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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5. 2021

찬드라 보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다

인도의 정치가/독립운동가 (1897~1945)


수바스 찬드라 보스

동부 인도의 상업 중심지인 ‘콜카타’ (캘커타)는 상주 인구 약 1,400만 명으로 세계적으로도 그 규모가 손꼽히는 도시이다. 이 거대한 메갈로폴리스의 관문은 바로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국제 공항’이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불리는 곳 인데 어느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현지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독립 운동가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이 공항은 원래 1900년 대 초에 ‘캘커타 애어로돔’으로 개장을 했고 한 때 유럽 국가들로부터 동남아의 식민지들로 이동 하는 중간에 위치한 중요한 항공 기착지였다. 2차 대전 때는 연합군의 폭격기들이 주둔하며 인도 국경으로 진군 하려는 일본군을 압박했고 인도가 독립 된 이후에는 여러 차례 확장을 거듭 했는데 1995년에 국내 터미널을 신설 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공항 이름 앞에 붙은 ‘네타지’라는 명칭은 힌디어로 ‘지도자’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 정치가의 이름은 ‘수바스 찬드라 보스’이며 그 긴 이름만큼이나 기구하고 다양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인도 독립의 영웅이지만 네루나 간디와는 달리 ‘대영제국’의 적국과 협력하여 인도의 독립을 성취하려 하였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선 그가 태어난 19세기 말의 인도로 가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의 엘리트 청년

찬드라 보스는 인도 동부 뱅골 지방의 쿠탁에서 1897년 1월에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인 ‘자나키나트 보스’는 자수성가한 변호사이자 영국 식민지 정부의 지방 법무 행정관이었다. 찬드라 보스의 가족은 엄청난 대가족이었고 그를 포함하여 무려 14명의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는 9번째이자 6번째 사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형 중에는 훗날 인도 독립을 위해 그와 함께 헌신하게 되는 ‘사라트 찬드라 보스’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많은 신경을 썼는데 이들이 식민지 인도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교육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찬드라 보스 역시 그의 형제들을 따라 쿠탁에 있는 기독교계 유럽 학교에 진학한다. 이 곳은 당시 인도에 있던 영국인들의 자녀나 인도의 상류층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였고 학교 수업 자체도 영어로서 이루어졌다. 기독교 학교답게 라틴어나 성경 등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 졌고 학생들은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 방식을 따르도록 훈육 되었다. 보스의 부모는 이곳에서의 교육을 통해 그의 자녀들이 완벽한 영국식 영어와 상류층의 매너 및 인맥을 만들기를 기대했고 영국 식민 통치 하의 인도에서 자기와 같은 현지인 엘리트로서의 길을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보스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그들 가족은 철저히 뱅골어를 사용했고 그의 어머니로부터 인도의 신화 및 전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과 가정 환경을 통해 그는 서양 문화 및 언어에 익숙하게 된 동시에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상급학교에 진학 할 시기가 된 1913년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형제들이 선택한 콜카타의 명문인 ‘프레지던시 칼리지’로 진학하게 된다. 순탄했던 그의 학교 생활은 1916년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급격한 반전을 맞게 되는데 내재된 ‘반골 기질’이 드러난 탓인지 수업 중 인도인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을 쓴 영국인 역사 교수의 폭행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에서 이 사건은 상당히 엄중하게 다뤄지게 되었고 ‘교내 조사위원회’까지 구성 되는데, 찬드라 보스는 폭행 가담자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퇴학 위기에 처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보수적인 그의 집안에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고 그의 아버지는 여러 인맥들을 동원하여 그의 퇴학을 막아보려 하지만 그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결국 콜카타 내 ‘스코티시 처치 칼리지’로 옮겨서 학업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는 이 곳에서 1918년에 철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게 되고 다음 진로를 고민하게 되는데 아버지의 조언을 수용하여 ‘인도 식민지 고등 행정관’ 시험에 응시하고자 한다.


