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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6. 2021

레옹 드그렐, 마지막 파시스트

벨기에의 정치가, 군인 (1906~1994)


레옹 드그렐

1977년 말 벨기에의 프랑스어권 공영 방송인 ‘RTBF (Radio Television Belge de la communaute Fracncaise)’는 한 인터뷰 다큐멘터리의 방영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벨기에가 아닌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과거의 행적을 통해 지난 수십 년 동안 벨기에 사회에서 터부시 되었던 인물이었다. 방송국 최고위층 및 이사회까지 개입되어 격론이 벌어 졌는데 최종적으로 방송을 연기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연기 시기는 구체적으로 명시 되지 않았다. 결국 해당 프로그램은 무려 최초 논의 시기보다 11년이나 후인 1988년 3월에서야 방송 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최초의 5편에서 총 3편으로 축소 편집되어 방송 되었는데 매 편이 방송 될 때마다 벨기에 사회에서는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도대체 어떠한 사람의 인터뷰를 담았길래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는 바로 ‘레옹 드그렐’이라는 벨기에 태생의 스페인 시민권자로 과거 2차 대전 시 나치 독일군에 고위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었다.  그의 인생은 벨기에 및 유럽 현대사의 가장 첨예했던 부분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는데, 지금부터 그의 범상치 않은 생애를 살펴보고 이러한 논란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알아 보도록 하자.  

    


청년 활동가

유럽 북서부에 위치한 벨기에는 주변의 프랑스, 독일 및 네덜란드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그 구성원들도 이들 3개국의 혈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옹 드그렐은 그 중 프랑스어 사용권인 남부 왈롱의 ‘부이용’ (Bouillon)에서 프랑스계 아버지와 룩셈부르크계인 어머니 사이의 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두아르는 사업적, 정치적 야망을 가진 사람 이었는데 1901년에 벨기에로 건너온 후 맥주 양조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카톨릭 정당’의 지역 대표로서 정치에도 참여했다. 그의 가족은 지극히 엄격하고 보수적인 생활을 영위 했는데 주일은 물론 평일에도 미사를 빠지지 않고 드릴 정도로 열정적인 신앙을 유지했다.


드그렐은 학교에 들어가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미 15세에 지역 신문과 잡지에 시와 산문들을 기고 하기도 했다. 18세인 1924년에 벨기에 중부에 위치한 나뮈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프랑스의 급진파인 ‘샤를르 모라 (Charles Maurras)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반의회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 단체인 ‘악숑 프랑세즈 (Action Francaise)’의 맹렬한 행동가였던 모라의 ‘통합주의 (Integralism)’ 이론은 이후 그의 인생 행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더불어 카톨릭계 청년 단체에서도 활동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전공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험에 낙제하고 만다. 하지만 활동적이고 글을 즐겨 쓰던 그를 눈 여겨 보던 카톨릭 사제에 의해 ‘루뱅’ 지역 학생 신문 편집을 맡게 되고 이를 통해 그의 친카톨릭, 친보수적인 견해를 벨기에 곳곳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후 ‘20세기’라는 신문의 편집장을 맡게 되었고 ‘크리스투스-렉스 (그리스도 왕)’이라는 출판 회사의 관리자가 된다. 그러던 중 그의 진정한 재능을 시험해 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렉스당의 깃발을 배경으로 연설 중인 드그렐

정치 입문과 렉스당의 부상

세계 경제 공황이 한창이던 1932년 11월, 벨기에 에서는 총선이 열리게 되었고 드그렐은 ‘카톨릭 당’의 선거 캠페인 담당자로서 각종 캠페인 문구를 만들고 팜플렛을 제작한다. 그는 짧고 간결한 문구와 색체를 동원하여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 될 수 있는 브로셔 및 소책자를 190만장 이상 배포했다. 또한 ‘땡땡(Tin-Tin)의 모험’으로 유명한 만화가 에르쥬 (Herge)의 간결한 포스터를 활용하기도 했다. 결과는 카톨릭당이 제 1당으로서 승자였지만 노동당도 많은 의석을 얻음으로써 절대 강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전 전문가로서의 재능은 유감 없이 발휘 되었다.


