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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4. 2021

발터 폰 자이틀리츠, 이용만 당한 명문가 출신 장군

독일의 군인 (1888~1976)

발터 폰 자이틀리츠 쿠르츠바흐

1955년 10월부터 이듬 해 1월까지 당시 서독은 문자 그대로 나라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이자 눈물 바다였다. 그 전해인 1954년에 서독 축구 대표팀이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 했을 때보다 더한 ‘감동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바로 1945년 패망 이후 소련에 억류 되어있던 전쟁 포로의 마지막 만 여명이 귀환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서독 수상이었던 ‘콘라드 아데나워’가 소련 수상이었던 ‘니콜라이 불가닌’과의 외교와 협상을 통해 성사 되었는데 귀환 포로들이 오는 길마다 서독 국민들은 꽃다발을 던지며 열광적으로 환영 했다. 10년 만에 장애인이 된 아들을 보는 어머니, 태어나서 아버지를 처음 보는 아이들 등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맺힌 사연들을 안고 있었는데 역사상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였던 ‘에리히 하르트만’ (공식적으로 352기 격추) 같은 이들은 소련의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름의 신념을 지킨 것으로 더욱 추앙 받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듯이 모든 이들이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포로수용 기간 동안 소련 측에 전향 하거나 (이러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동독으로 넘어갔다.) 적극 협력하여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귀환 포로 그룹 내에서도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이러한 인물들 중에는 심지어 장성급의 고위 장교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지금부터 소개 하고자 하는 ‘발터 폰 자이틀리츠 쿠르츠바흐’ 장군이다. (이하 자이틀리츠)  


명문가의 청년 장교

자이틀리츠의 집안은 프로이센의 귀족인 ‘융커’ 출신으로 독일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가였는데 그 가계는 13세기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유서 깊은 집안 이었다. 자이틀리츠 집안의 많은 남자들이 프로이센군의 장교로 복무 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병 장군으로 7년 전쟁에서 활약한 ‘프리드리히 폰 자이틀리츠 장군’이 있다. (이 장군의 이름을 딴 순양전함이 1차 대전 시 크게 활약했다.) 이러한 집안 전통에는 그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폰 자이틀리츠’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센군 소장 출신이었다. (독일어 원문의 ‘Generalleutnant’은 영어의 중장으로 번역되나 당시 독일군은 준장 대신 소장부터 시작 되기에 현재의 계급 체계로 놓고 보면 소장이 적합하다.)  자이틀리츠도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군대 문화에 노출되었고 1908년 대학입학 시험을 마친 이후에 사관후보생으로 단치히 (현재의 폴란드 그단스크)의 야전 포병대에 배속 된다.


후보생 과정을 이수한 후 1910년에 소위로 임관 하게 되는데 4년 후인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포병 장교로서 서부 및 동부의 양 전선에서 복무 하게 된다. 1916년에는 사상 최악의 살육전이었던 프랑스의 ‘솜므 전투’에 중위로 참전하게 되는데 이 때 영국군은 탱크라는 괴물을 처음으로 투입하게 되었고 자이틀리츠를 비롯한 많은 독일군들의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대위로 진급하며 2급과 1급 철십자 훈장도 수여 받을 정도로 용맹과 능력을 인정 받았다. 하지만 그의 조국 독일은 1918년 11월의 킬 항의 해군 수병 반란 직후,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며 패전국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다. 당시 다른 많은 독일 장교들처럼 그도 조국 독일이 패배 했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체 귀향하게 된다.         

 

