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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4. 2021

안드레이 블라소프, 악마와 악마 사이의 고뇌

소련의 군인 (1901~1946)

안드레이 블라소프

영화 007 시리즈 중 1995년에 제작된 ‘골든 아이’는 탈냉전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첫 번째 007 영화 이다. 극중 악당은 007의 전 동료 정보요원 야누스 (006)인데, 그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영국정보국에 복수하기 위해 신무기인 ‘골든아이’를 탈취하려 한다.  야누스의 아버지는 과거 2차대전 당시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독일 측에 전향하여 소련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종전 후 연합군과 소련의 얄타 협정에 따라 소련 측에 강제 송환되고 처형 된 것으로 소개 된다.


이는 단순히 영화적인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유럽 전의 종전 당시 많은 구소련 소속 병사 및 장교들이 독일 측을 위해 싸웠고 이들은 종전 후 소련에 송환 될 시 처형 될 것임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서방의 미군과 영국군 측에 항복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 구소련인들의 운명에 대해 연합군은 이미 소련과의 얄타 협정을 통한 가이드라인을 정해 놓은 상태였으며 이들 대부분을 소련 측에 인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제 많은 이들이 처벌을 받게 되고 심지어는 소련 측에 넘겨지기 전에 자살을 택한 사람도 있다. 지금부터 살펴 볼 사람은 바로 이러한 가혹한 운명에 내동댕이친 구소련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늘날까지 국가별로 그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사람이다.             


유능한 군인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러시아 이름 중 가운데는 아버지의 이름이다. 즉, 이 사람의 아버지도 안드레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의미이다.)는 1901년 러시아 서부의 ‘니즈니 노브고로드’주 로마키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신실한 신앙을 가진 나름 부농에 속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의지에 따라 신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학업을 그만 두게 된다. 이후 1919년에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에 입대하게 되고 본격적인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남부의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크림 반도 등에서 전투를 겪으며 탁월한 용맹성과 리더십을 인정 받게 되고 붉은 군대의 장교가 된다. 적백 내전이 끝난 후에도 계속 군에 남아 있었고 1930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한다.


1935년에는 소련군의 장교 육성 기관인 ‘프룬제 사관학교’에 청강생 자격으로 입교하게 된다. 이후 스탈린의 독재가 강화 되고 1937년부터 대숙청이 시작 되면서 소련군 장교단 및 지휘부가 초토화 되는데, 대숙청이 어느 정도로 심했냐 하면 1935년 소련방 원수 계급을 달고 있었던 5명 중 이 기간 동안 3명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당할 정도로 소련군의 지휘 체계를 뿌리째 흔들어 놓게 된다. (사망자 중의 한 명이 바로 소련판 전격전인 ‘종심타격’ 이론의 주창자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이다.) 하지만 블라소프는 오히려 군사재판단의 일원으로 이러한 ‘피의 숙청’을 피했고 오히려 1938년 가을에는 소련군 내 엘리트 코스로 여겨졌던 해외 군사고문단의 일원이 되어 장제스 영도 하의 중국에 파견 된다. (그의 후임자가 훗날 스탈린그라드의 영웅이 되는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이다.)


귀국 후 1940년 1월에는 제 99저격사단의 사단장이 되는데 그의 부대는 국방인민위원인 ‘세묜 티모셴코’로부터 ‘최고의 붉은 군대 부대’로서 극찬을 받았다. 문자 그대로 그는 승승장구하며 장래가 주목되는 소련의 엘리트 장교였다.

 

소련 서부의 마을을 공격 중인 독일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독일군은 148개 사단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하는 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다. 1939년 겨울에 벌어진 소련과 핀란드와의 겨울 전쟁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어이없는 졸전을 보며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는 소련군 및 지휘 계통이 가벼운 외력만 가해도 쉽게 무너질 대단히 허약한 체제로 보았다. 실제로 독일군은 초기 수개월 간 소련방 내부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속도로 맹렬히 진격했다. 거대한 규모의 독일 및 동맹군은 중부, 북부, 남부의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진군을 시작 했는데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목표로 각각 맹공을 퍼부었다.