행정관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그는 1919년 10월 영국 런던으로 가게 되고 곧 이어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는다. 식민지 출신인 그가 이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식민지 인도에서 영국 지배의 주체로서 출세와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의미이지만 그만큼 합격하기 대단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타고난 두뇌와 노력으로 1920년에 1차 시험에 무난히 합격한 그는 2차 시험을 준비하며 인도 형법, 역사 및 언어 등의 수험 과목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엄청난 도약을 목전에 둔 그의 마음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선 당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모습과 식민지 인도의 비참한 생활이 오버랩 되었는데 여기에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등이 더해 지면서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심도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영국의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안락하고 보장된 삶은 타고난 ‘반골이자 투사’인 그에게 맞지 않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고향의 아버지나 인도의 지인들과 의견 교환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행정관 시험’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921년 6월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청년 찬드라 보스는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마침내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오르게 된다. 24살의 식민지 출신 엘리트 청년에서 이제 막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아 가려고 하는 그 세상은 생각 하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 일어서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간디와 담소를 나누는 찬드라 보스

정치계에 입문 하다

인도로 돌아온 찬드라 보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위대한 비폭력 운동의 지도자인 ‘모한다스 간디’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 당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인도를 넘어서 국제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기 시작하는 과정 이었다. 하지만 간디와의 만남은 보스에게 다소 실망을 안겨주게 되는데 일단 보스는 간디에게 인도 독립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 및 실행 방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간디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 실행 대안 없는 무조건적인 불복종은 영국인들을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미흡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 이었다. 보스는 영국과의 투쟁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을 실행 하고자 했다. 비록 그것이 폭력 및 살인을 수반 한다고 해도 말이다.


한편, 이러한 보스의 열정을 눈 여겨 본 이도 있었는데 바로 같은 동향인 뱅골 출신의 ‘치타 란잔 다스’와 같은 이들이었다. 변호사이자 인도국민의회의 일원이었던 다스는 보스와 같은 엘리트 유학파 출신의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필요로 하였고 이들의 후원자로서 그를 인도 민족주의의 길로 인도하였다. 이후 보스는 짧은 시간 안에 인도 정치계의 기린아로 떠오르게 된다. 1923년에 ‘전 인도 청년회의’ 의장이 된 것을 필두로 언론 일에도 참여하고 1924년에는 콜카타 시장이 된 다스와 함께 콜카타 시정 업무의 책임자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행보를 통해 그는 인도 정치계는 물론 영국 식민지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25년 영국 식민지 당국은 인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단속을 실시하게 되는데 보스는 지하 혁명 조직과의 연관 혐의를 받게 되고 결국 영국령 버마 맨달레이의 감옥으로 유폐 된다. 이후 출옥한 그는 1928년에 그는 인도국민회의를 개최 하는데 여기에서 이른 바  ‘뱅갈 지원군’을 조직하고 그 지휘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보스는 이 자리에서 본인이 자체 제작한 화려한 군복까지 입고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영국 식민지 당국에게 인도국민의회가 마치 하나의 군대까지 보유한 사실상의 국가 조직과 같다는 ‘무언의 압박’이 되었다. 뱅갈 지원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보스가 옥중 당선 되어 콜카타 시장이 된 1930년 이후 뱅갈 지원군은 사실상 보스의 전위대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과는 확연히 다른 인도 독립에 대한 실제적인 행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주요 목표는 인도인들에 가혹하게 대했던 영국 식민 통치의 주요 인물들 이었다. 이들은 무장하기 시작했고 1930년 12월에는 콜카타 주정부 건물 (Writer’s building) 에 난입해 인도인들을 박해 했다고 여겨지는 영국 식민지 관리들을 사살하고 자신들도 목숨을 끊었다. 이것은 영국 식민지 당국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고 1930년대 내내 계속 될 저항의 신호탄이었다. 영국인들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간디와는 다른 부류의 인도인들이 등장 했다는 것에 내심 긴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찬드라 보스’가 있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다