직업 군인의 길을 가다

1차대전 후 독일은 수많은 귀향 군인, 상실한 해외 식민지에서의 귀국자들, 나날이 증가하는 실업자 그리고 좌익과 우익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해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한편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계속 군에 남기로 결심했던 자이틀리츠는 전공인 포병 병과에서 계속 직분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당시 신생 공화국이었던 폴란드 국경 쪽의 슐레지엔 쪽에서 근무했다. 폴란드는 1차대전 후 다시 나라를 세우면서 주변국들과의 크고 작은 영토 분쟁을 겪게 되는데 독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당시 독일과 폴란드 국경 지대인 슐레지엔은 폴란드 분리주의자들과 독일인들 사이의 충돌이 다수 발생 하였다. 폴란드 분리주의자들은 해당 지역을 폴란드로 귀속시키려 했으며 이러한 충돌이 훗날 독일군이 2차 대전시 폴란드에 대해 아무런 주저도 없이 침공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자이틀리츠는 동부 국경 지대에서 근무 후 독일 곳곳을 이동하며 차근차근 군 경력을 쌓아갔는데 1929년에는 제국국방성 내 ‘육군 병기총감’ 부관으로 근무하고 이듬 해에는 소령으로 진급한다. 1933년에는 포병연대 내 기병 부대 지휘관으로서 니더작센주의 ‘페르덴’에서 근무하는데 그는 이곳에 터전을 잡았고 가족들은 전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이후 중령을 거쳐 올림픽이 열렸던 1936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신설 22보병사단 내 포병연대장이 된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까지 그는 핵심 엘리트 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실력을 인정받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착실히 다지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로의 진격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그는 수도 베를린 인근 포츠담의 포병대에 근무 중이었는데 12월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장군으로 진급하게 된다. 이후 1940년 3월에는 제12 보병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부대는 5월 10일 개시된 황색 작전 (프랑스 침공 작전)에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휘하의 ‘A 집단군’에 소속되어 프랑스 공략 주역 중 하나가 된다. 당시 휘하 부대를 이끌고 룩셈부르크와 프랑스 북부의 모뵈쥬, 솜므, 낭트 등을 휩쓸며 프랑스 전역에서 큰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의 전공으로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 받는다.


프랑스 항복 이후 그의 부대는 현지 점령군의 일부로서 1941년 5월 소련 침공 직전까지 그곳에 주둔한다. 소련 침공 직전에는 동부 국경인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했는데 이번에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휘하의 북부집단군 에 배속된다. 마침내 자이틀리츠와 독일의 운명을 바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장으로 투입되기 직전이었다.


독일군을 환영하는 리투아니아인들

1941년 6월 22일 새벽 그가 속한 북부집단군은 소련 제2의 도시이자 혁명의 도시인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쾌속의 진군을 시작한다. 자이틀리츠의 부대는 발트 3국을 거치며 현지 주민들로부터 소련군으로부터의 해방자로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소련은 독소불가침 조약 이후 독일과의 약속에 따라 독립국이었던 발트 3국을 침공하며 자신의 연방에 편입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현지인 반공 인사들이 죽거나 수용소로 끌려 갔던 것이다.


독일군은 7월 중순에는 레닌그라드 인근에 도착해 도시를 포격하기 시작하는데 예상 외로 강력한 소련군의 방어선에 봉착해 쉽사리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결국 8월말에는 독일군이 시 전체를 둘러 쌓으면서 포위망을 완성했고 독일 포병들의 맹렬한 포격과 공군의 폭격이 연일 계속된다. 하지만 여전히 전진은 더디었고 9월이 되자 히틀러의 관심은 온통 수도인 ‘모스크바 공략’에 집중 되었는데 북부집단군 소속의 ‘4기갑집단’을 남쪽의 중부집단군에 배속 시키도록 명령을 내린다. 동시에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을 굶겨 죽일 작정을 하게 되고 도시 자체를 공격해서 많은 희생을 내기 보다는 도시의 포위를 유지하고 보급선을 끊음으로써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려는 계획을 실행했다. 이러한 결과, 도시 곳곳에서 아사자와 부상자가 생겨났고 개와 쥐까지 먹어 치운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인육을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에 빠진 거대 도시를 구하기 위한 소련군의 반격은 11월부터 개시 되었는데 12월의 모스크바에서의 공세와 더불어 독일군을 서쪽으로 상당히 밀어 부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완강한 현지 사수 명령에 따라 위치를 고수한 독일군 부대들이 포위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렇게 형성된 포위망/돌출부 중에 가장 유명했던 것이 바로 ‘방어전의 마스터’, 발터 모델 장군이 활약한 ‘르제프 돌출부’와 자이틀리츠가 참전한 ‘데미얀스크 돌출부’였다.