독소전 개전 당시 블라소프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소속 제 4기계화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총 2만 8천명의 병력 및 1,000여대의 전차를 보유했고 이중 절반 가량이 특유의 경사 장갑을 가진 T-34/76 및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KV-1 전차로 구성 되어 우크라이나 내 소련군 중 가장 강력한 전력 임을 자신했다. 이들은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 이전 ‘최대의 전차전’이라 알려진 ‘브로디 전투’에 투입 되는데 독일의 명장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장군 휘하 독일 ‘제1 기갑집단’의 집중적이고 신속한 전술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7월 초에는 보유했던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 제 37군을 지휘하게 된 그는 1941년 8월에 1차 키예프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모든 러시아 도시들의 어머니’인 이 곳을 두고 독일군은 핵심 전력인 중부집단군 소속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 하는 ‘2기갑집단’까지 남진 시켜가며 소련군을 거칠게 몰아 붙였고 결국 소련군 65여만명을 포위, 섬멸하게 된다. 우세한 독일군의 덫에 갇힌 블라소프는 전황이 가망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병력에게 분산하여 독일군의 포위망을 탈출하도록 지시했고 자신도 겨우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남쪽의 위협을 모두 제거한 독일군은 이제 모든 창 끝을 모아 소련의 심장이자 중추인 모스크바를 겨누며 독소전의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드디어 모스크바 공략 작전인 ‘타이푼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의 혹한 속에 이동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독일군

모스크바의 수호자

1941년 10월 1일 독일군은 192만명의 병력을 통해 고유의 ‘이중 포위’ 작전을 구사하여 수도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소련의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10월 2주차부터 러시아의 가을 장마인 ‘라스푸티차’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면서 대부분의 도로가 진흙투성이가 되고 사람도 차량도 이동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당시 독일군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진흙의 바다’에 빠진 꼴이 되었다.


이후 가을 비는 그치지만 11월부터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예년보다 빠른 늦가을 추위가 찾아오며 독일군의 모든 장비를 얼려 버린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이후 여름 군복 만으로 버텨온 독일군에게 1941년 러시아의 추위는 도저히 인간이 감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동상으로 전쟁을 이탈했고 총신의 그리스가 얼어서 발사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차량의 부동액 마저 얼어 독일군의 장기인 신속한 전차 기동이 힘들어 진다. 더불어 보급이 어려운 상항에서 전선에 겨우 도착한 수프는 채 떠서 입에 넣기도 전에 얼어 버렸다. 이 때 가혹한 날씨와 더불어 소련군을 구해 준 또 하나는 바로 ‘리하르트 조르게’라는 독일인이지만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소련의 일급 스파이였다. 그는 일본 도쿄에 주재하는 독일 신문기자로 위장하여 일본 주재 독일 대사와의 친분을 통해 많은 정보를 빼돌렸다. 특히, 독소전 개전 이후 독일은 일본으로 하여금 소련의 시베리아 지역을 공격하여 소련군 병력이 동서 양 전선에 분산 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르게는 일본이 독일의 바램과는 반대로 시베리아가 아닌 남쪽의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를 공격 하려 한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여 모스크바에 타전한다. 이를 통해 소련은 시베리아에서 단련된 18개 사단의 노련한 병사들을 가까스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 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다가오는 기운데 붉은 광장에서 퍼레이드 중인 소련군

이때가 소련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었고 스탈린마저 한 때 동쪽의 쿠이비셰프로 수도를 옮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모스크바를 사수하기로 결의를 다지게 된다. 11월 7일 독일군이 진격해오는 동안 붉은 광장에서 보란 듯이 혁명기념일 퍼레이드를 실시했는데 이 부대들은 행진 후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어야 할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이 때 블라소프는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휘하 서부전선군의 ‘제20군’ 사령관으로서 모스크바 방어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의 20군은 전선의 중심에 서서 독일군의 공세를 지연시켰다. 특히, 12월 5일 이후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을 주도했는데 12월 12일에는 모스크바 인근 ‘솔네크노고르스크’를, 12월 20일에는 ‘볼로코람스크’를 재탈환 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독일군을 격퇴하게 된다.


이러한 활약을 통해 그는 소련방 최고 무공 훈장인 ‘적기 훈장’을 수여 받게 되고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연일 모스크바의 수호자로서 칭송 받게 된다. 이러한 소련군의 반격을 통해 독일군은 근 100km 이상을 후퇴했으며 곳곳에 고립되어 와해 되었다. 한때, 모스크바 성당의 황금색 첨탑이 보일 정도로 소련의 수도에 가까이 접근했던 독일군은 이후 다시는 모스크바 근처에 올 수 없었다.

