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다시, 나의 봄> 6화
복자는 오늘따라 유난히 창가 쪽에 오래 머물렀다.
테이블 위엔 어제 올려두었던 남편의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표지를 쓸어보았다.
거칠어진 종이결이 손끝에 닿자, 복자의 마음은 조용히 일렁였다.
일기장을 펼치자,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은, 그때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택하는 삶이야.
완벽한 선택은 없어. 다만 사랑을 택하면 덜 후회하지.’
복자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 말… 그때, 당신이 했던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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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 밤공기가 눅눅하던 날이었다.
마당에 피워놓은 모기향 냄새가 은은히 퍼지는 마루에 세 식구가 있었다.
복자의 옆에는 배에 수건을 덮고 세상모르게 자는 어린 은희가 있었다.
복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 서울 발령 얘기… 진심 아니었어?”
남편은 조용히 수박씨를 뱉으며 말했다.
“진심이었지. 그런데 별로야.”
복자는 서운함이 섞인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서울이 더 낫잖아. 사람들도 많고, 기회도 많고… 나도 좀 더 넓은 세상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남편은 잠시 복자를 바라보다가 복자의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겨주며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복자야, 월급은 비슷한데 서울은 물가가 훨씬 비싸.
집도 좁아지고, 나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러면 우리 복복이 성격에 집에 있겠어?
나 돕는다고 돈 벌러 나가면 우리 공주님은 어떻게?
우리 결혼 전에 얘기했던 거 기억 안 나?
우리 둘 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니 아이가 생기면 애써 아이를 다그치지 말자.
그저 사랑 가득한 아이로 자라나게만 키워보자고 했잖아.
그리고 서울에 가면 지금의 우리 가족이 자라나는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
아쉬운,
후회하는 시간이 될 거야.
지금 회사상황이 그래.
나는 퇴근하고 우리 복복이랑 은희랑 이렇게 수박도 먹고,
이렇게 대화도 나누고
우리 복복이가 삶에 치이지 않고
지금처럼 낭만복복이로 살게 하고 싶어.
그게 나는 가장 큰 행복이야.”
그는 한 손으로 복자의 손등을 살짝 덮었다.
“나는 성취도 좋지만, 우리 가족이 웃는 얼굴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삶을 택했어.
그게… 내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더라고.”
그때는 복자가 그 말의 무게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 문장은 마치 세월을 건너와 복자의 가슴 한가운데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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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남편의 그 따뜻한 말투와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입꼬리는 올라가는데,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그때, 나는 서울을 가지 않은 게 당신의 한계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지금은 너무 잘 알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나도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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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들고, 삼각대 앞에 앉았다.
카메라의 전원을 켜고 화면을 확인하자, 자신의 얼굴이 고요하게 반사됐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깊고 맑았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하려 해요.
제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했던 이야기인데…
지금 와서야 그 말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었는지 알게 됐거든요.”
복자는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은, 사랑을 택하는 삶이다.’
그는 늘 그런 선택을 했어요.
기회가 많아도, 성취를 앞에 두고도—
가족이 웃는 얼굴로 식탁에 앉는 하루를 선택했죠.”
복자는 조용히 웃었다.
“그땐 그게 아쉬웠는데요,
지금은 그게…
정말 멋진 삶이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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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천천히 끝났다.
복자는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껐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지만, 그 고요는 허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득 찬 듯한 평온함이 복자의 어깨 위에 머물렀다.
그녀는 일기장의 한 귀퉁이를 접었다.
“이건… 다음 이야기로.”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긴 겨울을 견뎌낸 화분의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작은 흔들림처럼, 복자의 봄도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