 데미얀스크 돌출부의 독일군

데미얀스크에서의 활약

데미얀스크 돌출부 전투는 1942년 1월 7일 ‘파벨 쿠로치킨’ 장군 지휘하의 소련 북서전선군이 공세를 개시하면서 시작 되었다. 당시 독일군의 상황은 여름과 가을에 걸쳐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졌고 10월 이후 갑자기 닥친 장마와 강추위로 인해 병사나 장비 모두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월동 준비가 제대로 안 된 독일군은 러시아 민가에서 빼앗은 식탁보까지 두르며 추위를 이겨보려 했지만 동상 환자만도 20만 이상 발생하며 전투력을 상실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군 16군 타격을 목표로 주력인 2군단과 10군단 사이를 공격 하면서 파고 들었고 16군의 보급로 역할을 하는 ‘스타라야 루사’ 철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군 2군단이 있는 남동쪽의 ‘데미얀스크’를 우회하여 공격 했는데 초기 공격은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지지부진 했지만 결국 소련군 11군과 3충격군은 2월 8일에 독일 2군단 전체와 10군단 일부인 9만 5천명 명을 데미얀스크에서 완전히 포위 하는데 성공했다. 자이틀리츠의 12보병사단 또한 2군단 소속으로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더불어 남서쪽의 ‘홀름’에도 5천명의 연대 규모 독일군이 포위 되었다. 독일군으로서는 처음 당하는 포위 상황 이었고 독일군 최고사령부 (OKH)는 이들의 구출을 위해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핵심은 포위망을 뚫고 나오느냐 아니면 버티느냐의 선택이었다. 4배나 많은 적군을 뚫고 나오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고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항공 보급’을 통한 버티기 작전이었다. 독일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데미얀스크에는 활용 가능한 2개의 비행장이 있었고 당시만 해도 소련 공군은 여전히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 되었다. 독일 제 1항공군은 보유한 ‘융커스-52’ 수송기와 ‘하인켈-111’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총 59,000톤의 보급품을 공수했다.


독일군은 소위 ‘고슴도치 진지’를 통해 밀집 방어를 실시했고 소련군의 공세가 심해지는 곳에는 적기에 예비대를 투입하여 성공적인 ‘기동 방어’를 이어 나갔다. 이러한 상황이 4월까지 두 달간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독일군은 포위망 탈출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선두에 자이틀리츠가 서게 된다.


1942년 3월 20일에 독일군은 데미얀스크 포위망을 돌파 하기 위해 ‘자이틀리츠 돌격 집단’을 구성하여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이들은 북서쪽의 16군 본진이 있는 방향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동시에 16군 본진에서도 동쪽으로 공세를 실시하여 소련군을 이중으로 압박 했다. 포위된 독일군이 공세로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소련군은 크게 당황했고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결국 4월 22일에는 포위를 완전히 벗어 날 수 있었고 데미얀스크와 홀름의 독일군은 구원 되었다. 자리틀리츠는 이 공로로 6월에 포병 대장 (중장)으로 진급하며 51군단장으로 영전하게 된다.    


데미얀스크와 홀름 포위전을 통해 독일군은 ‘방어전의 모범’이라고 할만한 대단한 선전을 펼쳤다. 한편 이것은 위기 상황에서 독일 공군의 항공 보급 능력을 과대 평가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지휘부의 자만은 후에 발생 할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 비극이 벌어질 곳은 데미얀스크에서 남쪽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는데 당시 소련 최고 지도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 이었다.  

 

청색작전과 스탈린그라드

1941년과 1942년의 겨울 기간 동안 독일군은 악전고투하며 겨우 생존 하는데 성공했다. 전력이 많이 약화 되기는 했지만 편제와 인원 구성을 변경하는 등의 꼼수를 쓰면서 지도 상의 병력 구성은 어느 정도 회복 했고 이제 하계 공세를 준비 하기 시작했다. ‘청색 작전’이라 불리는 1942년 독일군의 하계 공세는 ‘청색’이라는 단어 하나가 표현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것 이었는데 독일군은 주공을 남부 카프카즈의 유전 지대로 두고 남부집단군을 두 개의 다른 집단군으로 다시 나누었다. 그 중 ‘A집단군’은 카프카즈의 유전 지대로 진군하여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절단 낼 것이었고 ‘B 집단군’은 볼가강을 따라 이동하며 측면에서 이들을 호위하여 소련군을 압박 할 터였다. 자이틀리츠의 51군단은 B 집단군 중 ‘제 6군’에 속해 작전을 수행했다.