선거 후 드그렐은 1933년 7월에 ‘크리스투스-렉스’ 출판사를 인수하고 동명의 잡지인 ‘렉스’를 본격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련의 글을 통해 그가 추진 하려는 정치관과 미래상을 피력하기 시작 했다. 드그렐은 자유주의는 부패했다고 싫어했으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도 모두 극도로 혐오했다. 그의 이상은 카톨릭과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가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회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카톨릭당은 너무 온건하며 언젠가는 자신의 정치 세력 (렉시스트)이 넘어야 할 목표로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톨릭당과의 동거나 협력은 불가능 했다. 결국 1935년 중반 이후 드그렐은 이들과 멀어지게 되고 1936년 2월에 공식적으로 결별을 하게 된다. 이제 그 만의 독립된 길을 가야 할 시간이 오게 된 것이다.


렉시스트/렉스당의 본격적인 정치 참여는 1936년 5월의 총선부터였는데 드그렐은 주로 신실한 카톨릭 교인, 제대 군인 및 자영업자 및 실업자들을 핵심 지지층으로 삼고 적극 공략 했다. 당시의 선거 결과는 이전과는 반대로 노동당이 승리했는데 이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예상치 못했던 일이 하나 발생했다. 드그렐의 렉스당이 11.5%의 득표율을 보이며 제 4 당으로 급부상 한 것이다. 하원에서 렉스당은 202석 중 21석을 차지 했으며 상원에서도 101석 중 8석을 차지하며 신생 정당 이상의 선전을 했다. 렉스당이 벨기에 정치계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렉스당도 한계는 있었는데 지지층이 프랑스어권인 왈룬 지방으로 제한 된다는 것이었다. 북부의 네덜란드어권인 플랜더스 지방은 유사한 성격의 ‘플랜더스 국가 연합 (VNV)’이 자리잡고 있었다.


선거의 승리를 통해 그는 국제적인 인사로 지명도를 높이게 되는데 우선 같은 파시스트 정당이 지배하는 이태리에서 초청을 받게 된다. 그는 1936년 7월에 무솔리니와 만나서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고 재정 지원을 약속 받는다.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에 마침내 베를린에 가서 히틀러와 만나게 되고 반공, 반자본주의에 대한 공통 관심사를 토대로 재정 지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 드그렐은 나치의 반교회성 정책에 반발하였으며 독일의 재무장에도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드그렐은 국내로 돌아와 여러 파시스트 행사 및 행진을 주최하며 세를 과시하려 하는데 번번히 정부에 의해 금지 된다. 그는 히틀러의 빠른 권력 장악 과정을 통해 한가지 방법을 고안하는데 사퇴를 통한 보궐 선거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선거가 조기에 실시되면 다른 정당들은 표가 분산되고 대중들이 렉스당을 선택하여 합법적으로 정권을 차지 할 수 있다는 계산 이었다. 하지만 그의 위험성을 간파한 노동당과 자유당이 연합 후보를 내고 심지어 공산당 마저 이들을 지지한다. 결정타는 벨기에의 추기경인 ‘판 로이’가 렉스당을 “국가와 교회에 대한 위협”이라고 간주하며 시민들의 투표를 독려 했을 때였다. 드그렐은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하게 되고 그의 상승세는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이후 그는 나치에 본격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이들의 핵심 이론인 반유대주의를 렉스당의 이념에 포함시키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드그렐은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의 운명을 결정 지을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침공하는 독일군의 포로가 된 벨기에군

독일의 점령과 ‘왈롱 군단’의 창설

독일이 2차대전을 개시하고 영국,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 했을 때 드그렐은 강력하게 벨기에의 중립을 주장했다. 사실 벨기에는 1차대전 때 중립을 선언하다가 독일에 침공 당한 아픔이 있었다. 따라서 심정적으로는 연합군 편이었지만 여전히 독일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때문에 겉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 독일군 ‘B집단군’이 서부전선의 오랜 침묵을 깨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하자 독일과 교전 상태에 들어간다.


