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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4. 2021

앙리 페탱, 구국의 영웅인가? 시대의 희생양인가?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1857~1951)

앙리 필리프 페탱

2018년 11월 프랑스는 대통령인 ‘에마뉘엘 마크롱’의 발언 하나를 두고 온 나라가 엄청난 사회적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1차대전 종전 100주년이 되는 시점에 당시의 격전지 중 한 곳이었던 ‘샤를빌 메지에르’를 방문하여 전사자 기념비에 헌화 했는데 이 자리에서 1차 대전 당시 프랑스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페탱’ 장군을 ‘위대한 군인’이라고 칭찬한 것이다. 프랑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제 3자가 본다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페탱 장군이 2차 대전 시 친독 정부였던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비록 마크롱 대통령의 방문이 1차대전 종전에 초점을 맞추어 지긴 했지만 이 발언은 프랑스 내에서 격렬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좌익 성향 야당과 유대인 단체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마크롱은 결국 추가적인 해명을 하며 사태를 진화해야만 했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서 앙리 페탱의 위상은 상기한 국민적 논란만큼이나 모호하다. 누군가 에게는 조국을 위기에서 구원한 시대의 영웅이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프랑스의 가장 굴욕적인 현대사의 핵심 인물로서 나치에 굴복했던 친독정권의 하수인으로 각인 되어 있다. 지금부터 이러한 ‘명과 암’이 공존하는 ‘앙리 페탱’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프랑스의 군인이 되다

사실 앙리 페탱이 처음부터 프랑스군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군인은 아니었다. 1856년 생으로 영불 해협이 지척인 ‘파 드 칼레’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에 보불전쟁 (1870~1871)으로 인해 국가가 패배하고 몰락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패전 이후 프랑스는 전쟁 배상금으로 독일에 5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돈 (당시 국가 세입의 1/4 수준)을 지불하고 북동부의 ‘알사스-로렌’ 지방까지 강제로 넘겨줘야 했는데 국민 전체가 신흥 강대국인 ‘독일 제국’에 대해 상당한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성장기의 사건들로 인해 그는 어릴 적부터 주변 친지들에게 듣는 과거 나폴레옹 시기 전유럽을 석권했던 ‘프랑스의 영광’에 대한 얘기를 좋아했고 군대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그랑드 아미’ (La Grande Armee) 소속으로 이태리와 스위스 등 유럽 각지의 전쟁터를 누볐던 작은 할아버지의 무용담이 누구보다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성인이 된 후 군대에 대한 동경은 현실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1876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의 입학 성적은 거의 꼴등에 가까웠는데 많은 노력을 했는지, 졸업 시에는 다소 향상된 336명 중 229등으로 임관한다. 그는 육군 경보병으로 시작해서 주로 프랑스 내 부대에서 근무 했고 1890년에는 육군대학 참모 과정을 이수한다. 당시는 제국주의가 절정이었던 때로 유럽 열강의 엘리트 장교들은 대부분 출세를 위해 전투 가능성이 많은 해외 식민지 근무를 원했지만 그는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비주류 군생활은 진급에도 영향을 주어 임관 된지 22년이 지난 1900년 이 되어서야 소령을 달았고 1차대전 발발 직전에는 여단을 맡았지만 이마저도 여전히 계급은 대령에 머물렀다. (통상 여단급은 장군이 지휘함)


이런 군생활 중에 그는 그 자신과 조국의 미래까지 바꾸게 될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갓 임관한 ‘샤를르 드골’ 소위였다. 이 둘은 1911년에 전통 있는’아라스 33 보병 연대’에서 연대장과 부하 장교로서 조우하게 되는데 드골은 이 당시 페탱의 인간적인 면모와 리더십에 큰 감명을 받고 존경하는 상사로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마른 전투  당시 징발한 파리의 택시로 병력을 수송하는 프랑스군

