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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6. 2021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방랑하는 세르비아인

세르비아의 군인 (1893~1946)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1년 3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동부에 위치한 ‘비엘리나’시에서는 다소 기묘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국경에 가까운 이 도시는 한 인물의 흉상을 설치하는 것을 놓고 시 전체가 극도로 양분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의회의 최종 표결에서는 흉상 설치를 찬성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보스니아계를 중심으로 한 반대 및 비난 여론은 한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되었다. 보다 못한 현지 시장은 이 결정이 이미 시청의 기본적인 승인을 받았으며 의회의 표결도 거쳐서 절차 상의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반대 의견을 강하게 일축했다.


논쟁의 중심이 되어 있는 인물은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라 불리는 구유고 시절의 군인 이었는데 세르비아 출신으로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세르비아계 사람의 흉상이 보스니아의 도시에 세워 졌으며 이것이 주민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을까?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험난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실타래 같은 이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왜 유고가 지금처럼 수많은 나라로 분리되었는지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설명 하고자 하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야 말로 이러한 역사를 압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베오그라드 모습

민족주의에 눈 뜨다

‘드라골루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1893년 4월 세르비아 중서부의 ‘이바니차’에서 태어났다. 지역 관공서 서기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직후 결핵으로 사망했고 6세 때는 어머니 마저 잃게 된다. 그와 두 여동생들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직업 군인으로 근무 중이던 삼촌들에게 보내졌고 그곳에서 양육되었다. 당시 세르비아는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근 500년 동안 지속된 ‘오스만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국제적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 받은 지 얼마 안 되었던 상황 이었다. 또한 이 때는 북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범게르만주의’를 표방하며 남쪽으로 팽창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세르비아는 이에 맞서는 슬라브 국가들 중 최전선에 있었다. 더불어 세력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역의 맹주로 군림 했던 ‘오스만 터키’는 3개 대륙을 호령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등 주변의 국제 정세는 불안하기만 했다.


어린 미하일로비치는 이러한 신생 세르비아의 상황 및 군인이었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 사관학교 진학을 꿈꾸게 되고 조국을 위해서 기여 하겠다는 강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성장한다. 또래 내에서 유달리 총명했던 그는17세가 되던 1910년 10월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육군사관학교’에 사관 후보생으로서 입학하게 된다. 사관 후보생으로서 학업을 이어가던 중 드디어 그가 조국에 봉사할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 입학 2년 후인 1912년 가을에 숙적 터키와의 1차 발칸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침내 조국 세르비아를 위해 한 몸을 바쳐 기여 할 수 있는 운명의 순간이 찾아 온 것이었다.

 

전선의 열혈 장교

19세기 말 세르비아,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장기간의 압제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려움이 깨어지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1911년의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이었는데 오스만 터키는 이 전쟁에서 패하며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이탈리아에 넘겨주게 되었다. 과거의 맹주가 무력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본 발칸의 여러 나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이 주축이 되어 오스만 터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렇게 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한다.     


미하일로비치는 생도로서 전쟁에 참전 하는데 최초에 대대급 부대에서 부관으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정예 부대인 ‘다뉴브 사단’으로 배치 되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싸우게 된다. 그는 쿠마노프, 비톨라 전투 및 예디르네 (터키의 유럽 영토 내 최대 도시) 포위전에 참전하며 그의 용맹함을 유감 없이 발휘 하였고 ‘무공 은장’을 수여 받는다.

 1차 발칸 전쟁은 1913년 5월의 런던 조약을 통해 오스만 터키의 패배로 막을 내리지만 이후 승전국들 사이에 영토 배분에 대한 분열이 일어나게 되고 1913년 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세르비아는 다른 연합 국가들과 함께 불가리아와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미하일로비치 역시 참전한다. 이번에는 ‘모라비아 사단’으로 전출을 가게 되었고 보병 중대의 지휘관으로 전투에 참여한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코차니 전투’에서 부상을 입게 되고 전선으로부터 후송 된다.


