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시, 나의 봄> 5화.
복자는 여느 때처럼 아침 햇살을 맞으며 느긋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그녀의 손엔 익숙한 머그잔이 들려 있었고, 부엌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테이블 위, 태블릿 화면이 켜진 채 놓여 있었다.
‘조회수 17회’
그 아래, 작은 말풍선 하나가 떠 있었다.
“복자님, 말씀 참 따뜻하시네요. 제 할머니 생각나요. 다음 영상도 기다릴게요!”
복자의 손이 그 댓글을 몇 번이나 눌렀다.
작고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그녀의 마음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래…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녀는 입가를 가만히 닫으며 미소 지었다.
그 댓글을 또 누르고, 또 읽고, 댓글 단 사람의 닉네임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만히 손끝으로 화면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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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집정리를 하는 복자는 유난히 느림보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복자답지 않게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빨래를 개다 말고, 부엌에서 마늘을 까다 말고, 거실에 멍하니 앉아버리기를 여러 번.
그때였다.
서랍 깊은 곳에서 오래된 검은색 천 표지의 일기장이 복자의 손에 닿았다.
표지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몇 장을 넘기다, 그녀의 시선이 한 문장에서 멈췄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뭘까, 복자야.’
그 아래엔 남편의 단정한 글씨체로 이런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너와 함께하기 위해서 참 많은 선택을 했지.
그런데 그게 늘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날들조차도.”
복자는 일기장 페이지에 얼굴을 가까이 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땐… 왜 몰랐을까… 당신이 그런 마음으로 했던 말들이 다… 나를 위한 거였단 걸…’
복자의 어깨가 아주 천천히 떨렸다.
그녀는 눈시울을 훔치며, 일기장을 천천히 덮었다.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딸 은희였다.
“엄마, 나 지금… 미팅 끝났는데… 정신이 없다 진짜…”
복자는 밝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딸, 많이 힘들지? 밥은 먹었어?”
“엄마… 제발 밥 먹었냐는 말 좀 그만해.
밥 먹고 살려고 일하고 있는 거잖아!!
복자는 조심스레 입을 다물었다.
“아니… 미안. 그냥… 엄마니깐.. 딸이 밥을 먹었는지..”
“후.. 왜 전화했어? 또 어디 아파?”
복자는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안 아파. 그냥 딸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그렇게 바쁜 줄 몰랐네. 엄마가 미안해.
아이고. 바쁘니까 어서 끊자. 몸 챙기면서 해.
엄마 먼저 끊는다. “
통화 버튼을 누른 복자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
복자 목소리와 함께 통화는 끊어졌다.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는 은희의 얼굴은 복잡했다.
항상 미안하다는 엄마,
항상 밥 먹었냐, 몸 챙겨라 하는 엄마,
자신의 짜증 어린 소리를 다 받아주는 엄마,
그 짜증에 자신의 눈치를 보는 엄마,
그리고..
지친 은희 자신의 일상.
“후..”
심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숨이 입으로 뱉어졌다.
그 숨과 함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 눈물과 함께 엄마가 만들어준 쑥국이 먹고 싶어 졌다.
⸻
그날 밤, 복자는 태블릿을 다시 삼각대 위에 올려뒀다.
그리고 이번엔, 일기장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펼쳐두었다.
“이번 영상은… 당신한테 말하듯이 해볼게요.”
카메라를 켜기 전,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닦고,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오늘은 조금 조용한 얘기를 해보려 해요.
이 일기장에 대해요.
제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
그 사람이 자주 하던 말이 있었거든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지.’
그 말이… 자꾸 생각나서요.”
영상 속의 복자는 울지 않았다.
그 대신, 단단하고 따뜻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카메라 너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복자의 봄은, 아주 조용하고 깊게 또 한 장을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