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_ 2화. 낯선 상자, 익숙한 마음

소설 <다시, 나의 봄> 2화

by 미소 달

《다시, 나의 봄.》

2화. 낯선 상자, 익숙한 마음

노트북 화면 위로 부드러운 파란빛이 퍼졌다.

복자는 마우스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어제 남겨둔 문서 파일을 다시 열었다.

‘복자’

그리고 그 아래에


‘그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화면 한가운데, 그 두 줄의 검은 텍스트가 가만히 떠 있었다.

복자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린다.

그녀의 손등엔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과 마찬가지로 주름은 져있지만 순수한 눈이 촉촉해져 가고 있었다.

손끝이 잠시 머뭇거렸다.

복자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기억의 문 하나가 조용히 열린다.

<회상>

겨울이 끝날 무렵이었다.

창문 너머로 맑은 햇살이 쏟아지던 오후.

복자는 식탁의자에 등을 기대어 책을 읽다가, 남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복복, 이리 와봐.”

남편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복자가 싫어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포기해 버린 ‘복복’이라는 애칭으로 복자를 재촉했다.

거실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조립하고 있었다.

복자는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에서 나와,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기계야 그건.”

“우리 복복이. 일단 여기 앉아 봐 봐. 내가 우리 복복이를 위해서 하나 장만했쥐!”

복자는 반쯤 못 이긴 표정으로 그 옆에 앉았다.

남편은 그녀 앞에 노트북을 돌려놓고 말했다.

“최신형은 아닌데 내가 복복이를 위해서 오늘 거금 썼어!”

남편의 말에 복자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대체 얼마를 쓴 거야?’라는 눈빛을 발사했다.

“에이. 오늘 회사에서 생각지도 못한 수당이 나왔어.


다른 사람들 다 술먹거나 비자금 한다는데


나는 착. 하. 게. 도. 우리 와이프 선물로 다 썼지!”

복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차마 남편의 ‘나 잘했지? 칭찬해 줘.’하는 표정을 앞에 두고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휴..”

“이리 와서 앉아봐.”

“아니.. 나는 컴퓨터도 잘 모르는데 이런 걸 덥석 사버리면.. 어째..”

“뭐든 처음은 있어. 우리 복복이는 뭐든 배우면 잘하니까 이번에도 배워봐. 내가 있잖아!”

아… 이 남편은 뭐든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버린다.

이번에도 져버리고 만 복자였다.

복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처음 만져보는 기계에 당황했지만,

남편이 바로 옆에 있어 낯설지 않았다.

“자, 이걸로 글을 쓰는 거야.”

남편이 천천히 말했다.

“글을 쓰려면 작가 이름을 써야 하잖아.”

복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봤다.

남편은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덮었다.

그리고 마치 오래 준비한 말처럼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나는 네 이름, 복자가 참 예뻐.”

“응?”

“너다운 글을 써봤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 말고, 너처럼 말하는 글.

나는 네가 평소에도 참 말을 예쁘게, 그리고 잘한다고 생각해.


나는 재주 없는 그 말을 우리 복복이는 어쩜 그렇게 감정표현도, 상황설명도 요리조리 잘하는지.

그래서… 그 글 앞에는 항상 네 이름이 쓰여 있었으면 해.

복자,라고. 그 이름으로.”

복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말은 복자의 심장 어딘가를 천천히 물들였다.

그날 이후로

복자는 종종 노트북을 켜봤다.

그저 ‘복자’라는 이름을 입력하고

커서가 깜빡이는 그 첫 화면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남편은 그런 복자의 뒤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곤 했다.

말없이, 마치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처럼.

복자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 기억이 방 안 어딘가에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화면 속 텍스트 커서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복자는 천천히 키보드를 눌렀다.

‘복자’

그녀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입력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말없이, 아주 조용히 웃었다.

복자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단 한 사람이, 한 사람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살아 있진 않아도,

그의 말과 눈빛과 손길은

그녀의 모든 ‘처음’마다 여전히 함께였다.

노트북 위의 그 손끝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마치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을 돌아온 것처럼,

복자는 가볍게 자신이 적었던 그 문장 아래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는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타닥, 타닥…

키보드 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채웠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고,

움직임 속엔 어제와 다른 리듬이 감돌았다.

그때,

현관에서 딩동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복자는 타자를 멈췄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굳었다.