결국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의 강한 압박에 굴복한 불가리아는 즉각적인 항복을 통해 무릎을 꿇게 되고 2차 발칸 전쟁 역시 막을 내린다. 전쟁을 통해 소위로 진급한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생도 동기들과 함께 조국을 지켜 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게 되지만 그와 조국 세르비아 앞에 곧 더욱 큰 시련이 다가오게 된다. 당시 정치가들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 정의 했던 ‘대 전쟁’ (당시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을 그렇게 불렀다.)이 발발한 것이다.


사라예보에서 살해된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

1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

1914년 7월 6월 28일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 비밀 결사 단체인  ‘검은 손’ 단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 의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고 결국 1차 세계대전이 시작 된다.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 3군 휘하의 ‘드리나 사단’ 소속으로 남진하는 오스트리아 군에 대항해 싸운다. 그는 1914년 8월에 베오그라드 서쪽의 ‘세르산 전투’에 참가하는데 최전선을 지키며 분전 하지만 세르비아군은 11월까지 지속적으로 상대적 우위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에 밀리며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전쟁의 전환점은 세르비아의 서브에 위치한 ‘콜로바라강’에서 11월에 벌어진 전투였다. 미하일로비치는 이곳에서 보병 장교로서 최선봉에 서서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적을 막아 내는데 큰 기여를 하는데 이때의 무공을 통해 ‘무공 금장’을 수여 받는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주춤해 지면서 전선은 당분간 소강 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군이 명장 ‘아우구스트 막켄젠’ 원수의 지휘 하에 세르비아 전역에 본격적으로 참전 하게 되었고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맞게 된다. 1915년 10월 5일 독일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50만의 병력으로 세르비아 북부 지방을 공격하고 곧 이어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점령한다. 세르비아군은 코소보에서 격렬히 저항하지만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군에게 현격한 실력 차를 드러내며 밀리고 있었고 불가리아군이 동쪽과 남쪽에서 공격을 해오자 연합군인 그리스와의 직접적인 연결로가 끊어진다. 국왕인 ‘페타르 1세’를 포함한 세르비아군 및 정부 인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남서쪽의 알바니아를 가로질러 아드리아해의 안전한 항구로 탈출 하는 것이었다. 말이 쉬워 탈출이지 알바니아/몬테네그로의 험준한 겨울 산 속을 적의 공격과 영하 25도 이상의 혹한 속에서 적은 식량으로 헤쳐 나아간다는 것은 극한의 인내력을 평가하는 시험장이었다. 세르비아 역사가들은 이 혹독했던 동계의 탈출을 ‘알바니아 골고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언덕 이름)로 부른다. 철수 도중 생존을 위해 대부분의 중화기는 유기 되었는데 미하일로비치는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노획한 몇 정의 중기관총들을 끝까지 유지하며 철수하게 된다. 최종적으로15만 명 이상의 세르비아군 및 피난민들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탈출 도중 혹한과 굶주림으로 7만명 이상의 세르비아인들이 목숨을 잃고 만다. 생존자들은 인근의 그리스 코르푸섬 등에서 휴식 및 재편을 한 후 배 편으로 동쪽의 그리스 테살로니키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우게 된다.


미하일로비치는 테살로니키 전선에서 기관총 부대를 지휘 했는데 전투 중 부상을 입으면서도 절대로 후방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1918년 초에는 그의 기관총 부대와 함께 신설된 ‘유고슬라비아 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여 한다. 유고슬라비아 사단을 위시한 세르비아군은 적군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을 바탕으로 독일,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였고 1918년9월의 공세를 통해 적전선을 붕괴 시킨다. 조국이 있는 북쪽으로 진군을 계속하던 세르비아군은 동년 11월 1일에는 마침내 불굴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독일군으로부터 해방 시킨다.

