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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4. 2021

비드쿤 크비슬링, 매국노의 동의어가 되다

노르웨이의 정치가 (1887~1945)

비드쿤 크비슬링

영어 사전에서 ‘매국노’란 단어를 찾아 본다면 우선 대부분의 사전에서 ‘Traitor’란 단어가 우선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 줄에 아마도 ‘Quisling’이라는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단어가 등장한다.  어감으로 볼 때 아마도 북유럽이나 독일어 권에서 파생된 단어 같이 들리는 이 단어는 사실 한 사람의 이름이고 그것도 20세기에 생존했던 현대인이다. 사전의 설명을 보면 이 사람은 노르웨이의 정치가로서 그 이름이 반역자 또는 매국노와 동의어라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해서 한 사람의 이름이 하나의 명사로서 그것도 좋지 않은 의미로 실리게 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파헤치기 위해서 이 사람이 살아온 궤적을 흩어 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19세기 말의 노르웨이로 가보자.


성실한 수재

노르웨이는 원래 덴마크의 일부 였는데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이후 1905년까지 스웨덴과 연합 왕국의 형태로 존재했다. 비드쿤 크비슬링은 이 연합 왕국 시기인 1887년 7월에 노르웨이 남부 텔레마크주의 소도시인 피레스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의 목사이자 가계학자였는데 신학에 대한 책을 낼 정도로 상당히 경건하면서도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보통 가정주부였지만 친정 가문이 당시 노르웨이 남부에서 꽤 유명한 재력가 집안이었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크비슬링은 아동기에는 조용하고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그다지 주목 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1893년에 학교에 진학한 이후로 그의 능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역사, 자연 과학, 인문학 등 학업 전반적으로 대단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수학에 상당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18살이 되던 1905년 그의 조국인 노르웨이는 덴마크로부터 분리하여 별도의 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그는 “신생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당시 유럽 및 노르웨이 사회를 휩쓸던 민족주의 기류에 영향을 받게 되어 ‘노르웨이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결정한다. 당시 크비슬링은 발군의 실력으로 250명의 동기생 중 1등의 성적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육군대학에서 학업을 이어 나아갔다. 그는 타고난 재능과 두뇌 및 특유의 성실함을 통해 1908년 졸업 시에는 1817년 육군대학 개교 이래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는 영광을 누린다.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장교 크비슬링은 이후 육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게 된다. 당시 참모본부 소속 장교들에게는 특정 국가를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선택하여 이에 대해 공부하고 분석하는 임무가 부여 되었다. 크비슬링은 최초에는 중국을 선택하여 연구하려 했지만 1911년 발생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대상 국가를 또 하나의 대국인 러시아로 바꾸게 되고 이 선택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다.  

 

군중에게 연설 중인 레닌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르웨이는 1차 대전 동안 중립을 유지 했는데 전쟁 기간 동안 크비슬링은 러시아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17년 3월에 러시아의 ‘차르’ 지배에 반대하며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로마노프 가문의 제정이 무너지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케렌스키가 임시 정부를 이끌며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하지만 전쟁에 지친 민중에게 독일과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케렌스키는 또 하나의 차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볼세비키는 정권을 탈취 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게 되고 마침내 동년 11월 (러시아력으로 10월)에 우리가 흔히 아는 볼세비키 혁명을 일으키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동 시키려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러시아 상황 속에서 크비슬링 대위는 1918년 3월 당시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노르웨이 대표부의 무관으로 발령 받게 된다. 현지 부임 이후 그는 그 동안 연구했던 러시아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본국에 정확히 보고 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그의 문서는 외무부 및 호쿤 국왕에까지 정기적으로 보고 될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는 특히 붉은 군대를 조직하고 이끌고 있던 레온 트로츠키의 용병술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대단히 효율적이라고 생각 했는데, 비록 적백 내전이 진행 중이었지만 이미 러시아 사회가 볼세비키에 의해 장악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1918년 12월이 되자 러시아의 상황은 더 이상 외교관들에게 조차도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고 크비슬링도 다른 동료들과 함께 노르웨이로 철수하였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타공인 최고의 러시아 전문가로서 노르웨이 및 군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게 된다.


