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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4. 2021

마를레네 디트리히, 죽어서야 조국에 돌아오다

독일의 영화배우 및 가수 (1901~1992)

영화 상하이 익스프레스 중

1992년 5월 6일 파리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여배우였던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사망 소식이 타전 되었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미테랑’ 대통령을 위시해 전세계 각 국 원수들의 조전 및 외교 사절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는데, 마침 그 해 ‘깐느 영화제’의 포스터 주인공이 마를레네 디트리히였고 이 포스터가 프랑스 곳곳에 걸리게 되자 마치 프랑스 전체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된 그녀의 장례식에는 무려 1,500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세계적인 대배우의 마지막을 전송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그녀의 시신은 마지막 유언에 따라 고향인 베를린의 쇤네베르크 묘지로 옮겨 졌고 이미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 옆에 매장 되었다. 사실 독일인인 그녀가 그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 땅 파리에서 삶을 마감한 데에는 여러 사연이 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영화배우로서의 커리어와 전쟁의 발발 및 여러 정치적 이해 관계 등의 상호작용으로 귀결된 것이었는데, 지금부터 이 세계적인 여배우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베를린 토박이

그녀는1901년 12월에 ‘독일 제2 제국’의 수도인 베를린 남쪽 쇤네베르크 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들도 모두 베를린 태생 이었는데 아버지는 경찰 간부였고 어머니는 보석상 및 시계 판매상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디트리히와 그녀의 언니에 대한 교육열이 매우 컸는데 두 자매는 어려서부터 유명한 선생들에게 피아노, 바이올린 등의 악기 및 영어,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를 두루 배우며 최상의 교육을 받는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불과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었는데 디트리히가 사춘기 소녀일 때 그녀의 어머니는 귀족 출신의 육군 장교와 재혼하게 된다. 그녀의 의붓아버지는 1차대전에 참전했고 훗날 동부전선에서 전사한다.

 1918년에 학교를 졸업한 디트리히는 어릴 적 배웠던 바이올린에 계속 관심을 두게 되고 이를 위해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려 한다. 1920년에 예술의 기운이 충만한 도시 바이마르로 가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음악 수업도 계속 하게 된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녀의 인생에 자유로운 예술혼을 불러 일으켰고 훗날 그녀가 독보적인 배우로 성장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20년대 베를린의 캬바레 공연 모습

한편,1차 대전 이후의 패전국이 된 독일, 특히 수도 베를린은 가히 상상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도시가 되었다. 시내에서는 러시아식 공산 혁명을 독일에 전파 하려는 좌익 ‘스파르타쿠스단’ (독일 공산당의 전신)과 제대 군인 출신의 우익인 ‘자유군단 (Freikorps)’이 서로 극단적인 대결을 했고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쟁에서의 패배와 살인적인 인플레 및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약물, 동성애, 누드 및 단발 머리의 신여성들과 미국식 재즈가 판을 쳤는데 그 중심에는 베를린의 수많은 캬바레가 있었다. (이러한 당시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영화가 바로 1973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뮤지컬 ‘캬바레’이다.) 이 곳에서는 다양한 공연과 노래 및 코미디를 선 보였는데 디트리히는 베를린의 여러 캬바레에서 공연하는 ‘코러스걸’로 활동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기’였고 곧 배우로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1920년대에 그녀는 십여 편의 ‘무성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대부분 단역이나 조연이었지만 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차츰 인지도도 올라가고 “그녀에게 키스를 (I kiss your hand, Madame)” 처럼 주연을 하는 동시에 영화사에서 의미 있는 작품에도 모습을 비추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독일 영화계의 위상과 그녀의 인생을 바꿀 운명의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블루엔젤의 포스터

‘블루 엔젤’ (Der blaue Engel)