영국 식민지 당국에 의해 체포와 감금을 반복한 보스는 폐병으로 고생 하고 있었고 병보석을 허가 받아 1933년 3월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떠나게 된다. 겉으로는 병 치료를 핑계로 인도를 떠나가는 모양새였지만 사실상의 정치적 망명이었고 영국 당국에게는 가장 큰 골치거리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곳 비엔나를 본거지로 ‘인도 독립 운동’을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리려 했고 자신을 마치 인도 망명 정부의 대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1935년에 그는 인도 독립 투쟁의 주요 이정표를 정리한 ‘인도의 투쟁’ (Indian struggle) 을 출판하게 되는데 이 책이야말로 인도 독립에 대한 지금까지의 제반 활동 및 향후 그가 생각하는 방향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의 책은 유럽에서는 식자 층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조국인 인도에서는 영국 당국에 의해 1948년 독립 때까지 금서로 지정 되었다. 그는 이 책을 만들면서 ‘에밀리 쉥클’이라는 오스트리아 여인을 비서로서 고용해서 타이핑 및 정서에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둘은 일을 함께 해나가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 커플은 결국 1937년에 비밀리에 결혼하게 되고 훗날 둘 사이에 딸을 하나 두게 된다.


찬드라 보스의 아내이자 비서였던 에밀리 쉥클

1934년 말에 보스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인도에 귀국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그는 잠시라도 그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영국 식민 당국을 피해 정신적인 아지트인 오스트리아로 돌아온다. 인도에서 오스트리아로 오는 도중 그는 이탈리아 로마에 들러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저서인 ‘인도의 투쟁’을 전해주며 인도인들의 강한 독립 열망을 전파하는데 주력한다. 1937년에는 알프스 산자락의 ‘바트 가슈타인’에서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인도인 순례자’ (An Indian pilgrim)를 저술하게 된다. 유럽에서의 생활을 통해 보스는 건강을 회복했고 인도 독립의 열망을 유럽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전달 했을 뿐만 아니라 ‘찬드라 보스’라는 인물에 대한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했다. 더불어 사랑하는 이까지 얻게 되었다.


1938년 1월이 되자 보스는 인도 국민 의회의 차기 의장으로서 선출된다. 인도로 귀국한 그는 대영제국에 대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일 것을 분명히 했는데 여기에는 ‘폭력의 사용’도 포함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비폭력주의자인 간디에 대한 명백한 도전 이었고 심지어 그의 편이었던 네루마저 그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전인도 전진동맹’ (All India Forward Bloc) 이라는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고 이들과 결별한다. 이제 인도의 독립 투쟁을 위해 오로지 그 혼자 서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1939년 9월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당시 인도 총독은 종주국인 영국을 따라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언 하는데 이것은 보스를 비롯한 인도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게 된다. 인도 국민의회에 대하 사전 동의나 양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스는 즉각 콜카타에서 대규모 반영 항의 집회를 지시하게 된다. 하지만 전시 하의 영국 식민당국은 거칠 것이 없었고 보스는 즉각 투옥된다. 감옥 내에서 단식 투쟁을 주도하기도 한 그는 일주일 만에 석방 되지만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전시 하의 인도는 그에게 더 이상 투쟁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는 1941년 1월 17일 야밤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변장을 한 후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기차를 타고 인도 북부로 이동한다. 이후 그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로 이동하는데 현지 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벙어리인 척 위장하여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는다. 국경을 넘은 후 ‘독일대외정보기관’ (Abwehr)의 지원을 받아 소련으로 입국하게 되고 현지 독일 대사관이 마련한 특별 항공편으로 종착지인 독일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우방이었다.) 드디어 그가 구상해 오던 대영제국에 대한 실질적인 무장 독립 투쟁이 구체화 되려는 순간이었다.


