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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Nov 28. 2021

에필로그

전쟁 속의 변절자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고대 전쟁을 다루고 있는 영화 ‘300’을 보면 배신자 ‘에피알테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백만 페르시아 대군을 막기 위해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용전을 펼치고 있던 스파르타군은 에피알테스가 페르시아군에게 샛길을 알려주는 바람에 전멸하게 된다. 그는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자신의 조국을 배신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는 처참했다.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의 정예 부대는 예측하지 못했던 측면을 공격 당했고 결국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다. 에피알테스의 사례는 아마도 역사가 기록된 이후에 나오는 배신 또는 변절의 사례 중 가장 초기의 사례가 아닌가 생각 된다.


인류의 역사에는 이러한 보상과 금전을 노린 배신자들의 사례가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변절자들과 비교해보면 여러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선 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2차세계대전 전과 직후의 기간으로서 공산주의, 파시즘 등이 대두하고 대립했던 극단의 시기였다. 이 와중에 이들 대부분은 대외적인 보상 보다는 자신의 신념과 이상에 따라 행동 하였다.

 ‘카렐 추르다’와 같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향한 이가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일 만큼 이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이상에 투철했다.

문제는 그러한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부분인데 잘못된 이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결과는 대단히 파국적이었다.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민족 및 조국에게까지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다.

 ‘비드쿤 크비슬링’이나 ‘레옹 드그렐’의 경우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적군과의 협력을 통해 많은 자국과 타국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레옹 드그렐이 어느 인터뷰에서 “후회하는 것이 없나?”라는 질문에 “후회스러운 것은 바로 우리가 이기지 못한 것이다”이라고 대답한 점은 이들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조국의 배신자이고 지금까지도 용서 받지 못한다.

한편 ‘선과 악’이 아닌 ‘악과 악’ 사이의 선택에서 고민을 했던 경우도 있다. 자신이 속한 곳의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른 쪽으로 넘어 갔지만 그 곳 역시 기존에 처했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철저히 양쪽으로부터 이용당했고 결국은 버림 받거나 처벌 받았다.

 ‘안드레이 블라소프’와 ‘발터 폰 자이틀리츠’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조국의 배신자로 잔인하게 처형 당한 블라소프와는 달리 자이틀리츠는 살아 남아서 조국으로 귀환했지만 과거의 전우 및 독일 국민들로부터 대단히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프로이센 최고 명문가의 자존심 강한 ‘융커’ 출신으로서 이러한 냉대는 죽음보다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냉혹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내동댕이쳐진 사람도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불행한 사례가 바로 이런 경우라고 생각 되는데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서 생각지도 못하게 적국에 협력 하면서 배신자로 낙인 찍힌 케이스다.

 ‘아이바 도구리’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 상태에 돌입한 이후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운명을 수도 없이 원망 하였을 것이다. 이후 그녀의 행보는 그저 생존을 위한 삶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훗날 미국 정부의 극적인 사면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배신자로 낙인 찍힌 채 비참하게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판단하기 어려운 사례 중 하나는 아마도 ‘앙리 페탱’의 경우가 아닐까 한다. 그는 한때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전쟁 시 행보를 보아도 백 퍼센트 배신자라고 단정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페탱은 ‘프랑스의 대원수’로서 사람들의 엄청난 존경을 받았고 사실 독일과의 패배 이후 굳이 괴뢰 정부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맡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그의 선택 자체는 나름의 애국심에서 나온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비시 정부 아래에서 벌어진 많은 체포, 감금 및 부역행위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반면 그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조국의 위신을 세우고 나치로부터 완충 역할을 하여 완전한 프랑스의 몰락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사회에서 페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조국의 영웅으로 등극하거나 역사적인 재평가를 받는 사람도 있다. 인도 콜카타시 곳곳에는 찬드라 보스의 동상과 벽화가 있다. 그가 독재자 히틀러와 악수하는 모습을 딴 벽화까지 있을 정도이니 인도에서 그의 위상을 짐작 하고도 남을 것이다. 보스의 경우는 2차대전 이후 영국이 식민지 인도의 지배를 끝내려 한 시점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을 했다. 영국이 더 오랜 시간 동안 인도를 지배 했다면 그가 그렇게 빨리 영웅시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경우는 재평가 받기 위해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그의 최대 정적이었던 크로아티아 출신의 ‘티토’ 였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 했다. 유고 연방이 해체된 1990년 이후에나 그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있었다. 미하일로비치에 대한 평가도 진영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세르비아인들에게 그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한 위대한 민족의 영웅이지만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의 이슬람계 커뮤니티에서는 여전히 나치와 차이 없는 극악무도한 학살자의 대명사이다.     


마지막으로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태생적으로 나치와 맞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베를린과 조국 독일을 사랑했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영혼과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함께 할 공간은 존재 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그리고 헐리웃을 선택 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결과였지만 더불어 마음의 짐을 지우는 선택이기도 했다. 훗날 일부 독일인들이 그녀에게 지극히 차갑게 대했을 때에도 그녀는 겉으로는 당당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독일을 다시 방문하지 않은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이제는 가장 유명하고 사랑 받는 베를린 출신 배우로서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인물들의 사연과 평가를 살펴보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과 사연들은 계속해서 존재 할 것이란 점이다. 유사한 상황에 직면 할 때 여러분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과연 누가 변절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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