1929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은 소설가 ‘하인리히 만’의 작품 ‘저급한 선생’ (Professor Unrat)을 영화로 만들게 되는데 여주인공 선택에 애를 먹고 있었다. 해당 영화는 독일에서 두 번째로 제작되는 유성 영화로서 제목은 극중 술집 이름을 딴 ‘블루엔젤’ (Der bluae Engel)이었다. 여주인공인 ‘롤라 롤라’는 엄격하지만 존경 받는 김나지움 (독일의 인문계 고등학교) 선생을 파멸로 이끌며 결국에는 서커스단의 광대로 몰락 시키는 술집 댄서로 나오는데 모든 현대 ‘팜므파탈’의 원조 격이었다. 여러 여배우들의 테스트를 진행했지만 폰 슈테른베르크를 만족 시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디트리히도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디트리히의 카메라 테스트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중성적인 매력을 바탕으로 결국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게 된다. 상대역인 ‘임마누엘 라트’ 선생 역에는 제1회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지막 지휘 (The last command)’란 작품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독일 출신 대배우 ‘에밀 야닝스’가 출연했다. 그는 새롭게 부상하는 샛별인 디트리히를 경계했고 서로 간에 묘한 긴장감이 촬영 기간 내내 지속 됐다. 더불어 영화제작사 ‘우파’(UFA)의 소유주인 재벌 ‘알프레드 후겐베르크’는 좌파 성향인 원작자 ‘하인리히 만’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영화 제작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촬영되었고 1930년 4월 1일 베를린의 ‘글로리아 팔라스트’ 극장에서 최초 개봉을 하게 된다. 디트리히가 직접 부른 주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하리” (Ich bin von Kopf bis Fuß auf Liebe eingestellt: 영어 제목은 Falling in love again)는 즉시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또한, 스타킹을 신은 채 도발적인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나오는 포스터 역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영화는 독일을 넘어 유럽, 미국 등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1933년 나치 집권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나온 영화들 중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미국에서 개봉을 한 이후 미국 언론은 디트리히의 사진과 인터뷰 기사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는데 이제 그녀는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가 되었고 곧 세계 영화의 중심지에서 러브 콜을 받게 된다. 그 곳은 바로 미국의 헐리웃이었다.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영화 모로코의 한 장면

헐리웃 그리고 조국과의 결별

블루 엔젤의 성공에 힘 입어 디트리히는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과 함께 활동 무대를 헐리웃으로 옮기게 된다. 메이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와 계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영화 출연을 시작 하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술집 가수와 프랑스 외인부대원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모로코’이다. ‘게리 쿠퍼’와 함께 공연한 이 작품에서 디트리히는 여성끼리의 키스 같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특유의 중성적인 매력을 거침없이 보여주며 시대의 터부에 도전했다. (사실 디트리히 본인이 양성애자였다.) 이후  ‘금발의 비너스’, ‘상하이 익스프레스’ 그리고 ‘알라의 정원’ 같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에 출연하며 멋진 각선미를 가진 퇴폐적이고 중성적인 캐릭터의 영화배우로서 확고히 자리 매김 하게 된다.


한편, 그녀의 조국인 독일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33년 1월 30일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게 된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이후 신속하게 정적 및 반대파 재거에 매진 했는데 수상 취임 한달 후인 2월 27일에 발생한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좌파 및 공산주의자 탄압의 신호탄으로 삼는다. 방화 용의자는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마리누스 판 데어 루베’ 였는데 나치는 방화가 독일 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일련의 음모라고 적극 선동하였다. 더불어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는데 특히 경제, 과학계와 더불어 문화/예술계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만큼 독일 문화/예술계에 유대인들이 많은 활약을 했었다는 반증인데 당장 디트리히가 출연한 영화 블루 엔젤만 봐도 감독인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를 비롯해서 제작, 음악, 각본, 조연 배우들까지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독일 내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한 본격적인 국외 탈출을 시작하였고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미국 헐리웃으로 건너갔다. 이때 미국으로 건너간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의 문화/예술계 유대인을 보면 ‘엠 (M)’의 감독인 프리츠 랑, 카사블랑카에 출연한 배우 ‘페터 로어’, 최초의 누드 장면을 찍은 배우였던 ‘헤디 라마르’, 작곡자 ‘프리드리히 홀랜더’와 ‘프란츠 왁스만’ (두 사람 모두 ‘블루 엔젤’의 음악 담당 이었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계 인재들이 헐리웃으로 건너왔다. 디트리히는 동료 망명자들의 지원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기금을 마련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들의 헐리웃 정착에 큰 힘이 되었다. 이들 유대계 예술인들의 유입 및 활약을 통해 헐리웃은 더욱 번영하기 시작했고 이후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최고의 명작들을 만들어 내며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최고의 유명 인사이자 엄청난 ‘사회적 인플루언서’였던 그녀를 나치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나치의 선전상이자 영화계 총책임자인 요제프 괴벨스의 주도로 그녀를 조국인 독일로 귀환하게 하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졌고 최고 대우로 독일에서 영화 활동을 보장 한다는 제안이 전달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 방식은 나치의 극단적이고 고리타분한 이데올로기와 어울릴 여지가 전혀 없었다. 결국 그녀는 1939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로서 조국 독일로부터의 여러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 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되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베스트 앨범 표지