 

1937년의 미하일로비치 모습

엘리트 장교    

전쟁이 끝났지만 세상은 그다지 평화로워 지지 않았다. 미하일로비치는 군에 남아 혼란스러운 조국을 위해 계속 봉사 하는데 그 사이에 세르비아는 주변의 슬라브계 나라들과 연합하여 명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쟁 영웅이자 사관학교 때부터 선두 그룹에 속했던 미하일로비치는 상관의 추천으로 1919년에 왕실근위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후 착실히 진급을 거듭하며 1925년에는 소령 계급장을 달게 되고 이후 최고의 엘리트 장교로 선발 되어 당시 육군 최강국이던 프랑스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위탁 교육을 받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경력은 전쟁성의 주목을 받게 되고 참모본부에서 근무한 후 1935년에는 과거 숙적이었던 불가리아에 무관으로 파견된다. 프랑스어, 영어 등 외국어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불가리아어 또한 익히게 되고 현지 고급 장교들로 구성된 슬라브 민족주의 단체 회원들과 어울린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남유럽 전체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의 국가로 묶으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불가리아 당국에 의해 의심을 사게 되고 그는 곧 본국으로 추방된다. 하지만 상부의 인정을 받았던 그는 곧 바로 체코에 무관으로 재발령을 받게 되고 1년 간 현지에서 주재 한다.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1937년에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주로 슬로베니아의 류블라냐, 세이예 등지에서 연대급 지휘관으로 근무 한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그는 당시 육군 장관이던 ‘밀란 네디치’에게 방어선을 새로 옮기는 수정된 유고슬라비아 방위 계획과 민족 별 부대 구성을 포함하는 제안서를 보고 했는데 이것이 육군 장관의 극렬한 분노를 야기한 것이다. 또한, 유고군 고위 장교로서 히틀러에 대한 반대 의견을 공공연히 표현한 것이 독일 대사 귀에 들어가서 외교적 마찰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나치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 직전까지의 미하일로비치의 인생 행적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엘리트 군인으로서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 왔지만 조만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침공 중인 독일군에 대항하는 유고슬라비아군

무너진 조국

1941년 봄 히틀러는 그의 세계 정복 계획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소련 침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비록 이전 해에 영국 본토의 항공전에서 굴욕을 맛보긴 했지만 그는 대서양의 프랑스에서 동부 폴란드의 비스툴라강까지 명실 상부한 유럽의 지배자였다. 당시 독일의 침공을 받지 않은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남부 유럽 국가들은 히틀러의 기세에 눌려 사실상의 친독일 정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당시 18세인 국왕 ‘페타르 2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한 파블레 왕자가 1941년 3월 25일에 독일과의 동맹에 가입한 것이다. 하지만 1차대전 시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적군으로서 4년을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의 정서에는 동맹에 대한 상당한 반감이 존재했다. 이것은 상당수가 반독일파인 유고슬라비아군 장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는데, 파블레 왕자를 주축으로 삼국 동맹 가입한 지 불과 이틀 만인 3월 27일에 군 참모총장인 ‘두산 시모비치’를 중심으로 ‘반독일-친영국’ 쿠데타가 발생했고 순식간에 성공했다.      


반독 쿠데타의 주축 세력들은 그들의 전면에 젊은 국왕인 ‘페타르 2세’가 있음을 홍보 했고 섭정이자 친독파인 파블레 왕자는 물러나게 되었다. 더불어 일반 국민들이 독일에 대한 반감을 유감 없이 쏟아 냈는데 독일 외교관이 일반인들의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고 나치의 깃발인 ‘하켄 크로이츠’가 훼손을 입는 등, 유고 국민들의 반독일 정서가 봇물 터지듯이 나오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반독 쿠데타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경악했고 나름 개인적인 배신을 당한 듯이 느끼며 엄청나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 순간 이미 모자이크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의 운명은 결정 되었다. 히틀러는 즉각적으로 독일 및 주변 동맹국들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고슬라비아군을 쓸어버릴 계획을 세우게 된다. 더불어 이전 해부터 동맹국인 이탈리와와 싸우고 있던 그리스도 굴복시킬 심산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전을 통해 대소련 침공이 다소 지연 되더라도 배후의 위협을 확실히 제거하고 싶어했고 자신의 배신감에 대한 복수를 하기를 원했다.  


