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_ 1화. 나는 후회로 늙어버렸다.

소설 <다시, 나의 봄> 1화

by 미소 달

1화: 나는 후회로 늙어버렸다.



죽음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새벽 햇살이 부엌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공중을 떠돌았고,

그것은 마치 오래된 시간의 부유물처럼, 빛 속에서 부드럽게 떨렸다.


복자는 휘어진 허리를 일으키며 창가를 지나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끝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바닥을 스쳤고, 어깨는 제 무게에 짓눌린 듯 아래로 처져 있었다.

오른손은 벽을 더듬듯 짚고 있었고, 왼손은 깊게 마른 손등 위로 부드럽게 얹혀 있었다. 마치 잊지 않으려는 무엇처럼.


탁탁, 시계 초침 소리.

쨍쨍, 새벽 햇살이 거실 바닥에 찍어내는 희미한 빛의 조각들.

그리고 늙어가는 몸, 아니, 이미 늙어버린 몸.

한 겹 한 겹 말라가는 나뭇가지처럼 천천히 낡아가는 것.


복자는 80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할머니”라고 부르고,

복자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는 아침이다.

낡은 법랑 냄비 하나가, 늘 그렇듯 가스레인지 한편에 놓여 있었다.

복자는 손에 든 우유팩을 반쯤 눌러서 냄비에 천천히 따랐다.

차가운 액체가 하얗게 퍼지며 철 냄비의 바닥을 적셨다.

칙… 푸웅

가스불이 켜지는 익숙한 소리에 복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불이 붙는 소리는 늘 그랬듯,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신호 같았다.


복자는 그 불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의자에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멈췄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테이블 위 휴대폰이 진동하며 살짝 떨렸다.

‘딸’이라는 두 글자가 화면 위에 떠올랐다.


“응, 뭐 해 엄마?”

익숙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흘렀다.


“우유 데워. 아침에 한 잔 마셔야지.”

“약은 꼭 챙기고. 알았지? 그리고 오늘은 병원 예약 있잖아.”


복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딸은 그 침묵을 이해하는 듯, 혹은 모르는 듯, 빠르게 덧붙였다.


“엄마, 너무 쳐져있지 말고! 조금 있다 점심즈음에 내가 데리러 갈게! 알았지?”


통화가 끊기고,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우유가 끓기 시작하며 부드러운 기포가 표면을 맺었다.

복자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가스 불을 껐다.

가스레인지 옆 컵에는 우유가 채워지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아주 오래전부터 꺼내지 않았던 방 한쪽 서랍이 떠올랐다.


책상 밑에 있는 오래된 서랍.

그 안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글을 쓰던 노트북이 있다.

남편이 죽기 전,

어쩐 일로 백화점에 데려가서는 “당신 꿈을 써보라”며 사주었던 물건.

하지만 복자는, 그 노트북을 채 한 해도 쓰지 않고 덮어버렸다.



갑자기 서랍 쪽으로 몸이 움직였다.

무릎이 삐걱이고 허리가 찌릿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꺼내야만 할 것 같았다.


손을 넣어 더듬던 순간,

노트북 표면에 닿은 손끝에서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다.

먼지가 묻은 검은 본체.

아직도 그 모서리에 붙어 있는 분홍색 포스트잇.

글씨는 바래 있었지만, 또렷했다.


“당신 이름으로 쓰세요.

당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남편이 죽기 전 남겼던 메모였다.

복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노트북을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햇살이 주방 창문을 통해 부엌으로 스며들었다.

햇빛 속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노트북 위로 작은 입자처럼 내려앉았다.


복자는 손바닥으로 노트북을 닦았다.

어느새 아침 바람이 창문 사이로 들어와 머리칼을 스치고,

마치 누군가 내 곁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휭—’ 하는 구식 팬 소리와 함께

검은 화면이 천천히 켜졌다.


그 순간,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모니터 유리에 비친 복자는

생각보다 많이 늙었고,

생각보다 무표정했다.


복자는 무의식 중에

주름진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이건 나일까?

내가 정말, 이렇게 살아온 걸까?‘



노트북 화면이 완전히 켜졌다.

배경화면은 오래전 남편과 찍은 제주도 사진이었다.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복자가

남편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진.

웃고 있었지만, 복자는 기억난다.

그때도 마음 한구석엔 허전함이 있었다는 걸.


파일 목록을 하나씩 살폈다.

그중 하나,

‘Untitled_1.doc’

아무 이름도 붙이지 못한 글이었다.


복자는 그걸 더블 클릭했다.



낡은 워드 창이 열리며,

아주 오래전 써두었던 소설이 등장했다.

제목도 없고,

주인공 이름도 없고,

문장도 서툴고 엉성했지만,

분명히 그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아…”


복자의 입에서 작게 탄식이 흘렀다.

말도, 울음도 아닌

숨 막히는 감정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 순간,

화면이 이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듯

노트북 화면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현기증인가..?’

복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방 안엔 바람 냄새와

벚꽃 향기가 가득했다.


창밖을 봤다.

봄이었다.

무심한 듯 흘러내리는

연분홍 꽃잎들이 마당을 덮고 있었다.


식탁 위엔

작년에 버린 줄 알았던 분홍색 독서안경이 놓여 있었고,

벽시계는 오전 9시 10분.


복자는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선 사람은,

주름은 여전했지만 분명히

지금보다 15년은 젊은 나였다.



“설마…

이게 정말…

다시 돌아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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