대전쟁 (Great War)의 시작과 초고속 승진

1871년 보불전쟁이 끝나고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유럽에는 근 40년 가량 강대국간 큰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 되었다. 소위 프랑스어로 ‘벨 에포크’ (La Belle Epoche: 아름다운 시절)라 불리 우는 평화의 시기였는데 제국주의의 정점을 지나고 있던 유럽 각국의 사람들에게는 문화와 예술이 꽃피고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인류 문명은 무한히 진보 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14년 7월 사라예보에서 울려 퍼진 총성 한 발이 모든 것을 뒤엎어 버렸다. 현지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집단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사건의 처리를 놓고 세르비아와의 협상을 이어가던 오스트리아는 결국 처리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한편 슬라브 국가들의 후견인 임을 자처하던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했고 뒤를 이어 프랑스, 영국이 휩쓸리게 되며 전쟁의 양상이 문자 그대로 ‘세계 전쟁’으로 확산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1차대전이라는 개념이 아직 없었기에 그저 ‘대전쟁’으로 불리었다.)


개전 당시 페탱은 제 4보병 여단의 여단장으로서 초기의 여러 전투에 참여하는데 특히, 8월 말에 벌어진 ‘생 캉탱’ 전투에서 전술적인 후퇴를 잘 엄호하게 되며 지휘부의 주목을 받는다. 그는 ‘무조건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전투 방식에 회의를 품었는데 충분한 화력을 바탕으로 적을 무력화하여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초기의 몇 주 동안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는데 이에 프랑스 지휘부는 적극적이지 못한 백여 명의 장교들을 보직 해임하는 초강수를 둔다. 이 와중에 불과 몇 주 전 까지만 해도 군에서 은퇴를 생각하고 있던 58세의 ‘늦깎이 대령’ 페탱은 오히려 장군으로 진급하며 제 6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우익에 주력을 내세우고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군을 파리 외곽에서 크게 포위 하여 섬멸 한다는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9월 초 프랑스-독일 양군은 마른강에서 대치하게 되는 데 프랑스군은 수도 파리가 함락 될 위기에 처하자 시내의 택시를 대규모로 징발하여 병력 동원에 나섰다. 페탱도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는 ‘아이스네-마른’ 운하 주변에 포진 하면서 격렬한 방어전을 치루게 된다. 이후 연합군은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군의 필사적인 방어와 역공을 통해 독일군을 마른강에서 극적으로 저지 하는데 성공한다. 이른 바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연합군의 승리였고 이로 인해 전쟁은 단기 속전이 아닌 장기 참호전으로 양상이 바뀌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경이롭다고 할 만큼의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는데 9월에 소장, 10월에 중장으로 진급하며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4성 장군이 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장군은 별 2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15년 6월의 ‘로레토 전투’에서 프랑스군 중 유일하게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한 공을 인정 받아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며 프랑스 2군을 맡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장소는 프랑스 북동부의 베르됭이었다.


베르됭에서 격전을 치루고 있는 프랑스군의 처절한 모습

베르됭의 영웅

초기의 신속한 승리를 고대하며 서부 전선을 공략했던 독일군은 예상 보다 빨랐던 동부 전선의 러시아군 동원과 마른 강에서의 연합군의 일격으로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악몽과 같은 양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1915년 내내 양 측은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촘촘하게 방어된 진지에 막혀 소득 없는 돌격만 반복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을 잃게 되었다. 이에 독일군 참모총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연합군, 그 중에서도 주력인 프랑스군을 일거에 섬멸할 방안을 고민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의 프랑스군 투입이 예상되는 장소가 필요했고 여러 후보지 중 최종 선택된 곳이 바로 룩셈부르크 국경 인근인 베르됭 요새였다. 이 곳은 고대에 훈족의 아틸라가 정복 하려다가 실패한 곳이며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마뉴 대제 시절 베르됭 조약 (843년)을 통해 프랑스라는 나라가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나름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게다가 28개의 크고 작은 요새들이 몰려 있는 천혜의 방어 요충지로서 이곳이 뚫리면 파리 및 인근의 프랑스 핵심 지역이 점령 될 수 있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사수하려 할 것으로 판단했고 프랑스군이 더 많은 병력을 투입 할수록 더 많이 섬멸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모전을 통해 최대한의 적군 인명 피해를 야기하고 전쟁에 승리 한다는 끔찍한 생각이 현실의 작전으로 실천 되는 순간 이었다.   