1941년 4월 초 독일에 도착한 보스는 나치 당국의 특별한 관심 속에 외교부 내 ‘인도특별사무국’ 소속으로 제반 지원을 받게 된다. 사실 이 조직은 보스의 제안으로 설립된 곳으로 그는 대영제국에 반대하는 많은 인도인들을 통한 투쟁이 가능하다고 독일 당국을 설득했고 그에 대한 지원책으로서 마련 된 곳이 바로 이 인도특별사무국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보스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는데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비롯한 나치지도자들에게 대영제국을 무너뜨릴 그의 구상을 열정적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5월에 자유인도군 (Legion Freies Indien)이 창설 되며 그 정점을 찍게 되었다. 그가 인도의 독립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무기가 생긴 것이다.

 

독일군 소속의 자유 인도군

자유인도군의 창설과 그 한계

자유인도군 (독일군 정식 편제 상에는 ‘제 950 보병 연대’)는 초기에는 독일 거주 인도인 학생이 주축이었지만 곧 그 다수가 영국군의 일원으로 주로 북아프리카 전선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된 인도군들이 주축이 되었다. 최초의 인원들은 ‘토브룩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인도군 이었는데 독일은 이 중 선발된 인원을 독일로 이송하고 마침내 이들은 보스와 조우하게 된다. 지원자가 늘어남에 따라 독일은 이들의 베이스캠프로서 동부 작센주의 ‘쾨니히스브뤼크’를 낙점하고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게 된다. 독일군 군복과 무장에 자유인도군 소속임을 나타내는 호랑이가 들어간 방패 문양이 이들의 상징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1만 5천여명의 인도군 포로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4,500여명의 인도군이 이 자유인도군에 가입하게 된다. 독일 당국은 대외적으로 1942년 1월에 이들의 창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되고 독일 정부가 이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후원 할 것임을 널리 선전했다


이후 1942년 여름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소련의 코카서스 및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쾌속의 진군을 하고 있었으며 북아프리카의 롬멜 장군 휘하 아프리카 군단도 영국군을 동쪽으로 밀어 붙이며 수에즈 운하를 점령할 기세였다. 독일군이 다가오자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는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고 문서 태우는 연기가 사방에 가득 했다. 이러한 전쟁의 추이는 보스가 바라는 독일군과의 연합된 인도 진공이 다가오고 있다는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 하지만 11월에 북아프리카 엘알라메인에서 롬멜 군단이 패퇴하고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6군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의해 역포위 되는 엄청난 반전이 일어 나며 전쟁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보스가 간절히 원하던 독일군과의 연합 인도 진공은 말도 꺼내기 힘든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불가능할 듯이 보였다. 그로서는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주독일본대사인 ‘히로시 오시마’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주목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유럽 및 아프리카 전선에서 수세에 몰릴 이 시기에 동쪽의 태평양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미 1942년에 태평양 및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석권한 일본군이 버마까지 점령하며 조국인 인도의 코 앞까지 진군해 있었다. 비록 1942년 6월에 일본 연합함대가 미드웨이에서 항공모함 4척을 상실하는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아직도 전세가 뒤바뀌었다는 인식은 크지 않았고 여전히 미국과 일본 양군은 과달카날 섬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보스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군은 조국 인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일본군은 인도 국경 근처에 있었다. 이제 그가 가야 할 선택의 길이 분명해졌고 보스는 추축군과의 협의를 통해 아시아로 갈 것을 결심한다. 1943년 2월 보스는 독일군 잠수함을 타고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부의 마다가스카르 앞바다에 도달한다. 그는 이곳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 잠수함 I-29호에 탑승하게 되고 또 하나의 도박에 자신의 운명을 걸게 된다.


한편, 독일에 남아있던 자유인도군은 유럽에서 특별한 전투에 투입 되는 일 없이 네덜란드 및 프랑스의 대서양 방벽을 방어하는 임무만 수행하게 되는데 결국 전후 연합군 측에 체포되고 인도로 송환되어 반역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된다.