본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해외근무를 지원하여 1919년 9월에 핀란드 헬싱키에서 정보 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러시아에 비한다면 그 곳의 임무는 그다지 역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잠시 귀국하여 지내 던 그는 1922년 1월에 유명한 오지 탐험가이자 인도주의자인 ‘프리툐프 난센’의 요청으로 다시 러시아에 돌아오게 된다. 이 당시 난센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아사 직전에 있던 수많은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는데, 노르웨이에서 러시아 전문가로서 명성 높은 크비슬링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했던 것이다. 당시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일대의 농촌 지역들은 내전으로 인한 황폐화에 더해진 기근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참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진 지역 주민들은 하루 만 명 이상의 숫자가 굶어 죽어가는 실정이었고 70세의 난센은 국제연맹의 후원으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이 공로로 192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크비슬링은 그의 러시아어 능력과 행정 수완 및 보고서들을 통해 현지의 어려움을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외부의 이목과 지원을 재난 현장에 집중시키는데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배우자를 만나게 되는데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에서 활동을 하던 중 이제 막 17살이 된 ‘알렉산드라 보로닌’과 알게 되었고 1922년 8월 결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의 결혼은 상호 간의 사랑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고 이듬해 보로닌이 임신을 하자 그는 아이를 지울 것을 제안 한다.  이 와중에 크비슬링은 하르코프에서 ‘마리아 파세츠니코바’라는 또 다른 현지인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보로닌과 결혼 생활을 이어 가면서 이 새로운 여성과도 결혼을 해버리는 이해 못할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새 아내에게는 보로닌과 혼인이 러시아에서의 그녀의 불행한 삶을 구하기 위해 인도적 목적으로 형식상 결혼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세 명은 1924년에 노르웨이로 함께 귀국하게 되는데 크비슬링은 주위의 친지들에게 보로닌을 아내가 아닌 입양한 자녀라고 소개한다. 결국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기묘한 동거는 파국으로 끝나게 되고 견디다 못한 보로닌은 노르웨이를 떠나 친지가 있던 프랑스 니스로 도피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러시아 커뮤니티가 있던 중국을 거쳐 결국 2차대전 후에는 재혼한 남편을 따라 미국에 정착하게 되고 훗날 크비슬링과의 삶에 대한 책을 출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노르웨이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1925년에 크비슬링은 다시 난센의 제의를 수용하여 아르메니아의 난민을 돕기 위해 함께 일하게 된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에서의 일은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고 국제연맹으로부터의 지원도 모두 기각된다. 이러던 중 그는 과거 무관 시절에 알았던 인맥을 통해 모스크바에서 일자리를 얻는데 소련과 외교 관계가 없는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영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연락사무소 대표’로서 근무한다. 그는 이 당시에 내전 이후의 소련 사회에서 벌어지는 볼세비키들의 강경하고 잔인한 모습들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 좌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혐오를 키우게 된다. 1929년에 그는 소련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노르웨이로 귀국하게 되는데 영국 정부로부터 그간의 공로에 대해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 받는다. (이 훈장은 1940년 그가 친나치 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영국 정부에 의해 박탈 당한다.)       

 

국가연합 당원들과 함께

정치계 입문과 ‘국가연합’ 결성

귀국 후 그는 잠시의 휴식기를 가지며 향후 펼쳐 나갈 그의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그의 오랜 해외에서의 경험과 특히, 혁명의 와중에 있던 러시아에서의 다양한 사건들은 그를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만들게 되었다. 더불어 그는 노르웨이라는 나라에 적합한 나름의 사회 이념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노르웨이의 행동’이라 이름 지었다. 이 행동 강령을 위해 노르웨이 각지에 지부를 둔 전국적 단체도 염두에 두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혐오하는 소련 공산당의 조직 구성과 닮았다. 이러한 단체는 군대의 상하 조직에 바탕을 두었는데 마치 그 당시의 나치나 다른 유럽 국가들 내의 파시스트 기반 단체들과 유사했다. 1930년 5월에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이었던 난센이 사망하게 된다. 그는 노르웨이 유력 일간지에 ‘프리토프 난센의 죽음에 즈음한 정치적 견해’라는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이 중에는 ‘강력한 정부’와 ‘인종과 유전’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우파 사이에서 지명도를 넓혀 나간다. 그리고 1931년 3월에는 급기야 ‘노르웨이 노르딕 민족 부흥’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그 수장으로 오르게 된다. 이 단체의 가장 중요한 강령 중 하나가 반공주의였으며 국가 내부의 철저한 공산주의 제거를 목표로 하였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의 정치 노선은 점진적으로 극우 및 파시스트 성향을 띠게 된다.