1916년 2월 21일 새벽 독일군은 800대 이상의 대포를 동원한 10시간 가량의 예비 포격을 통해 베르됭 공략 암호인 ‘심판 작전’ (Unternehmen Gericht)을 개시했다. 전투 첫날 독일군의 포격으로 포격 이후 독일군은 참호 돌파에 최적화 된 정예 부대인 ‘돌격대’ (Strumtrooper)를 투입하여 맹공을 퍼부었고2월 25일에는 베르됭 전방에 위치한 ‘두오몽 요새’를 점령하였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국가의 운명을 건 절체절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페탱은 전투 초기 2군 사령관으로 근무 중이었는데 ‘중앙집단군’ 사령관으로 발령 받으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기존의 프랑스 장교들이 무조건적인 공격을 통해 적 진지를 빼앗으려 한 반면 페탱은 포병 화력을 중시하며 최대한의 포격을 통해 보병의 피해를 최소화 하려 했다. 더불어 예비 부대와 공격 부대 간의 적절한 교대를 통해 병사들이 최대한의 휴식 및 컨디션을 유지 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대전은 물량전이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신성한 길’로 불리게 된 70여 킬로미터의 보급로를 개척하여 각종 장비, 포탄 및 식량을 주야로 수송토록 하였다.


양측은 10개월 간의 빼앗고 빼앗기는 혈투를 거듭하는데 프랑스와 독일을 합쳐서 무려 100만명 가까운 사상자가 나면서 병사들은 ‘현세의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독일군에 맞서 베르됭에서 악전고투하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6월에는 러시아군이 동부에서 ‘브로실로프 공세’를 실시하고 7월에는 영국군이 서쪽의 ‘솜므’ (영국은 이 전투에서 최초로 탱크를 투입 하였다.) 에서 공격을 하며 양쪽 전선에서 독일군을 압박한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독일군은 베르됭의 병력을 다른 전선으로 이동 시킬 수 밖에 없었고 결국 12월에 프랑스군이 독일군 최초 진격선 이상을 점령하며 프랑스군의 승리로 마무리 된다.


페탱은 비록 전투 도중에 ‘로베르 니벨’ 장군과 교체 되었지만 베르됭 전투 이후 프랑스의 국민들의 열광을 받으며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이후 1917년 4월에는 드디어 육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하게 되었는데 당시는 계속되는 무의미한 죽음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의 불만이 ‘집단 반란’으로 이어질 정도로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페탱은 이러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보다 보다 많은 휴식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인한 죽음을 최소화 하기 위해 노력한다.


더불어 미군이 본격적으로 투입 된 1918년 중반까지 계속되는 독일군의 공세를 잘 막으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그는 종전 직후 그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영예가 되는 ‘프랑스의 원수’ (Marechal de France) 칭호를 받게 되며 화려한 군 경력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 프랑스의 영웅이었고 존경 받는 군인이었다.

 

점령된 파리의 에펠탑 앞에 선 히틀러

패배, 그리고 비시 정부의 수립

1차대전이 끝나고 페탱은 프랑스의 영웅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 나간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 서명식에 프랑스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그가 무찌른 독일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1925년 9월에는 모로코 일대에서 벌어진 ‘리프 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서 참전하여 스페인군과의 연합 작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후 1934년에는 국방 장관이 되어 프랑스의 주요 국방 정책들을 책임 지게 되는데 당시의 프랑스는 좌우의 대립이 극심하여 나라가 사분오열 되어 있었고 페탱이 주장했던 우수한 전차와 항공기에 예산을 배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1936년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잡게 되고 이후 2차세계대전 발발 때까지 프랑스는 ‘레옹 블룸’, ‘에두아르도 달리디에’ 등 좌파 성향 정부가 잇달아 통치 하였다. 페탱은 좌파 및 사회주의자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정부를 공공연히 비난 하였고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게 된다. 이후 전쟁의 위기가 점차 고조되던 1939년 초 그는 프랑코가 총통으로 있던 스페인에 대사로 발령 받는다. 프랑코는 과거 프랑스 육군대학 유학 시절 페탱 밑에서 수학한 이력이 있었고 이 때의 인연이 그의 발령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얼마 후 운명은 그를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게 만드는데 1940년 5월 개시된 독일과의 전쟁에서 조국인 프랑스가 불과 6주 만에 비참하게 항복한 것이었다. 프랑코 총통은 귀국 하려는 페탱을 막으려 했지만 조국에 돌아가서 상황을 수습 하려는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20년전 프랑스의 승리의 정점에 있었던 그가 이번에는 정반대의 상황에서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프랑스 항복 시점에 달라디에 이후 총리에 오른 ‘폴 레노’가 스페인 대사로 있던 페탱에게 귀국을 요청한 것이었다. 레노는 이 모든 혼란과 패배의 상황에서 조국을 이끌 지도자로 페탱 만한 사람이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로 돌아온 페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다. 6월 22일에 파리 외곽 콩피에뉴 숲의 한 객차 (이 객차가 바로 1차 대전 휴전 조인식이 열렸던 장소였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프랑스에 받은 그대로 되갚아 준 셈이다) 안에서 프랑스의 대독 항복 조인식이 열렸고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독일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된다.