6월말 독일군은 거대한 진격을 시작하며 ‘청색 작전’의 막을 열었고 소련군은 1941년과 같이 곳곳에서 허무하게 무너디게 된다. 주요 도시인 하르코프, 보로네시, 로스토프가 잇달아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소련군은 방어선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독일군을 멈추게 한 것은 적이 아닌 연료 부족 때문이었다. A집단군은 카프카즈를 향해 파죽지세로 내려갔고 B집단군은 볼가강의 교통 요충지인 스탈린그라드를 향해서 전진했다. 이곳은 남부의 자원을 볼가강을 통해 운송 시키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더구나 소련군 입장에서는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지은 도시였기에 절대 포기 할 수 없었다. 독일군 입장에서도 이 곳을 점령해야 A집단군의 배후가 안전해 지기 때문에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서 전투 중인 독일군

8월 21일 마침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개시 되었다. 독일군은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을 통해 자신들의 출현을 알렸고 이어 보병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볼가강을 뒤로 한 소련군은 결사의 항전을 펼쳤는데 독일군이 포격이나 폭격을 통해 만들어낸 폐허의 돌무더기 속에서 소련군은 불사조처럼 일어났다. 자이틀리츠는 그의 51군단을 이끌고 9월부터 시가전에 투입 되었는데 도시의 수많은 폐허 속에서 싸우는 가운데 전진이 극도로 더디어 졌고 독일군은 특유의 신속한 기동과 합동 작전을 전개 할 수 없었다. 포격을 하면 할수록 소련군에게는 숨기 좋은 은폐물이 생기는 상황 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건물 하나하나를 뺏으면서 끈질기게 공격을 이어 나갔고 11월초에는 시의 90% 가량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의 숨통을 끊어 버리려고 하는 그때에 멀리서 북쪽에서 또 다른 포격 소리가 들려온다. 11월 19일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역포위하는 ‘천왕성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좌익의 동맹군인 루마니아, 헝가리군이 맥없이 무너지며 결국 11월 23일에는 포위망이 완성 되었다.


포위된 상황 자체는 과거 데미얀스크에서 자이틀리츠를 포함한 독일군이 당했던 포위 상황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문제는 그때는 병력이 10만 이하였지만 지금은 포위망 안의 인원이 그 3배인 3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또 다시 괴링의 공군에게 항공 보급 여부를 물었고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겨울 폭풍이 몰아치는 11월 말에 비행기 대수도 부족한 상황에서 데미얀스크에 공수 했던 몇 배를 보급 해야 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작전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 되었다. 하지만 아집과 자기 최면에 빠진 히틀러와 운동 부족으로 비대해진 괴링 만이 이를 모르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히틀러는 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의 탈출 요청을 불허하고 현지 사수를 명령했다.


스탈린그라드에 보급품을 수송한 독일군 Ju-52 수송기

독일군은 점점 더 지쳐갔고 결국 보급품이 극도로 부족해진 12월 9일이 되자 최초의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데미얀스크에서 공세를 통한 탈출 경험이 있는 자이틀리츠는 모든 독일 장군들 중 가장 강하게 포위망 탈출을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령 대로만 움직이는 참모본부 출신의 파울루스는 이러한 주장을 묵살했고 만슈타인 장군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서쪽에서 ‘겨울폭풍 작전’을 개시 했을 때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이미 물자를 나르는 말까지도 잡아 먹었던 6군 병사들에게는 도망칠 힘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1943년 1월이 되자 상황은 이미 끝이 난 것이나 다름 없었고 자이틀리츠는 휘하의 부대에게 개별적으로 항복 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자이틀리츠 본인도 공식적인 독일군의 항복 하루 전인 1월 31일에 소련군에 투항하게 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힌 9만 1천명의 독일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자유독일 국민 위원회 멤버들과 함께한 자이틀리츠

반히틀러 활동에 앞장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잡힌 독일군 중 장성은 총 22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모스크바 북동쪽 300 킬로미터에 위치한 ‘보이코보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이들은 수용 기간 중 90% 이상이 사망한 스탈린그라드 출신 일반 사병들과는 비교 할 수도 없는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지냈는데 사실 이곳은 과거의 별장을 개조한 곳이었고 수용자들은 충분한 식사에 독서나 정원 재배 등을 하며 자유롭게 소일거리 했다. 사실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는 소련측이 이들을 전향시키기 위한 포석 이었는데 소련 측은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자이틀리츠를 “전향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분류했다.