 

독일군에 투항하는 소련군

3 제국의 포로

극적으로 모스크바의 방어에 성공한 스탈린은 승리에 도취되어 1941년 1월 7일 전전선에 걸친 전면적 공세를 지시한다. 특히, 독일 18군에 의해 지속적으로 포위되어 극심한 인명 손실을 보이고 있던 혁명의 도시 ‘레닌그라드’를 구하기 위해 이제 막 강제수용소에서 석방 된 ‘키릴 메레츠코프’ 장군을 투입한다. 그는 스페인 내전과 핀란드와의 겨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군인이었는데 볼호프 전선군을 이끌면서 독일군을 공략하여 포위된 도시를 구하려 한다. 휘하의 제 52군 및 제2충격군이 거센 진격을 통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적 후방 70km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곧이어 태세를 정비한 독일군의 역습을 받게 되고 도리어 제2 충격군이 역포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극도로 불리한 전황 속에 블라소프는 볼코프 전선군의 부사령관이자 제 2충격군 지휘관으로 임명 된다. 하지만 그가 현장에 투입 됐던 1942년 3월에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패배를 단지 며칠 지연 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결국 6월 말에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가 이어지자 장기간 포위되어 있던 제 2충격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블라소프는 항공편으로 탈출 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결국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게 된다. 스탈린은 자신의 아들이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자 음모가 있다며 며느리마저 투옥 시켰던 인물이었다. 전쟁 중 포로로 잡히게 된 모든 소련군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국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았는데 블라소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가 스탈린에 대한 반감에서 독일군에게 협력 하게 된 이유로는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이후 블라소프에 대한 모든 공적과 상훈들은 소련군 공식 기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독일군복 차림의 블라소프

악마와 손잡다

독일군의 포로가 된 블라소프는 초기부터 독일군에 적극적으로 협력 할 의사를 밝혔다. 그가 반소련/스탈린 세력으로 돌아서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스탈린의 대숙청을 들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스탈린의 대숙청 및 이전의 홀로도모르 (집단 농장화에 반대하는 부농들을 제거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인위적으로 야기된 대기근 사태. 최대 우크라이나인 700만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짐)통해 소련 사회와 군부는 해체 수준의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일련의 극악무도한 테러를 통해 수백만 명의 소련 인민들이 투옥 되고, 고문을 받거나 살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희생자 중에는 굴라그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바로 블라소프 본인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방을 수호하고 스탈린에 충성을 다했던 엘리트 군인이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어가는 일련의 사태 속에 블라소프는 크게 고뇌하게 되었고 마침내 적의 편에 서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포로가 된 얼마 후 그는 반스탈린 편에 서서 투쟁 하고 독일에 협력하겠다는 메모를 전달한다. 이에 대해 친위대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나 나치 이론가인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처럼 그의 이용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독일인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히틀러가 이러한 제안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는 어떠한 형태의 러시아인 포로들로 구성된 부대 구성에 반대한다. 그러는 한편 블라소프는 독일군의 다양한 선전 활동에 참여 하게 되는데 반소련 및 반공적인 문구로 가득찬 ‘스몰렌스크 선언문’이나 “나는 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가?” 등의 2장짜리 팜플렛을 작성하여 소련군 전선에 대대적으로 살포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스탈린과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자유 러시아’를 건설하는 것이었던 반면 나치는 러시아인을 노예로서 착취해야 할 인간 이하의 하등 동물 (Untermenschen)로 간주했다. 양 측은 시작부터 지향점이 달랐고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단지 상대편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 정확한 시대적 해석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증하는 사례가 바로 ‘프스코프 사건’ 인데 당시 독일군 점령지였던 러시아 북서부의 프스코프에서 블라소프는 친독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였는데, 소련 땅에 들어온 독일인들을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으로 표현했다. 이는 히틀러의 엄청난 격노를 야기했고 블라소프는 한 때 가택연금에 처해지기도 한다.


한편, 블라소프의 반소 활동과는 반대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황은 점점 독일 측에 불리해져 갔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붕괴 이후 동년 7월에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또 다시 패하며 동부 전선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1944년 1월에는 900일간 포위 되었던 레닌그라드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 된다. 그리고 1944년 6월에는 독일군에게 사망 선고나 다름 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 하는데 우선 서부 전선에서는 6월 6일에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며 유럽 제 2전선을 만들었다. 또한 동부 전선에서는 6월 22일에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 (스탈린은 일부러 독일이 침공한 3년전과 같은 날을 택일했다.) 을 통해 독일군의 핵심인 중부집단군을 궤멸 시킨다.


이처럼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블라소프의 반소 세력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던 히틀러조차 한 명의 병사가 아쉬운 상황에서 그의 의견을 받아 들이고 독자 군대를 편제하고 무장 하도록 허가한다. 이로서 같은 해 9월에는 드디어 자유러시아군 (ROA)이 공식적으로 편성된다. 사실 그 이전에도 소련 출신의 많은 지원자들 (Hilfswilliger)이 독일군 편에서 싸웠다. 하지만 주로 후방 지원 같은 비전투업무 또는 점령지의 게릴라 소탕 등의 2선급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 러시아 군단이 바로 전투에 투입 된 것도 아니었고 1944년 11월에 블라소프가 주도하는 괴뢰 국가인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가 생긴 후에 급물살을 타게 된다.

