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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ug 30. 2023

건조체 글쟁이의 삐딱한 세상-꼴통

128. 목숨장사

얼마 전 모 기업 빵공장에서 일하던 이십 대 젊은이가 작업 중 끼임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2인 1조 작업이라는 현장 매뉴얼대로만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로 사망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 목숨을 잃은 것 같아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누군가의 딸이자 아들인 젊은 자식들이 일을 하다 작업장에서 자주 목숨을 잃습니다. 기성세대인 저희는 그런 일들을 기사로 무덤덤하게 접하게 되고요.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어리고 젊은 세대들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큰 죄책감을 안깁니다. 그리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 역시도요. 그렇다 보니 그들 또래의 자식을 가진 부모들의 마음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 젊은 이들의 죽음이 그 사실 인정 자체로만 끝이 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후 보상문제가 또 다른 문제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사람들은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 회사를 상대로 많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면 “자식 목숨 값으로 팔자를 고치려고 하네” 라든가 “자식이 죽었는데 돈에 눈이 멀었네 “ ”돈 앞에는 자식도 없네”라는 등 차마 입에도 담기 힘든 악플들을 쏟아 놓습니다. 즉 합당한 보상을 바라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매도해 버리는 것이지요.



  저는 요즘 이런 사회의 분위기를 볼 때마다 감정이 격하게 동요됩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사고를 당 할 그 나이까지 온 정성을 쏟아 애지중지 키운 아이를 부유한 회사 측의 안전의무 이행 소홀로 잃게 되었는데 왜 좀 많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게 피해자 측이 비난을 받아야 되는 일입니까.



  저는 혹여라도 그렇게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있다면 사측으로부터 악착같이 받아 낼 만큼 받아내라고 말할 것입니다. 회사에 대한 징벌적 의미로라도 말입니다. 설사 “자식의 죽음으로 돈 장사하고 팔자 고치려 한다”는 식의 악담을 듣더라도요. 저는 그게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제 자식의 죽음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회사 측도 안전의 심각성을 새삼 각성할 게 아닙니까.



  그동안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측은 늘 가볍게 처벌을 받고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 하는 약자가 비난받는 일이 이루어지다 보니 안전의무를 다하는 것보다 책임을 용역업체로 떠넘기며 보상금으로 그렇게 대충 몇 푼 챙겨주는 게 더 이득이 되니 사측들이 변하지 않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안전규정을 지키지 않은 사측을 나무라기보다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가족을 험담하는 이런 사회적 풍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돈 많은 사측이 자신의 재산에 조금이라도 피해 보는 것이 싫어 적은 돈을 지불하려고 그런 말을 한다면 또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을의 입장으로 자기 자식, 또는 자기 자신이 그러한 일터에 내몰려야 하는 서민들이 더욱더 그런 말을 하는 것에 앞장서는 것을 보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목숨은 금전적으로 재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죽으면 평생 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보고 싶은 그리움에 사무쳐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 평생을 볼 수 없는 그리움과 슬픔을 간직한 체 살아가야 하는 피해 가족들의 목숨의 상실 앞에 얼마만큼의 돈이면 족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억만금을 준들 위로가 되겠습니까. 당신들은 얼마만큼의 돈만 던져주면 자식이 죽어도 그 슬픔이 금방 사라지기라도 합니까. 그래서 저는, 설령 “목숨 장사”를 한다는 말을 듣더라도 안전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사고를 키운 기업들을 상대로 악착같이 피해 보상금을 받아 낼 수 있을 만큼 많이 받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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