사실 자이틀리츠는 포위망에서 히틀러가 탈출을 못하게 하자 이를 자신 및 6군 전체에 대한 ‘사형선고’로 보았고 이때부터 히틀러에 대한 엄청난 혐오를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자이틀리츠는 소련의 판단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반히틀러’를 표방하는 독일군의 선두에 섰고 1943년 9월에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독일 장교 연합’에 가입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파울루스 원수를 포함한 스탈린그라드에 서 생포된 11명의 다른 장군들도 이에 합류 했다. 독일 장교 연합은 두 달 후인 1943년 11월에 이미 조직이 구성되어 있던 ‘자유 독일 국민 위원회’에 흡수 되는데 이 곳에는 독일군 사병, 장교 및 좌익 출신 망명 민간인들까지 포함된 단체였다.


‘반히틀러’ 운동을 전개 함에 있어 자이틀리츠는 최초에는 수용소를 돌며 반히틀러, 반나치 연설을 하며 ‘자유 독일 국민 위원회’에 전향 하도록 병사들을 회유 한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만난 독일 포로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고 심지어 그의 모습을 본 부관조차도 그를 외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는 단순한 단체 구성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무장 투쟁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스탈린에게 직접 4만 명의 ‘독일 의용군’을 조직하여 히틀러의 군대와 전투에 참여 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단지 독일군에 대항한 소련군의 선전 목적으로만 이용 되었을 뿐이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의 이러한 소련과의 적극적인 협력에 대해 궐석 재판이 진행 되었는데 그는 반역자로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모든 네 명의 딸을 비롯한 가족들이 게슈타포에 체포 되어 수용소 및 고아원으로 이송 되었고 그의 부인은 그와 이혼을 하도록 강요 받았다. (이 결정은 전후에 취소 되었다.) 또한, 기사 십자훈장을 포함한 그의 모든 서훈이 박탈 되었는데 이는 전후 귀국 시에 다시 원복 되었다.

 

씁쓸한 귀국

전쟁이 나치의 항복으로 끝난 후 자이틀리츠는 소련 측에 지속적으로 그의 석방과 ‘소련 점령 지구’로의 귀환을 요청 했으나 그의 필요성이 없어진 소련은 오히려 그에게 과거의 죄값을 묻는다. 그는 소련에서 벌어진 각종 전쟁 범죄에 대해 재판을 받았고 1950년 7월 소련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게 되는데 불과 두어 시간 후에25년의 징역형으로 감형을 받는다. 이러한 소련의 조치에 대해 그는 “차라리 이곳에서 나를 쏴서 죽이라!”고 강하게 항의하지만 결국 소위 ‘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어 복역하게 되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한마디로 ‘토사구팽 (兎死狗烹)’ 당한 것이었다.


이후 5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스탈린도 사망하게 되고 소련 측은 남은 전쟁 포로들을 귀환 시키는데 서독과 합의한다. 최종적으로 자이틀리츠를 포함한 잔존 포로 만 여명이 귀환하게 되고 서독 국민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 했지만 이미 전쟁 때부터 배반자로 낙인 찍혔던 자이틀리츠를 환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의 상관이었던 파울루스 원수는 2년 전인 1953년에 동독에 정착한다.) 오히려 그는 임시 수용소에서 조차 동료 포로들에게 무시와 배척을 당했고 오직 그의 아내와 가족만이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을 뿐이었다. 전쟁 전 거주했던 페르덴으로 귀향한 후에도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친지들이 거주하는 북독일의 브레멘으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조용히 회고록을 집필하며 칩거하는 생활을 이어 가던 중 1976년 8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회고록은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다.


전형적인 프로이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조국 독일을 위해 싸웠으나 포로가 된 이후 독일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적 편에 서서 배신자의 낙인을 받은 사람. 너무나도 극단적인 양편에 서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그가 느꼈을 생각과 추구했던 신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오직 그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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