릴리 마를렌, 전쟁터의 성가

1939년 독일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녀가 있던 미국은 중립국이었다. 많은 미국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는 연합국을 지원하면서도 전쟁 참여에 대한 여론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1년 12월의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얘기 했듯이 “잠자는 사자를 깨우는 엄청난 실수”가 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애국심에 불타서 자원 입대하게 되었는데 마를레네 디트리히 역시 다른 연예인들처럼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전시 공채 판매에 힘쓰고 노래 및 공연을 통해 병사들을 위문했다. 더불어 그녀의 대명사와도 같은 노래를 통해 병사들의 마음을 달래기 시작 헸는데 사실 이 노래는 적국인 독일에서 먼저 나온 곡이었다. 그녀의 이름과 같은 제목을 가진 전쟁터의 성가, ‘릴리 마를렌’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릴리 마를렌은 최초에 ‘랄레 안데르센’이라는 독일 여가수에 의해 취입 되었는데 그녀는 베를린의 유명한 클럽인 ‘코미디언 캬바레’ (Kabarett der Komiker)에서 공연을 하던 중 유명 작곡가 ‘노베르트 슐체’와 조우하게 되었고 1939년에 레코드 취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다소 애상적이고 잔잔했던 이 곡의 멜로디나 가사는 초기에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고 전쟁이 진행 됨에 따라 그대로 묻혀 버리는 듯 했다. 적어도 1941년 유고 베오그라드의 독일군 방송국에서 선곡하여 음악을 내보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2차대전 초기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에 속하는 ‘친독 국가’ 였으나 1941년3월 일단의 공군 장교단에 의해 반독 쿠데타가 일어나고 성공하게 된다. 곧 예정 되어 있던 소련 침공 시 발칸 반도의 배후가 불안해질 것을 우려한 히틀러의 결정으로 1941년4월에 독일군이 전격적으로 침공하였고 불과10일만에 전 국토가 점령 당하게 된다.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유럽의 남부에 위치하여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북아프리카와도 거리가 가까운데 독일군 선무 방송의 지역 거점 역할을 했으며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 ‘사막의 혈전’을 벌이던 아군을 위해 사기를 복 돋우는 곡들을 방송하고 있었다.

이러한 곡 들 중 하나가 마침 그 곳에 몇 개 안 되는 레코드판이 있었던 ‘릴리 마를렌’ 이었는데 첫 방송 후 곡을 신청하는 엽서들이 북아프리카 및 유럽 전역에서 담당 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사막의 여우’로 불리었던 아프리카 군단장 ‘에르빈 롬멜’ 장군 또한 이 곡의 팬이었다는 것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 받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러니 했던 것은 독일군과 같은 주파수로 방송을 듣고 있던 영국군 병사들에게 이 곡의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이 곡을 방송하던 저녁 9시 55분에 양국 군대가 암묵적으로 전투를 중지 했다거나 전투 소강 상태에 양 측이 다같이 합창을 했다라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흘러 나왔다. 릴리 마를렌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곡이 인기를 얻게 되자 나치 선전상인 괴벨스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곡의 내용이 너무 감상적이어서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 시키고 염전 분위기에 빠뜨리게 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가수인 랄레 안데르센의 개인적인 부분도 문제가 되었는데 그녀는 전쟁 전 잠시 거주했던 스위스 취리히에 음악가 ‘롤프 리버만’과 같은 유대인 친구 예술가들이 있었고 나치 당에 대해서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 나치는 릴리 마를렌을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방송을 금지 시키자 병사들의 방송 요구가 사방에서 쇄도했고 천하의 괴벨스조차 그냥 무시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곡의 방송 금지를 해제했는데 원곡을 편곡해서 북소리를 강조한 보다 ‘군인 냄새’ 나는 버전을 만들기도 했다. 이후 릴리 마를렌은 독일 내 최초의 100만장 이상 팔린 곡이 되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수인 랄레 안데르센에 대한 억압은 지속 유지 되었고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되어 그녀는 한 때 자살 시도까지 할 정도로 전쟁 기간 동안 힘겹게 삶을 이어 나갔다.  


한편 곡의 인기와 더불어 연합군 측에서도 릴리 마를렌을 부른 가수들도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이가 바로 마를레네 디트리히였다. 미국의 전시전략국 ‘OSS’(현 CIA의 전신)는 애국적이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큰 그녀를 활용하여 방송 출연 및 독일어 노래를 통해 독일군 사기를 저하 시킬 방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에 적극 협조하여 여러 독일어 곡들을 부르게 되었고 이러한 노래들 중의 하나로 디트리히는 1944년 후반기에 릴리 마를렌을 취입하게 된다. 그녀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영어 가사의 릴리 마를렌은 병사들은 물론 후방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된다.