독일군의 침공 즉시 벨기에 정부는 친독일적인 드그렐과 많은 렉스 당원들을 국가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체포 하였다. 그는 벨기에의 브뤼헤에 감금 되어 있다가 연합군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프랑스 일대를 끌려 다니게 되는데 프랑스가 항복하고도 한 달이 지난 7월 22일에서야 풀려 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독일 측 고위 인원들과 접촉 하게 되었는데 독일과의 협력을 통해 그의 정치적 이상 (예를 들어 ‘대벨기에’ 건설)을 달성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치 점령 하의 벨기에로 돌아온 드그렐은 그의 렉스당 조직을 강화하고 국왕인 레오폴드 3세를 보좌하는 유력 정치인들을 만나며 정치의 중심에 서려 했다. 하지만 국왕인 레오폴드 3세부터 많은 정치인들 및 벨기에 교회까지 그를 싫어했고 나치 역시 렉스당에게 권력을 주기를 주저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대중과의 호흡을 통해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당 신문인 ‘진정한 국가 (Le Pays Reel)’를 통해 렉스당에 대한 홍보에 주력했고 대중에게 ‘렉스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전국을 돌았다.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는데 많은 대중들이 그를 파시스트로서 독일군과 동일시했다. 1941년 1월이 되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드그렐은 독일 점령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력 할 것임을 공식 선언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최악의 결정이었는데 왈롱 지방의 프랑스어권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 쳤다. 배신자의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6월 이후 독일은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졌고 드그렐은 이 상황을 기회로 보고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 소련’에 대항하여 독일과 함께 싸우는 군대를 조직 함으로서 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 했고 렉스당원을 중심으로 지원병 모집을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북부의 플랜더스 지방에서도 ‘플랜더즈 국가 연합 (VNV)을 중심으로 독자 부대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 측과의 복잡한 문제가 있었는데 나치의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볼 때 렉스당이 기반한 왈롱 지방의 사람들은 게르만족이 아니었다. 독일군이 게르만계인 ‘플랜더스 군단’을 더 신뢰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왈롱 군단의 모병 포스터

자신이 지휘하는’왈롱 군단’ 중심으로  ‘벨기에 군단’을 만들려는 드그렐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더불어 초기 지원 상황도 지지부진 했는데 렉스당원을 중심으로 모집이 시작 되었지만 지원 인원은 목표 대비 30%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드그렐은 자신이 직접 사병으로 지원하는 강수를 두게 되는데 이것이 효과가 있어서 8월까지 850명 이상의 인원들을 모집하게 된다.

엘리트 집단인 ‘무장 친위대 (Waffen-SS) 소속의 ‘플랜더스 군단’과는 다르게 ‘왈롱 군단’은 독일국방군 (Wehrmacht)’ 소속이었고 편제상으로 ‘373 대대’라고 명칭 된다. 비록 같은 편이었지만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비게르만계인 ‘왈롱 군단’은 2선급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들은 기초 훈련을 위해 동부 독일로 이동하게 되고 ‘대 벨기에’라는 이상에 적합한 ‘X’자 모양의 ‘부르고뉴 십자가’를 부대 마크로 하였다.


소련에서 부하들과 함께한 드그렐

동부 전선에서의 활약

왈롱 군단은 소련의 전장으로 향하며 자신들이 싸우는 이유가 ‘절대 악’인 공산주의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고 이것이야말로 조국 벨기에에 대한 애국 임을 철저히 교육 받는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독일군 소속으로서 히틀러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는 것에 반감을 갖는 등 훈련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대는 1941년 11월에 남부집단군 소속 17군 예하 부대로 배속되어 우크라이나의 ‘도네츠 분지’에 투입 된다. 이 곳에서는 본격적인 전투가 아닌 후방의 치안 및 게릴라 소탕을 담당 하였다. 이듬 해 2월 말 드디어 본격적인 전투에 참가 하는데 우크라이나 남부의 작은 마을인 ‘흐로모바 발카’에서 동계 전투 이후 잔뜩 기세가 오른 소련군을 막아내는 임무였다. 3월 2일까지 전개된 사흘 간의 격전에서 왈롱 군단은 병력의 삼분의 일이 희생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을 통해 함께 싸웠던 독일군 측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강한 신뢰를 얻게 되었다.


드그렐은 이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 받아 상등병 (Feldwerbel)으로 진급하게 된다. 이후 그는 벨기에에서 신병들을 추가로 모집했고 부대는 다음 작전을 위해 재정비 하게 된다. 1942년의 독일군 하계 공격 (청색 작전: Fall Blau)에서 왈롱 군단은 주력군의 보급선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장친위대 소속인 ‘비킹 (Viking)’ 사단의 ‘펠릭스 슈타이너’와 만나게 되고 이들의 규율 및 기풍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 해 12월 드그렐은 베를린에 소환 되어 제 2의 왈롱 군단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게 되는데 그의 마음은 이미 무장친위대에서 싸우는 것으로 기울어 있었다. 여러 차례의 협의와 설득을 통해 1943년 6월 그와 ‘왈롱 군단’은 ‘무장친위대 왈로니아 돌격여단’으로 개편 된다. 비게르만계인 왈롱 군단이 무장친위대에 수용 된 것은 독일군 측에서도 이들의 용맹함을 인정 했다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독일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드그렐은 부대의 부지휘관으로 영전하게 된다.


