머니의 반복되는 요청에 굴복한 추르다는 체코 경찰에 암살범이 누구 인지를 밝히고 더 이상의 무고한 학살을 중지하라는 익명의 편지를 쓰게 된다. 그는 이 편지에서 암살의 핵심 요원인 가브칙과 쿠비스의 이름을 밝히게 되는데 다행인 것은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이 체코 애국자였던 것이다. 이후 추르다는 6월 16일에 프라하로 이동하여 대원들과 접선을 해보려고 시도 하지만 저항요원들의 거처는 모두 폐쇄된 상황 이었다. 이틀 후인 6월 18일은 게슈타포가 제시한 자진 신고 및 사면 기간이었고 추르다는 6월 16일 정오 경 프라하의 게슈타포 본부인 페체크 궁전에 가서 자수하게 된다. 심문을 받을 때 그는 말을 심하게 떨면서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가브칙이 암살 현장에서 남기고 간 가방을 보고 그 안에 어떤 무기가 있는지 상세히 설명 할 수 있었다. 게슈타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를 믿게 되었고 추르다는 이렇게 배신자가 되었다.        


총탄 자국이 선명한 성키릴과 성메토디우스 성당 외벽

새벽의 7인

추르다는 게슈타포의 심문을 통해 그가 알고 있는 요원 및 저항운동원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누설했다. 독일 당국은 확보된 정보를 통해 요원들에게 거처를 제공한 모라베츠 일가의 집을 습격 하는데 부부 및 아들 등 일가족 세 명이 현장에서 체포 된다. 모라베츠 부인은 기지를 발휘하여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즉각 독약 샘플을 먹고 자살한다. 게슈타포 심문실로 끌려간 모라베츠 부자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21살의 아들은 망치로 손을 가격 당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게슈타포가 사망한 모친의 머리를 자른 후 상자에 담아 보여주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도 무너지게 된다. 가브칙과 쿠비스에게 물품을 전달해 주며 연락책 역할을 하던 그는 마침내 요원들이 은거하고 있던 프라하 내 ‘성 키릴과 성메토디우스 성당’에 대해 자백하게 된다. 은거하던 요원들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6월 18일 새벽 독일군은 블타바강 옆에 위치한 성 키릴과 성메토디우스 성당을 대규모로 포위하게 된다. 성당 안에는 7명의 요원들이 있었고 독일군은 이들을 생포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대규모의 독일군 움직임을 발견한 요원들은 발포하게 되고 이후 양 측간에 6시간에 걸친 전투가 시작된다. 추르다는 독일군 편에 서서 마이크로 이들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7명의 대원 중 어느 누구도 굴복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맹렬한 기관총탄 세례 속에 스텐건과 권총 만으로 버티던 이들은 한 명 한 명씩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점차 실탄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최후의 보루인 지하실 환기구에서 독일군이 사다리를 밖으로 끌어내자 더 이상 외부를 볼 수 없었고 독일군은 환기구에 방화 호스를 집어 넣으며 물을 뿌려대었다. 지하실에 차오르는 물을 보며 최후를 직감한 잔여 인원들은 조국과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모두 자살하고 만다. 조국을 해방시키겠다는 강력한 신념을 가진 이들로서의 영웅다운 최후를 마친 것이다.

 

재판정에서의 카렐 추르다

배신자의 말로

추르다는 전투 후 요원들의 시신을 점검하고 이들의 신원을 독일군에 확인해 준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추르다의 밀고를 통해 점 조직으로 운영되던 체코 내 저항 세력의 상당수가 노출 되었고 대부분 처형 되었다. 암살의 주인공인 가브칙과 쿠비스의 가족 및 친척들도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살해 당하게 된다. 또한 저항운동원 내에서도 또 다른 배신자도 나오게 되어 독일 측의 이중스파이가 되는 사례도 등장한다. 한 마디로 그의 배신을 통해 체코 저항 운동은 그 근본이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 추르다는 독일군에 협력한 대가로 ‘50만 라이히스마르크’라는 거금을 받게 되고 게슈타포의 정보원으로서 본격적인 배신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는 ‘칼 예호트’라는 독일 이름을 얻고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는데 종국에는 독일인 여성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는 독일의 최후 승리를 믿었고 전후에는 독일이 선전하는 것처럼 소련의 동방 식민지에 영주하여 농토를 개척 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뜻대로 진행 되지 않았다. 1943년 이후 수세에 몰렸던 독일군은 1944년 하반기가 되자 패배라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1945년 5월 전쟁의 막바지 시기에 그는 미군에게 투항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나 플젠 인근에서 저항운동원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이 당시만 해도 그의 상세한 정체를 모르던 사람들은 그를 별다른 의심 없이 가볍게 훈방 했으나 이후 다른 저항운동원들에게 그의 신분이 밝혀지고 난 후 다시 체포 된다.


중대한 반역자로서 그는 프라하의 판크라츠 감옥에 수감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왜 요원들을 배신 했는가?”라고 묻는 잘문에 “당신도 100만 마르크를 받는다면 똑같이 했을 것이다”라는 어이 없는 답변을 통해 재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의 죄는 너무나 명백하여 이후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 되었고 1947년 4웡 29일 형이 집행 되며 배신에 대한 죄값을 치루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다양한 투쟁을 하였으나 결국 배신으로 삶을 마감한 그의 일생을 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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