 

귀환 병사에게 키스하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전선의 여신 VS. 반역자?

1944년 이후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하며 추축군을 압박 할 즈음 그녀 역시 영국, 이태리, 프랑스를 누비며 전선에서 사투하는 장병들의 위문 공연에 적극 참여했고 그녀의 노래 및 공연은 병사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최고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더불어 그녀는 전선의 병상을 누비며 특유의 ‘입술 연지’ 사인으로 부상병들을 위로했다. 당시 그녀의 연인이었던 프랑스 영화배우 ‘장 가뱅’도 자유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해방 운동에 적극 참여 했는데 그녀 역시 종종 최전방까지 가서 병사들을 만나곤 했다. 1944년 12월의 소위 ‘벌지 전투 (The battle of bulge)’ 당시에는 벨기에에서 위문 공연을 하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런 독일군의 기습을 간신히 벗어났던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이 당시의 그녀의 헌신적인 활동은 역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한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영화 감독 ‘빌리 와일더’가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였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아이젠하워 장군 보다 전방에 더 많이 있었다”고.


이후 그녀는 진공하는 연합군과 함께 독일 본토로 진입하게 되는데 독일 서부 아헨 인근의 슈톨베르크에 들어 갔을 때 그녀를 알아 본 주민들에 의해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환영은 이 곳에서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는데 세계적인 대스타를 알아 본 주민들은 독일 곳곳에서 그녀를 환영했다. 하지만 모든 독일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패전 독일인들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서부 독일에서 독일 여성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연합군 병사들에게 몸을 팔아야 했고 특히, 소련군이 점령한 동부 독일 및 베를린에서 독일인들은 문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들은 독일에 진군하며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무차별적으로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전쟁 사학자 ‘앤서니 베버’에 따르면 그 숫자가 무려 200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충격적인 규모로 자행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군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독일에 들어온 디트리히에 대한 상당한 반감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도 이러한 분위기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영원한 이방인 그리고 안식

1945년 11월 베를린에서 그녀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 한 후 그녀는 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활동을 하는데 ‘알프레드 히치콕’과 ‘프리츠 랑’등의 유명 감독들과 몇 편의 작품을 함께 했고 1950년 대 부터는 주로 라스베가스의 대형 호텔에서 그녀의 라이브 쇼를 공연하며 보냈다. 그리고 간간이 월드 투어를 하며 팬들을 찾아 다녔는데 1960년에 서독 및 서베를린을 방문하게 된다. 청중들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지만 곳곳에서 얘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뒤셀도르프에서는 어린 소녀가 그녀에게 침을 뱉었고 청중의 계란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공연을 할 때 극장 앞에는 일단의 데모대가 몰려들어 “꺼져 버려라 (Raus)”는 원색적인 구호를 외쳤고 심지어는 폭탄 테러 위협까지 발생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의 다수가 나치나 추종자라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독일 국민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를 조성 하려는 계획도 취소 되었다.

디트리히는 당시 베를린 시장이었던 사회민주당 출신의 ‘빌리 브란트’에게는 환대를 받았지만 그녀에 대한 적대적인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고 다시는 독일에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 외의 지역에서는 계속적인 활동을 이어 갔는데 심지어 1962년 이스라엘에서는 전후 최초로 (금기시되던) 독일어로 노래를 부른 가수가 되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그녀는 파리에 정착해서 조용히 말년을 보냈고 자신의 늙고 초라해진 모습을 감춘 채 사실상의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고향인 베를린을 그리워했고 특히,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 졌을 때 자신의 사후 베를린에 묻히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베를린 쇤네베르크에 있는 그녀의 묘지

그리고 1992년 5월 그녀가 사망하자 독일인들도 마침내 그녀를 받아 들였다. 그녀의 시신은 항공 편으로 파리에서 베를린에 운구되어 ‘쇤네베르크 시립 묘지’에 안장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베를린에 그녀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를 조성 하려는 시도들은 여전히 독일 내 에서 논란거리였고 번번히 좌절되었다. 전후 50년이 지났지만 독일 국민들의 감정에 아직은 지워지지 않는 앙금이 존재했던 것이고 완전한 치유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1997년 11월에 베를린 티어가르텐의 중앙 광장 이름이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 (Marlene-Dietrich-Platz)으로 명명 되었고 2002년 5월에는 그녀에게 사후 베를린 명예 시민증이 수여 되었다. 마침내 디트리히와 독일 국민들 간에 완전한 포용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격랑과 같은 20세기에 조국 독일과 ‘제2의 조국’에서 파란 만장한 삶을 살다간 위대한 배우이자 세계 시민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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