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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Nov 06. 2023

향수

잡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숲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고등학생 때였어요. 2학년 작문시간이었지요. 과목 선생님은 여선생님이 셨어요. 저의 담임선생님이기도 하셨죠. 저는 그때 이 정지용의 시 향수를 처음 들었어요. 제가 시를 읽었다고 하지 않고 들었다고 하는 것은 선생님이 시를 알려주며 성악가 박인수와 대중가수 이동원이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 함께 부른 게 있다면서 카세트와 테이프를 가져와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들려주셨기 때문이에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시골이라 그런지 들판의 벼들이 노랗게 물드는 이 맘 때면 항상 이 노래가 떠 오르네요. 이제는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던 아버지도 안 계시고 고향의 들판도 개발로 인해 공장과 아파트가 들어서 더 이상 무르익는 벼들의 향연은 볼 수 없지만 기억 한쪽에는 언제나 그곳이 있어요. 꿈에서도 잊히지 않을 그곳이요. 비록 그곳의 생활은 지지리 궁상이었지만 이제는 디시 볼 수 없는 그곳이 그래도 참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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