이렇게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기반을 쌓아가던 그는 1931년 5월에는 중도 노선인 농림당 (현재의 노르웨이 중도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의 등장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논란 거리였는데 그는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당시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임금을 삭감 당한 노조원들의 대규모 파업을 군대를 동원해 강력하게 진압한다. 이후 그가 칼을 갈고 있던 좌파 및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되는데 좌익 및 노조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이를 위해 ‘반혁명 준군사조직’도 구성한다. 이후 내각이 바뀐 뒤 국방장관에서 사퇴했지만 반공 우파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는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었고 전에 그가 결성했던 ‘노르웨이 노르딕 민족 부흥’을 ‘국가 연합’이라는 정당으로 확대 시키게 된다. 국가 연합은 한때 노르웨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확보 했지만 1933년과 1936년 두 차례 선거에서는 의회에 단 1석도 못 얻는 비참한 결과를 얻으며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 즈음 그는 해외의 파시스트 단체들에게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이태리나 독일의 파시스트들과 교류하게 되고 국제적으로 극우 정치인으로서 확실한 눈도장을 찍게 된다. 독일의 나치 이론가인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를 만났고 이후에는 독일도 방문하며 사상적 동지로서의 우의를 다졌다. 그의 강력한 반유대주의나 친독, 반공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정적들은 그를 ‘노르웨이판 히틀러’로서 맹렬히 비난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와 노르웨이의 운명을 결정 지을 전쟁의 먹구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노르웨이 나르빅의 독일군 공수부대

나치의 침공과 쿠데타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이틀 후인 9월 3일에 영국,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노르웨이는 지난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선택했고 전화에 휩쓸리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지리적인 위치나 보유한 자원 등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립국으로서 노르웨이는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국민들의 정서도 양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반면 이웃 나라인 스웨덴은 확실히 친독 정서가 강했다.)


1939년에서 1940년을 지나며 연합군과 독일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대치만 하고 있던 소위 ‘가짜 전쟁’의 시기에 있었다. 이 당시에는 사실상 중단된 육지에서의 전투 보다는 바다에서의 작은 대결도 큰 이슈가 되었던 시기였는데 1940년 2월에 노르웨이의 중립을 위협하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대서양에서 사로잡힌 영국 포로를 몰래 수송하던 독일 화물선 ‘알트마르크’호가 노르웨이 영해에서 영국 군함에게 피격, 나포 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노르웨이 정부는 자국 영해에서 벌어진 양 측의 충돌에 적잖이 당황하게 되었다. 사실 독일은 그 이전인 1939년 11월에 이미 노르웨이 침공 작전을 비밀리에 입안 했는데 이것은 당시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를 만나고 연합군의 노르웨이에 대한 위협을 과장했던 크비슬링의 영향이 컸다.  


연합군도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 주도로 별도의 노르웨이 침공 작전을 구상한다. 영국 입장에서 볼 때 노르웨이는 독일이 대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막는 중요한 통로였고 독일 입장에서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는 수많은 함선과 유보트가 정박하고 북쪽의 나르빅 항구는 스웨덴산 철광석을 안전하게 수송 할 수 있는 최적의 전략 기지였다.  노르웨이 침공은 시간 문제였다.


침몰 중인 독일 중순양함 블뤼헤르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은 작전명 ‘베저위붕’ (Weseruebung)으로 명명된 스칸디나비아 침공 작전을 개시한다.  독일군의 우선 목표는 북쪽에 위치한 덴마크였는데 크리스찬 국왕은 빈약한 군사력을 절감하고 불과 침공 6 시간 만에 항복을 했고 독일군은 바로 핵심 목표인 노르웨이로 이동했다. 독일군은 신속한 공격을 위해 다수의 순양함과 구축함을 동원하여 노르웨이의 전략적 목표로 병력을 수송했다. 4월 9일 새벽을 틈타 노르웨이 해안에 접근한 독일 침공 군은 노르웨이 군의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수도 오슬로 인근의 오스카스보르그 요새 같은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크루프사의 구형 대포로 독일군 함대를 맹렬히 포격했다. 이 포격은 중순양함 ‘블뤼헤르’와 ‘뤼초프’를 격침시키면서 천 여명의 병력을 수장 시켰고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게 되었다. 이러한 노르웨이군의 분전을 통해 국왕인 ‘호콘 7세’와 내각의 요인들 및 국회의원 150명이 탈출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고 이를 통해 훗날 영국에 ‘노르웨이 망명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더불어 노르웨이에서의 독일 해군 손실로 인해 훗날 바다를 통한 영국 침공이 더욱 어려워졌고 이에 독일은 공군으로서 영국을 압도하려 하지만 이 역시 실패하게 된다.


노르웨이군이 구식 장비로 최신 무기의 독일군을 막아내며 악전고투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이미 독일 측과 사전 교감을 하고 있었던 크비슬링은 오슬로의 ‘노르웨이 국영방송국’으로 향한다. 그는 방송국의 라디오를 통해 자신을 수상으로 발표하고 현 내각이 이미 오슬로를 버리고 도망했다며 노르웨이군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을 명령한다. 본격적인 ‘반역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 시점에 호콘 7세와 내각 요인들은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50km 가량 떨어진 엘베룸에 피신해 있었는데 노르웨이 주재 독일 대사는 이들을 방문하여 이미 독일 측의 제안을 수락한 덴마크의 예를 들며 크비슬링을 정식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종용한다. 크비슬링을 수상으로 임명 하는 것은 침공한 독일군에게 사실상의 면죄부를 주는 것이었지만 독일 측의 압도적인 진군 앞에 내각은 흔들린다. 하지만 호쿤 7세가 크비슬링의 수상 임명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그가 임명 될 시 왕위를 포기 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하자 분위기는 반전되었고 내각은 그의 임명 및 독일 측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크비슬링은 경찰 및 군대에 국왕 및 내각을 체포하도록 명령 했지만 모두 이행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국가 연합 내의 측근 인사들조차 그를 반역자로 보았다.