자유 러시아군은 2개의 사단으로 구성 되었는데 형식상으로 제 15 코사크 기병 군단을 포함 하는 등 기존의 제 3 제국 내 있던 소련 출신의 병력들을 추가하게 된다.


마침내 운명의 해인 1945년이 되자 소련군은 폴란드를 거쳐 독일 본토까지 위협하는 형국이 된다.  4월 중순에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오데르-나이세 강’ 앞에 포진하며 나치 독일과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이곳에 투입된 자유 러시아 군단은 잠시나마 친위대장 힘러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선전 했으나 거대한 파도와 같이 몰려드는 소련군의 화력 및 병력을 막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블라소프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결국 그의 병력을 이끌고 남쪽의 체코로 이동 하기로 결정 한다. 이미 체코 일부에 진주한 미군에 항복해서 그와 그의 부하들이 소련에 송환되는 것을 막아 보자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블라소프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연합국들의 합의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 되었다는 사실이다.

 

프라하를 해방한 소련군 이반 코네프 원수를 환영하는 시민들

쓰라린 종말 

5월 초 자유 러시아군이 체코의 프라하에 도착 했을 때 이미 도시는 1939년 이후 6년 간의 독일 지배를 끝장 내려는 파르티잔 및 체코 민병대들로 넘쳐났다. 많은 독일 거류민들이 블타바 강에서 복수에 불타는 체코인들에 의해 살해 당했는데 현지에 있던 독일 무장친위대도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와중에 블라소프의 자유 러시아군은 다시 한번 말을 갈아타게 되고 체코 파르티잔과 함께 독일군에 대항해서 싸우려 한다. 어차피 전쟁은 종결 될 것이었고 종전 후 최대한 관대한 조건으로 미군 측에 투항 하기 위해 선택한 결정 이었다. 하지만 체코 파르티잔은 기본적으로 좌익 성향이었고 소련 공산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비록 전투에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나치 부역자였던 자유러시아군을 같이 싸운 동료로서 따뜻하게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블라소프 군은 프라하 외곽에 있던 이반 코네프 원수 휘하의 1우크라이나전선군이 입성하기 전에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고 패튼 장군의 미 3군에 항복했다.


자유 러시아군 수천 명이 미군 감시 하에 있게 되었지만 이들은 이미 2월에 미영 측과 소련 사이에 합의된 얄타 협정에 의해 소련으로 송환 될 처지였다. 얄타 협정에 따르면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1일을 기점으로 기존 소련 국민이었던 사람들은 다시 소련으로 돌려 보내져야 했다. 이러한 자유 러시아군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일부 미군 장교들은 이들 중 일부 인원이 소그룹을 지어 서쪽의 미군 지역으로 도망 치는 것을 모른 체 눈 감아 주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원들은 결국 체코 플젠 인근에서 소련군 25전차군단에 붙잡히고 말았다. 블라소프는 190센치미터에 달하는 그 큰 키와 안경 때문에 바로 노출이 되었다. 다가 올 운명을 직감한 그는 체포 되는 순간 자신을 여기서 죽이라며 체포 하려는 소련군 병사에게 소리쳤지만 곧장 독일 드레스덴에 위치했던 ‘이반 코네프’ 원수의 지휘부로 압송 되었다. 이후 악명 높은 모스크바의 ‘루비앙카 형무소’로 옮겨진 그는 비밀 경찰인 NKVD에 의해 인간이 감내 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무너지게 된다.


결국 1946년 7월 30일 열린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 받게 되는데 불과 이틀 후에 형이 바로 집행 된다. 그의 휘하에서 사단장이었던 ‘세르게이 부냐첸코’와 다른 고위 장교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자유 러시아군 일반 병사들 중 운이 좋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소련 사회가 붕괴 될 때까지 음지에서 조용히 살았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블라소프는 사망한 지 7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가를 저버린 배신자의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2차 대전 중 소련 국민 2천 7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향후 그가 다시 복권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왜 패전 직전의 독일에 협력해서 조국을 상대로 끝까지 전투를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히틀러가 생각했던 것처럼 미국과 소련이 대결을 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반공 성향 부대의 역할이 재조명 될 것이라는 나름의 확신을 가졌는지도 모른다.하지만 그의 모든 바램은 사라지고 조국으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한 명의 악마에 실망하여 조국을 구해 보겠다고 나섰지만 반대 편의 또 다른 악마는 제대로 보지 못한 그의 모습을 보며 단순히 시대와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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