마침내 독일과 동맹국들은 1941년 4월 6일에 유고슬라비아 및 그리스 침공을 개시한다. 공격의 본격적인 신호탄은 괴링의 루프트바페 (독일 공군)가 쏘아 올렸는데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철저히 파괴하기 위해4차에 걸친 공습을 실시했다. 이 공습을 통해 베오그라드의 발전소, 통신 시설 등 주요 인프라 및 군 주요 시설 등이 공격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국립 도서관이 전소 되어 세르비아 역사의 소중한 사서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육상에서는 막시밀리언 폰 바익스의2군, 빌헴름 리스트의 12군 및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1 기갑집단 등 독일군 최정예 부대들이 이탈리아, 헝가리군과 함께 3면에서 포위하며 공격했다. 이에 맞서는 유고슬라비아군은 수치상으로는 100만 대군이었으나 장비 면에서 독일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북서쪽의 크로아티아가 침공 하루 전인 4월 10일에 이미 독립국 임을 선언하며 독일 편에 붙은 상황 이었다. 질풍노도와 같이 전진하는 독일 및 추축군 앞에서 유고슬라비아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대책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침공 11일 만인 4월 17일에 항복을 하게 되었는데 국왕인 페타르 2세가 그리스를 거쳐 영국으로 탈출한 것이 유일한 성공이라 꼽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대령은 독일군 침공 당시 유고슬라비아 2군의 작전 참모장으로 사라예보 인근에 주둔 중이었다. 그는 진격하는 적을 막으려고 나름 노력 했지만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부에서는 4월 11일 공식적으로 항복 했지만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거부하고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서부 세르비아의 산악 지대로 이동한다. 그는 세르비아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발칸 반도의 험준한 지형을 무기로 삼아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하려 한 것이다.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미하일로비치 (1942. 5.25)

체트닉의 활동 및 티토와의 갈등

체트닉의 역사는 18세기의 오스만 터키의 점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터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싸움을 통해 말살 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터키에 대항하는 발칸 지역의 저항 단체를 통칭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외세에 저항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축소 된다. 사실 1차대전 중 전술한 ‘알바니아 골고다’ 이후 적진에 남겨진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자신의 마을을 거점으로 별도의 체트닉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불가리아군에 저항 하기도 했다.