인도국민군을 사열 중인  찬드라 보스

자유인도임시정부의 수반

일본 잠수함을 통해 원거리 항해를 한 보스는 1943년 7월에 싱가포르에 도착한다. 그는 기존에 구성되었다가 사실상 와해 되어버린 ‘인도국민군 (INA)’의 통수권을 인정 받게 되고 이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도국민군은 전투 초기인 1941년 12월에 말레이 전역에서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영국군 소속 인도군 장교 ‘모한 싱’을 중심으로 구성이 된다. 그는 일본 군정보기관 출신의 ‘후지와라 이와치’ 소좌에게 포섭 되는데 싱가포르에서 포로로 잡힌 인도군을 대상으로 인도국민군에 가입 하도록 권유했고 최종 약 4만여명이 동참한다. 하지만 인도군을 단순한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쓰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알게 되었고 이들과 불화를 겪은 후 1942년 12월에 1차 인도국민군은 사실상 해체 된다. 이러한 와중에 보스가 싱가포르에 도착 한 것이다.

저명한 정치가인 보스가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바뀌게 된다. 1차 인도국민군에 가입하지 않던 포로들 및 싱가포르 내 인도 민간인들까지 적극 인도국민군에 가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2차 인도국민군은 대략 4만명으로 추산 되는데 보스, 간디, 네루 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딴 3개의 여단과 ‘아자드’ (자유)라 불리는 1개 여단 등 총 4개의 여단과 기타 부대 등으로 구성 되었다. 부대 중에는 거의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된 ‘라니 잔시’(인도의 반영 투쟁 여성 지도자의 이름에서 명명) 연대도 있었는데 주로 동남아 거주 인도인 여성으로 구성 되었고 전투 임무도 기꺼이 수행했다.


보스의 다음 단계는 인도인의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는데 1943년 10월에 비록 인도 본토는 아니지만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자유인도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 임시정부는 독일, 일본, 무솔리니 하의 이태리, 만주국 및 크로아티아 등 추축국 편에 있는 나라들로부터만 인정을 받게 된다. 당시 인도 동부의 안다만 제도를 일본군이 점령한 상황이라 형식상 임시정부 영토에 편입 되었지만 실권을 휘두를 수는 없는 명목상의 영토였다. 더불어 고유의 사법제도, 화폐 및 우표 등도 발행하여 겉으로는 정부로서의 모습을 과시하려 했다.


대동아 공영권 회의에 참석한 찬드라 보스 (오른쪽에서 첫번째)

1943년 11월 보스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공영권 회의’에 참석해서 비슷한 꼭두각시 정권들의 지도자들과 만나게 된다. 중국 남경정부의 ‘왕징웨이’, 만주국의 ‘장징후이’ 그리고 필리핀의 ‘호세 라우렐’ 등이었다. 비시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대표들은 초청되지 않았다. 일본의 소위 대동아공영권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아시아 민족들이 투쟁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자고 소리 높였지만 현실은 미영의 자리를 일본이 대신 할 뿐이었다. 겉으로 얘기는 안 했지만 보스나 다른 국가 대표들도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었고 다만 자신의 독립과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가 꿈꾸던 영국령 인도에 진군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군이 드디어 작전을 개시한 것이었고 그 장소는 인도 동부에 위치한 ‘임팔’이었다.  

 

패배 그리고 종말

1944년 3월 일본군은 ‘우호 작전’을 개시하며 인도 동부 아삼 지방의 임팔과 코히마에 대규모 진격을 개시한다. 임팔, 코히마는 인도 동부와 중국을 연결하는 축선 상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곳은 중국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레도 공로’로 연결되었다. 즉, 이 곳을 점령하면 중국을 외부로부터 차단 시키고 인도의 뱅골 지방으로 진군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작전이 성공만 한다면 일본에게는 인도를 해방 시킨다는 명분도 쌓고 이후 전력을 동쪽의 미군에 집중 할 수 있다는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구상 이었다.