크비슬링에 대한 노르웨이인들의 불복종을 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챈 독일 측은 불과 6일 만에 그를 물러 나게 한다. 한편 호쿤 7세는 계속 피신하여 6월 7일에 노르웨이 북단 트롬소 항에서 영국 순양함을 타고 망명 길에 오른다. 그는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같은 날에 노르웨이로 돌아오게 된다.

 

괴뢰 정부의 수반

노르웨이가 항복한 후 독일은 나치 당원인 ‘요제프 테르보벤’을 현지 점령의 최고 책임자로 파견한다. 그는 크비슬링의 ‘국가 연합’ 외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 시켰고 1941년 9월에 ‘국가임시위원회’라는 단체를 통해 각료들을 구성하고 그 수장으로 크비슬링을 임명한다. 추후 크비슬링 중심의 내각 및 괴뢰 정부로 나아 가려는 포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42년 2월에는 크비슬링을 공식적인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크비슬링은 그의 정부 출범이 ‘새로운 노르웨이’의 시작이라며 대단한 의미를 부여했지만 노르웨이 국민들 중 이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으며 여전히 독일 측 대리인 테르보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꼭두각시에 불과 했다.


그는 왕궁에 자신의 집무실을 마련하여 노르웨이의 진정한 지배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보여주려 했다. 이후 나치의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본격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시작 했는데 이미 지난 세기에 폐기된 ‘유대인 입국 금지법’을 부활 시켰으며 모든 유대인들을 등록 시켜서 재산을 몰수하고 노르웨이 내 수용소로 이송 시켰다. 1942년 11월에는 유대인들을 최종적으로 독일 점령 지역인 폴란드로 보냈는데 768명의 유대인 추방자들 가운데 종전까지 생존한 사람들은 4% 미만인 28명에 불과했다. 이는 인접국인 덴마크가 국왕 및 국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과 도움으로 나치에 의한 희생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과 크게 대비되는 것이다. 크비슬링은 유대인들이 이주하면 살해 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섬에 ‘최종 재정착’할 것이라는 독일 측의 선전을 끝까지 믿고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크비슬링은 나치의 히틀러 유겐트를 모방한 국가 연합 내 청소년 단체를 조직하려 했는데 이것은 전국 교사 및 교회에서 엄청난 반발을 야기했다. 일선 교사와 종교인들의 사직이 줄을 이었으며 더 나아가 대규모 시민 저항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에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내 저항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정권 불복종에 적극적이었던 ‘에이빈트 베르그라드 주교’를 체포하여 처형하려 했는데 이는 독일 당국 측에서 조차 반발이 나올 정도로 도를 넘어선 행위였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43년 2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이후 전황이 점차로 독일에 불리해져 가는 상황에서 그는 독일의 전쟁 노력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려 했고 특히, 노르웨이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동부 전선으로 파병했다. 그들은 노르웨이의 군인으로서 핀란드 전선에 투입되어 노르웨이-소련/핀란드 국경의 영토를 획득 하기를 내심 바랬지만 독일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북부집단군의 후위 부대로서 참전 하다가 1943년 4월에 해체되었다. 시간이 흘러 1945년 1월이 되자 독일군의 패배는 명확해 졌고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면담을 통해 노르웨이의 독립을 확정 지으려 했지만 히틀러는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독립 노르웨이’ 수립이 실패 했다는 것이 의미 하는 것은 전후 크비슬링은 조국에 반역자로서 낙인 찍히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반역자로서의 비참한 최후 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재판 중인 크비슬링

최후의 심판

1945년 5월 8일 마침내 나치 독일이 패망했고 크비슬링은 그의 각료들과 함께 다음 날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전후 망명에서 돌아온 노르웨이 정부는 그를 포함한 괴뢰 정부 인물 및 대독협력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 및 재판을 시작했다. 크비슬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반역자였다.


그는 1945년 9월 10일에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한달 후인 10월 24일에 총살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은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었다. 이미 그의 이름은 살아 생전에 반역자와 동의어로 사용 되었고 현재에도 같은 의미로 영어 사전에 등재 되어있다.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조국을 구하겠다고 나섰지만 그가 추구했던 신념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전파하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으며 그의 행동은 명백한 반역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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