조국이 독일군에 점령된 1941년 4월 시점에서 미하일로비치는 그의 조상들이 해왔듯이 다시 한번 체트닉을 조직했다. 그는 동년 5월에 중부 세르비아 고원 지대의 ‘라브나 고라’에 자신의 체트닉 저항군을 조직한다. 이것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에 있던 거의 유일한 대독 저항 조직이었는데 점점 더 많은 자원자들을 끌어 들이기 시작한다. 그의 조직 운영 방침은 조직을 충원하고 연합군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은밀하지만 충실하게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직접 대결 시 예상되는 독일군의 자국민에 대한 대규모 보복 (독일군은 자국 병사 사망자 1명 당 100명의 세르비아인 처형을 공언 했다.)을 피하고 다수 세르비아인을 기반으로 훗날을 도모 하려는 것이 그의 주요 목적이었다. 그는 자국 내 유일한 대독 저항 단체의 수장으로서 유고 망명 정부 및 영국과의 접촉을 시도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그는 라디오 송신을 통해 독일군 치하 유럽에서 최초의 부대급 지휘관으로서 무선을 타전한 것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그 종말의 시발점이 되는 소련 침공을 감행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까지 소련의 통제 하에 비교적 조용히 지냈던 좌익 및 공산당 계열이 반독 항쟁에 적극적으로 동참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7월과 8월 중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공산당 (빨치산)과 체트닉에 의해 추축군 시설 및 병력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일부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일시적으로 몇 개의 도시를 해방시키기도 했고 수백 명의 독일군 포로를 사로 잡았다. 이러한 가운데 상호 연합 작전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고 티토는 그의 빨치산과 체트닉 사이의 공동 작전을 모색하기 위해 9월 중순에 미하일로비치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티토는 미하일로비치의 신중한 대응 보다는 독일 및 추축군에 대한 즉각적인 태업과 광범위한 공격을 포함하는 적극적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투쟁 방식의 차이에 더불어 확연히 다른 그들의 이념은 서로 간의 불신의 늪을 더욱 깊게 했다. 그들은 대독 투쟁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 했지만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보이지 않는 긴장이 팽배했고 모임은 특별한 결말 없이 종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정 복고 및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미하일로비치와 사회주의 연방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티토는 처음부터 상호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이 시점부터 미하일로비치의 애매한 행동이 시작 되었는데 10월 말의 티토와의 2차 회동 이후 그는 은밀히 친독 괴뢰인 ‘밀란 네디치’의 세르비아 구국정부와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우지체’에 소총 제조 시설을 보유하고 있던 공산당 측의 무기 제조 및 보급을 막기 위해 이 곳을 급습 했는데 그 결과는 미미 했다. 이제 양 측간의 본격적인 충돌이 가시화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서방 세계에서 그는 대독 투쟁의 영웅으로 묘사 되었다. 그는 1942년 5월 25일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또한, 망명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1942년 6월에 미하일로비치를 ‘유고슬라비아 본토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 때가 대독 투사이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서 그의 인생의 정점이었을 것이다.


빨치산 시절의 티토 (좌)

연합군과의 단절

체트닉과 공산당이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유고 내의 역학 구도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 되었다. 우선 독일 및 이탈리아 점령군이 있었고 이들에 동조하는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와 세르비아 구국정부가 있었다. 이에 대척점으로 티토의 공산당이 있었고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닉은 추축군 측에는 은밀하고 간헐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세르비아인을 학살하는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와이념적으로 다른 공산당에는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구도가 펼쳐졌다. 사실상 유고슬라비아가 내전 상태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2차 대전 당시의 이러한 배경이 훗날 유고 내전의 또 다른 기원이다.)


공산당 측은 두 가지 이유로 사람들의 지지를 더 받게 되었는데 우선 자기 편에는 국적 및 인종을 가리지 않았고 침략자인 추축군을 확실한 적으로 인식 함으로서 피아를 분명히 하였다.

한편, 연합군 측 역시 체트닉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1942년 가을 이후에 그의 몇몇 분견대들이 이탈리아군과 협력하여 음식 및 무기를 제공 받았던 것이다. 이는 양자의 입장이 맞아 떨어진 경우였는데 이탈리아군 입장에서는 빨치산과의 전투에 자국 병사의 희생을 줄 일수 있었고 체트닉 입장에서는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여 향후 연합군이 발칸에 진공 할 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불어 체트닉이 다양한 학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도 영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실 체트닉은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인 ‘우스타샤’ 및 빨치산에 대해 엄청난 혐오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보스니아 무슬림까지 가차없이 학살 했다. 이것은 우스타샤 및 빨치산 측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 약 70만명을 살해 했다고 알려져 있다. 독일군 조차도 유고인이 유고인에 저지르는 학살에 전율을 했다고 하는데 많은 경우에 총알이 아까워서 곤봉이나 개머리판으로 죽을 때까지 희생자를 구타했다고 한다.