페탱은 7월 10일 프랑스 중부에 있는 휴양 도시 ‘비시’ (Vichy)에 수도를 정하고 그의 정부를 수립 하게 된다. 이 비시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등 외견상 프랑스를 대표하는 공식 정부였고 당시에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들은 아프리카의 차드를 제외하고는 전부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이 아닌 비시 프랑스에 충성했다. 하지만 파리를 비롯한 대서양 연안은 전부 독일에 점령 되어 있었고 독일 점령 당국에 철저히 협조 해야 하는 친독 괴뢰정부라는 것이 태생적 한계였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길을 선택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영국 마저 본토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전쟁은 이미 기울었고, 드골 등의 저항은 무의미 하다고 보았으며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그 형태를 유지하며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괴뢰정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독일 점령군에 물자를 수탈 당했으며 사회/공산주의자나 유대인, 프리메이슨들을 독일 당국에 넘겨 주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1930년대의 프랑스의 혼란 및 독일과의 전쟁에서의 패배가 급진좌파와 유대인 정치가들에게서 비롯 되었다고 믿은 페탱 본인의 편향된 생각도 작용 했다. 그는 취임 직후 유대인들에 대한 공직 및 사회 참여를 제한하는 법적 조치를 취했다. (단, 노란색 ‘다윗의 별’을 부착하는 것은 면하게 했다.) 1942년 7월에는 파리에서 독일 당국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 경찰이 유대인 만 3천명을 체포하고 자전거 경기장에 구금 한 뒤 독일군 측에 넘기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폴란드 동부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하게 된다. 전쟁 기간 중 프랑스 출신 유대인 9만 명 이상이 나치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42년 11월 연합국의 횃불 작전이 실시되며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모로코에 상륙하게 되는데 이때 방어를 담당하던 비시 프랑스군 병사들은 싸워야 할 의지도 명분도 없었고 연합군에게 사실상 무저항 상태에서 항복 하게 된다. 이는 히틀러를 격노케 하는데 독일군은 이후 비시 프랑스의 영토 전체를 점령하게 된다. 이 때 지중해의 ‘툴롱’ 항에 있던 프랑스 함대는 독일군의 접수를 피해 77척을 스스로 자침 시키거나 일부 함선은 독일군을 피해 연합군 측에 합류 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전개 속에서 페탱은 유명무실한 정부 수반이 되었고 드디어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게 되자 독일군은 급격히 밀리게 되고 8월 25일에는 드디어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 한다.


파리의 개선문에서 행진 중인 드골 장군

이 즈음 페탱을 비롯한 비시 정부의 수뇌부들은 독일 남서부에 있는 ‘지그마링엔’으로 이송 되는데 이곳에서 ‘망명 비시 정부’를 이끌게 된다. 페탱은 독일에 이송 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고 이후 망명 정부 참여도 거절했다. 그의 퇴장 후 ‘비시 망명 정부’는 점령지 행정관이었던 ‘페르낭 드 브리농’에 의해서 이끌어 지게 되는데 정부라고 할 것도 없는 이름뿐인 허수아비였다. 1945년 4월이 되자 페탱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히틀러에게 프랑스에서 죽게 해달라고 귀환을 간청 하지만 이 때는 히틀러도 이미 제 정신이 아닌 상황이었으며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한다.  그로부터 몇 주의 시간이 흐르게 되고 페탱의 생일인 4월 24일에 마침내 감금에서 풀려나서 스위스 국경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앞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짐작도 못한 채 마침내 조국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재판 중인 페탱