1943년 10월 그의 부대는 차량화 여단으로 개편 되어 전투력 전반에 개선이 이루어진다. 한편 ‘크리스마스 이브’에 소련군은 드네프르강 일대에서 공격을 감행 하는데 ‘왈로니아 여단’은 비킹 사단과 함께 강의 서안을 방어한다. 하지만 소련군의 압도적 병력 및 화력 앞에 밀리게 되고 이후 1월18일에는 ‘체르카시-코르순’ 일대에서 소련군 2개 전차군에 완전 포위 당한다. 드그렐의 부대를 비롯한 6만 명의 독일군이 갇혀 버린 것인데 독일군은 항공 보급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제 2의 스탈린그라드가 재현 될 상황이었다. 기세가 오른 소련군은 2월 17일에 독일군을 섬멸 하고자 했고 독일군은 독일군 대로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가려 했다. 왈로니아 여단은 후위 부대로서 처절한 사투를 통해 독일군의 철수를 엄호했다. 이 과정에서 여단장이 전사하고 드그렐이 부대장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여단 병력 2천여 명 중 드그렐을 포함한 632명 만이 살아 남았다.  이때의 공적으로 그는 친위대 대령 (Sturmbannführer)으로 진급하고 최고의 영예인 ‘곡엽 기사 철십자훈장’을 히틀러로부터 직접 수여 받는다. 이 수준의 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10 여명에 불과한데 그 수훈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같은 동맹국의 거물들이었다. 드그렐은 비독일인 중 거의 유일하게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훈장을 받은 경우였는데 독일 입장에서 그는 친독일적인 유럽인의 모범이자 영웅이었다.


이후 부대는 재편을 위해 벨기에로 돌아오게 되고 모병 등 독일의 각종 선전에 동원 된다. 1944년 9월이 되자 연합군이 벨기에로 진군 하려는 상황이 전개 된다. 10월에 드그렐은 그의 부대를 사단급으로 확대 개편하게 되고 ‘무장친위대 제28 왈로니아 척탄병 사단’이라는 제식 명칭을 받지만 부대 인원은 프랑스와 스페인 지원병까지 포함해도 전투 가능 인원은4천명을 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독일군의 패배는 분명해 보였고 ‘왈로니아 사단’은 끝도 없이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막기 위해 동부 독일 일대에서 몇 차례의 격전을 치루게 된다. 이제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해안에 불시착한 드그렐의 비행기

탈출과 망명 생활

종전이 다가옴에 따라 드그렐은 엄청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친나치 우익 파시스트’로서 철저한 복수를 노리고 있는 소련군에게 항복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당시의 모든 독일군들이 그랬듯이 어떻게든 서쪽으로 이동해서 미군이나 영국군에 항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왈로니아 사단은 1945년 2월에서 3월까지 동부 독일의 오데르강과 슈테틴 일대에서 소련군과 힘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투 손실로 인해 병력은 600여명 수준까지 줄었고 4월 20일에 소련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후에 드그렐은 병사들에게 영국군이 있는 뤼벡으로 후퇴 하도록 명령했다. 벨기에 부대는 거기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면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드그렐은 이미 연합군을 피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그렐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차량 편으로 5월 1일 북부 독일의 ‘칼크호르스트’에 도착한다. 이 때 연합군과 별도의 강화를 맺으려는 친위대 수장 ‘하인리히 힘러’와 합류하게 되는데 그와 함께 히틀러의 후임인 칼 되니츠 제독을 만나기 위해 플랜스부르크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동 과정에서 힘러를 놓치게 되고 향후 이동로를 고민하던 중 5월 3일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배 한 척을 얻어 타고 아직은 독일군 수중에 있는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향한다.

독일이 항복하던 날인 5월7일까지 오슬로에 머물던 그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직감했다. 바로 오슬로 내 공군비행장으로 이동해서 수송기로 개조된 하인켈 ‘HE-111’ 한 대를 징발했고 기수를 남쪽으로 향한다. 그의 목적지는 같은 파시스트인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이었는데 해당 비행기의 최대 항속 거리를 넘어서는 모험이었고 연합군 지역인 프랑스를 한참이나 지나야 했다. 무게를 최대한 줄이고 저공 비행으로 이동하던 그의 비행기는 연료가 바닥 날 시점에 스페인 북부 비스케만의 산세바스티안 해안에 불시착한다.