1942년 하반기 이후 연합군 측의 유고에 대한 입장은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우선 대독 투쟁에 있어 티토의 빨치산이 가장 적극적으로 성과를 보이고 있었고 체트닉은 조직이 불안정해지고 특유의 모호한 입장으로 적인지 아군이지 모르는 표리부동한 상대로 인식 된다. 1943년 초 영국 특수작전국 (SOE)은 수상인 처칠에게 체트닉이 이탈리아군과 협력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더불어 1943년 2월에는 체트닉에 파견되어 있던 영국군 SOE 소속  ‘스탠리 베일리’ 대령이 체트닉의 제 1 주적이 독일, 이탈리아군이 아닌 빨치산과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라고 보고 했다. 영국 정부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에 공식 항의 했고 점차 티토의 유고 공산당 쪽에 우호적인 태도로 변하게 된다.

 

세르비아에 있는 미하일로비치의 흉상

최후 그리고 이후의 평가

1943년 12월, 영국군은 미하일로비치에게 태업 및 추축군에 대한 공격을 요청하는 거의 최후통첩 수준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체트닉은 어떠한 대응도 없었으며 결국 영국은 1944년 봄에 자국 연락사무소 인원들을 철수 시킨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영국과의 협력 관계는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1944년 7월이 되자 미하일로비치는 미국의 전략 사무국 (OSS)와의 협력을 모색하고 이들에 대한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서 체트닉은 유고슬라비아 상공에서 격추된 수백 명의 연합군 항공기 승무원들을 구해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고 결국 1944년 8월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본토군 사령관 직함으로부터 해임 된다. 그리고 9월 12일에 국왕인 페타르 2세가 “티토의 유고해방군을 중심으로 단결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미하일로비치의 리더십에 치명타를 날린다.    


9월로 접어들자 소련군이 불가리아 등지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국경까지 진출 했다. 전진하는 소련군에게 미하일로비치는 전령을 보내 협조 의사를 밝히지만 도리어 그의 부하들은 소련 측에 체포되고 만다. 1945년 4월이 되자 체트닉은 사방에 적을 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산악 지대를 전전하며 후퇴하는 동안 부하들도 하나, 둘씩 탈영하게 되고 불과 천 여명의 지치고 초라한 인원들만 남게 된다. 독일의 항복 이후에도 그는 계속 도피를 이어갔고 결국 1946년 4월 13일 빨치산 측에 체포 된다.


재판에 세워진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과의 협력으로 조국을 배신한 죄’, ‘인류에 대한 전쟁 범죄’ 및 ‘빨치산에 대한 공격’ 등의 혐의로 기소 되었고 사형을 언도 받는다. 그가 구해준 연합군 항공기 승무원들에 대한 증인 신청은 기각 되었다. 재판은 총 24명이 기소 되었고 그는 1946년 7월 15일에 다른 9명의 체트닉 출신들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진다. 그는 처형되기 직전까지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의 소설인 ‘파르마 수도원’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편에 서서 싸우고 다양한 세파를 겪다 몰락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라는 이름은 티토를 수반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는 금기어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유고 연방이 해체 된 1992년 이후였다. 유고 연방은 민족과 종교에 따라 여러 개의 나라로 분쟁을 겪으며 갈라지게 되었는데 세르비아 또한 다시 주권국으로 독립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미하일로비치는 재평가를 받게 된다. 2015년 세르비아 고등 법원은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1946년의 판결을 뒤집고 그를 복권 시킨다. 이후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의 여러 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 제작 등이 시작 되었다. 그런 가운데, 앞서 비엘리나시의 사례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다. 비엘리나는 보스니아의 도시 이지만 그의 흉상 및 기념물이 세워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거주민의 80%가 세르비아계인 인구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세르비아에서 미하일로비치는 ‘대세르비아주의’를 앞세워 조국의 생존과 부흥을 꾀했지만 2차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국제 정치 상황과 빨치산 등 국내의 여러 요소들이 복합된 상황에서 안타깝게 처형된 희생양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주변국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의 그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웅과 배신자의 차이는 우리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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