 임팔 전투를 지휘한 알본군의 무다구찌 렌야

한편 연합군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주공인 일본군 15군 총사령관이 무능하기로 소문난 ‘무다구찌 렌야’ 였다는 점이다. ‘루거오차오 사건’을 통해 중일전쟁을 촉발시킨 장본인이었던 그는 “보급은 현지에서 해결한다”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계획으로 작전을 개시한다. 문제는 보스의 인도국민군이 이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된 것이다. 인도군들은 드디어 조국으로 진군한다는 사실에 많은 기대를 했고 사기도 높았으나 막상 친드윈 강을 건너 진군 하고 보니 빽빽한 정글과 세계 최고 수준의 습도 및 강수량을 자랑하는 곳에서 보급선도 무너져서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공세는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으며 제공권과 화력을 장악한 연합군의 맹공 앞에 일본군과 인도국민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국군 수송기가 잘못 투하한 식량이나 보급품을 소위 ‘짜찌루 급여’ (처칠의 일본식 발음)라 부르며 자신의 근접거리에 들어 오기만 바라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시간이 흐르며 6월 말이 되자 잔존 일본군은 문자 그대로 뼈와 가죽만 남아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상황이었는데 총 일본군 사상자는 무려 6만명이 넘었다. ‘임팔-코히마’ 전투는 그때까지 일본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였고 인도 본토 공략에 실패한 보스에게도 뼈아픈 실패로 다가왔다.


이후 인도국민군은 버마 일대에서 일본군을 지원하며 버텼는데 1945년 5월 버마의 랑군이 연합군에 점령된 이후는 보스의 자유인도임시정부와 함께 사실상의 활동을 마무리하며 태국의 방콕으로 후퇴한다. 이곳까지 이동한 그의 휘하 병력은 과거 전성기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는데 5월 8일 독일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제 일본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후 8월 9일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과 일주일 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들은 그는 과거 제휴를 모색했던 소련으로 이동해 반제국주의 및 반영투쟁을 지속 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8월 16일에 싱가포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중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에 들르게 되는데 여기서 일본 남방군 총사령관인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를 접견한다. 그는 데라우치에게 소련으로 갈 수 있도록 지원 할 것을 요청했고 보스와 인간적인 교분이 있었던 데라우치는 항공편을 준비해주었다. 보스를 태운 미쓰비시 Ki-21 중폭격기는 사이공을 벗어나 타이완의 타이호쿠 (오늘 날의 타이페이)에 기착하고 이후 중국의 대련 및 최종 만주를 목표로 출발 하지만 이륙 직후 기체가 화염으로 휩싸이며 폭발한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보스는 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온몸을 붕대로 감은 상태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유골은 곧 화장 되었는데 9월 초 한 일본군 장교에 의해 도쿄로 옮겨지고 최종적으로 도쿄의 ‘렌코지 사찰 (蓮光寺)’에 안치 된다. 워낙 극적인 인생을 살다 가서인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심지어 생존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으나 대부분 거짓으로 판명 되었다.


그와 함께 인도국민군에 참여했던 병사 및 장교들은 조국인 인도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일단 영국이 인도에서 식민 통치를 끝내려는 상황 및 인도인들의 동정적인 여론이 더해져서 대부분 처벌 받지 않게 되었다.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는 네루는 전쟁 중 영국의 전쟁 수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당시 이들의 변호인 역할을 했다.


찬드라 보스는 비록 편을 잘못 선택했지만 여전히 많은 인도 국민들에게 독립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들에게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투쟁’과 보스의 ‘무장 투쟁’은 모두 자랑스러운 인도 독립 투쟁의 일부이다. 보스가 현대의 인도에 살아 있다면 그는 과연 어떤 국제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될까?  하나 분명한 것은 조국의 이익을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명제를 충실히 이행 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과거의 적일 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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