재판과 대대적인 처벌

프랑스에 돌아 온 페탱은 드골의 임시 정부에 의해 국가반역죄와 간첩죄 등의 명목으로 기소 당하게 된다.  프랑스 원수 제복으로 법정에 입장한 그의 판결에 대해 배심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그는 사형을 언도 받게 되고, 국민의 대표인 프랑스 의회에서 부여한 ‘프랑스의 원수’를 제외한 모든 공적인 직함과 훈장이 취소 된다. 하지만 임시 정부 수반이었던 드골은 1차 대전에서의 페탱의 역할과 고령 임을 들며 본인 직권으로 종신형으로 감형 시킨다. 이러한 판결이 대중의 엄청난 분노를 야기 시킬 수 있음을 직감한 드골은 페탱을 스페인 국경 피레네 산맥의 첩첩산중인 ‘포르탈레’ 요새로 보내 버리는데 한편으로는 과거의 존경했던 상관이 대중의 눈에서 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대독 협력자로 지목되어 삭발당한 여성들

페탱의 판결이 내려지고 프랑스는 전후 본격적인 나치 청산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그의 판결 이전에도 많은 수의 프랑스인들이 부역 혐의로 즉결 처분 되거나 여성들의 경우 독일군과 동침 했다는 이유 만으로 머리를 삭발 당하기도 했다. 페탱 재판은 이러한 부역 혐의 처벌을 공식화하는 신호탄이 되었는데 비시 정부의 2인자로서 친독파의 대명사였던 ‘피에르 라발’과 ‘페르낭 드 브리농’이 사형을 언도 받고 곧바로 집행 되었다. 또한 독일군과 협력해서 레지스탕스 소탕에 앞장 섰던 국민군 ‘밀리스’의 수장 ‘조르쥬 다르낭’과 그의 악질 부하들은 일말의 동정 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한편, 독일군 소속으로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과 싸운 ‘반공 프랑스 의용대’나 무장 친위대 ‘사를르마뉴’ 소속 부대원들도 고위급은 많은 수가 사형이나 장기 노동형에 처해 졌지만 일반 병사들 중에는 단기 수감이나 인도차이나와 같은 식민지 전투에 참가하는 대가로 사실상 사면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많은 처벌을 받은 계층이 작가나 언론인이었는데 파시스트 작가인  ‘로베르 브라질락’ 처럼 독일군의 선전에 적극 협조한 이는 사형을 당했고 부역 혐의가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공민권 박탈’ 이라는 불명예 형에 처해졌다. 역시 프랑스 제일의 자동차 회사였던 ‘르노자동차’는 독일군의 전쟁 노력에 적극 협력한 죄목으로 사장인 ‘루이 르노’가 체포되었고 그는 구금 중 사망하게 된다. 전후 르노자동차의 경영권은 주식의 95%를 보유하고 있었던 그의 유족으로부터 몰수 되어 프랑스 정부로 넘어 갔으며 회사는 이때부터 국유화 되었다. 유명 디자이너이자 나치 부역자 혐의를 받았던 ‘코코 샤넬’은 처벌을 피해 스위스로 도피했고 한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프랑스의 전후 나치 부역자 처리 과정에서 조사를 받은 사람은 대략 30만여명으로 알려져 있고 그 중 재판 및 즉결 심판에서 처형된 사람은 만 여명, 기타 처벌된 사람은 모두 10만명으로 추산한다.    

 

여전한 논란

페탱은 대서양 연안의 비스케만에 위치한 ‘일드외’ 섬에서 계속 수감 생활을 이어 가던 중 1951년 95세의 나이로 자연사했고 동네 묘지에 안장 되었다. 한 때 구국의 영웅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 받았던 육군 원수는 수감된 죄인으로서 초라하게 삶을 마감한다. 1973년에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묘지가 파헤쳐 지는 등 그는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했다. 더불어 그의 행적과 평가에 대해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논란 중이며 사실 프랑스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대화 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부역 행위를 떠나서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한 듯이 보인다. 그의 평소 말대로 그에게는 프랑스가 전부였고 이를 위해 굳이 오지 않고 책임 지지 않아도 될 패전 조국으로 돌아 왔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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