불시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와 일행은 이후 스페인 당국의 감시 속에 지내는데 연합군 측은 집요하게 그의 송환을 요구한다. 하지만 스페인 당국은 전 비시정부 수상인 ‘피에르 라발’을 돌려 보낸 이후로 (송환 3개월 후 프랑스에서 반역죄로 사형 당함) 누구도 돌려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이것을 드그렐의 인권에 대한 문제라고 주장 했다. 그는 이미 1944년 12월에 열린 벨기에 법정의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벨기에와 스페인 정부가 드그렐의 송환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1947년 8월 스페인 정부는 그가 억류 중 병원에서 사라졌으며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발표 한다. 사실 누구나 짐작 할 수 있었듯이 그는 스페인 당국의 비호 아래 지중해의 말라가에서 숨어 지냈다. 그리고 1954년에는 한 스페인 여성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레온 호세 데 라미레즈 레이나(Léon José de Ramirez Reina)’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이후에도 그의 송환 관련 몇 차례 얘기가 불거졌지만 그는 더 이상 숨지 않았다.

이후 그는 스페인 내 우익 및 과거 참전군인들의 도움을 통해 건설업을 할 수 있었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의 건설 회사는 스페인 내 미군 비행장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각종 파시스트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 했는데 심지어는 ‘친위대 정복’에 훈장을 달고 등장했고 과거 히틀러의 특수부대 출신이던 ‘오토 스코르체니’와 만나는 모습이 포착 되기도 했다. 1975년 프랑코 총통의 죽음 후에 스페인에 민주 정부가 들어섰지만 그는 송환되지 않았다. 오히려 1983년에는 벨기에 당국이 그의 귀환을 금지 시키는 반대 결정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심판 받지 않고 편안히 삶을 마감할 것만 같던 그가 대중에게 다시 한번 각인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드그렐과 법정 공방을 벌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비올레타 프리드만

‘홀로코스트 재판’ 그리고 최후

1985년 7월 스페인의 주간지인 ‘엘티엠포 (El Tiempo)’는 유대인 대학살을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하는 드그렐의 인터뷰를 싣는다. 드그렐은 600만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 되었다는 사실은 조작 또는 과장 되었으며 강제수용소에 있다는 가스실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해당 기사는 스페인 및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으며 대중의 엄청난 분노를 야기 시킨다. 스페인 내 유대인 사회는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대응에 나선다.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이자 당시 스페인에 거주 중인 ‘비올레타 프리드만’을 전면에 내세운다. 프리드만은 루마니아 트랜실바니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14세의 나이에 아우슈비츠에 끌려 갔으며 대부분의 가족이 그 곳에서 살해 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과거의 악몽을 피해 이주한 스페인에서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접하게 된 그녀는 드그렐의 주장을 도저히 묵과 할 수 없었고 재판을 신청하게 된다. 


그녀의 변론을 맡은 변호인단은 고민하게 된다. 현재의 스페인법 상에서 그의 표현을 제재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 재판 과정도 드그렐에게 유리하게 흘러 갔는데 판사들은 ‘표현의 자유’를 들며 그의 발언이 특별히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91년에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드그렐의 발언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속하지 않으며 유대 민족 및 홀로코스트 희생자들 전체에 대한 모독을 했다고 판결했던 것이다. 이 판결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신나치 및 극우 수정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6년 간의 힘겨운 재판은 종료 되었지만 드그렐은 그저 벌금형을 선고 받았을 뿐이었다. 이후 그는 이전과 마찬 가지로 친나치 활동을 계속하고 ‘CEDADE’와 같은 스페인의 네오나치 단체들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드그렐은 1994년 4월에 심장마비로 사망 했는데 프랑스 ‘국민 전선’의 ‘장 마리 르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극우 세력들이 그를 애도했다. 그는 결국 처벌받지 않았다.


카톨릭 신앙에는 열심이었지만 홀로코스트를 끝까지 부정하며 진짜 학살은 미국의 히로시마, 나카사키 원폭투하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그렇게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유럽 곳곳 에서 그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와 생각을 같이하는 추종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아마도 이런 이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 편에 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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