한순간, 조용하던 방 안이 다시 멈춘 듯 고요해졌다.

“누구세요?”

복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택배요!”

남자의 목소리는 짧고도 익숙한 톤으로 되돌아왔다.

복자는 털이 약간 일어난 실내 바지를 손등으로 한 번 펴내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한 박자 숨을 고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문 앞에는 크지 않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복자는 상자 위에 붙은 종이를 들여다봤다.

송장에 적힌 이름,

‘보낸 사람: 김지훈’

지훈.

복자는 아주 작게 그 이름을 되뇌었다.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닫히며, 무언가 말할 듯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엔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거실로 돌아와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렸다.

칼을 찾는 대신, 손톱으로 테이프 끝을 잡고 천천히 벗긴다.

비닐이 벗겨지는 사각사각한 소리가 아침 공기를 깨뜨렸다.

상자 안에는

하얀 태블릿 박스,

검은색 삼각대,

그리고 얇은 종이에 손글씨로 적힌 메모가 들어 있었다.

복자는 메모지를 꺼내어 들었다.

자신에게 쓴 것이 확실한 듯 아주 큰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 할머니, 이거 유튜브 시작하는 데 필요한 거야.

요즘 어르신들도 유튜브 많이 해요.

할머니가 얘기하는 거, 나 어릴 때부터 진짜 좋아했거든요.

얼굴 나오는 거 싫으면 목소리만 해도 돼요 :)

지훈이가.-

복자는 손에 메모지를 쥔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손끝이 떨리는 것도 몰랐다.

그저 가만히 그 글씨를 바라보며

어릴 적 지훈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태블릿 상자를 열었다.

보드라운 스펀지 포장을 걷어내자,

얇고 가벼운 디지털 기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자는 그것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자신이 이걸 조립하고, 설정하고, 작동시킬 수 있을까?

삼각대와 태블릿을 펼쳐보던 그녀는,

다리를 어떻게 펼치는지 몰라 몇 번이나 다시 접고 폈다.

어느새 복자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복자의 그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없었다.

무표정해 보이는 그저 주름진 얼굴이지만 분명히 생기가 있었다.

“어어!”

태블릿이 휘청이며 떨어질 듯 기우뚱한 걸 겨우 잡고서는 복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남편. 아이고. 이를 어째.. 우리 남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회상>

“이런 건 설명서보다 손이 먼저야.”

남편은 항상 자신감 넘치게 그리고 느긋하게 말하곤 했다.

기계를 마주한 그의 손은 언제나 정확하고 단정했다.

복자는 그 옆에서 항상 반쯤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무언가 처음 해보는 게 두려워질 때면,

남편은 꼭 이렇게 말했다.

“겁내지 마. 손이 먼저 움직이면, 생각은 따라와.


우리 복복이는 겁이 많아. 안될 건 없어.


운전할 때도 그렇잖아. 길을 잘못 들어서도 결국 목적지에 가게 되잖아.


기계도 똑같아. 잘못했어도 다시 해보고 하면 돼. 걱정 마.”

그 말이,

그 손이,

지금 그녀의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

복자는 숨을 고르며 삼각대 다리를 펼쳤다.

살짝 틀어진 각도를 조절하고,

기울어진 태블릿을 다시 고정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기계는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태블릿의 전원을 켜자,

화면에 카메라 앱이 켜졌다.

거기

복자의 얼굴이 있었다.

조금 흐린 조명 아래,

낯선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을 복자는 찬찬히 들여다봤다.

거울보다 더 적나라한,

디지털 화면 속의 자신의 얼굴.

주름과 점,

눈가의 미세한 붓기까지 보였지만

그녀는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그리고 화면의 빨간 버튼에 손가락 하나를 가져다 댔다.

“띵-”

복자는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하듯,

작고 느린 미소가 얼굴 위에 번졌다.

“안녕하세요. 복자입니다.”

처음 해보는 영상 인사.

짧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이름,

‘복자’는

이제 누군가가 불러주는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다시 부르는 이름이라는 것을.

그녀의 마음속엔 여전히,

단 한 사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살아 있진 않아도,

그의 손길과 말, 그 믿음이 지금 이 작은 봄을 시작하게 해주고 있었다.

살아 있진 않아도,

늘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나 다시 도전해요.’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복자는 알았다.

이 삶은 후회만 반복하러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

그 봄은, 지금 이 손끝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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