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_ 3화. 낯선 무대, 작고 따뜻한 첫걸음

소설 <다시, 나의 봄> 3화

by 미소 달

복자는 아침부터 어딘가 들뜬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들뜸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치,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에 들어온 기분.

매일 해왔던 아침이지만,

무언가 미세하게 다른 결이 감지되는 듯한 하루.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옷장 문을 열고, 오래된 베이지 카디건을 꺼냈다.

팔꿈치가 살짝 해졌지만, 부드러운 촉감은 여전했다.

“이 옷… 이거 분명 버렸었는데…”

복자는 멈칫했다.

기억이 또렷했다.

그 옷은 몇 해 전, 봄 청소를 하며 버린 옷이었다.

헝클어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옷장을 정리하던 날.

그때, 분명히 이 옷은 사라졌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카디건을 다시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복자는 손끝으로 천을 만지며 아주 조용히 말했다.


“내가… 정말.. 시간을 거슬러 온 걸까?”


말해놓고, 그녀는 그 말에 스스로 놀랐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들이,

그녀가 선 이 시간을 지금의 시간이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주름은 여전히 깊었고, 눈가에는 미세한 붓기가 남아 있었지만—

피부 밑의 생기는 묘하게 더 단단했다.

그녀가 기억하던, ‘지금의 복자’보다 젊었다.

“세상에.. 어쩜 이런 일이.. ”

복자는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죽기 전의 선물 같은 건가.. 그래.. 그럼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거울에 비친 복자의 얼굴에서는 20대 시절의 호기심 가득한, 그리고 80대의 단단함이 겹쳐 보였다.

그녀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 마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쩐지 화면에 비칠 배경이 너무 휑한 것 같아,

작은 화분이라도 사다 놓고 싶었다.

어색함을 가릴 핑계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문 밖으로 이끌었다.

마트 앞 골목에 들어서자,

복자의 걸음이 멈췄다.

그곳은 분명히 익숙한 동네였다.

그러나 풍경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때 그 모습’에 가까웠다.

작은 김밥천국 간판,

갈색 타일이 붙은 오래된 문방구,

그리고—

마트 계산대 뒤에 서 있던,

복자의 친구 ‘미자’.

“복자야?”

복자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미자.

희끗해졌던 머리카락은 검고 윤기가 있었고,

피부엔 생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복자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야, 복자야. 어쩐 일이야. 오늘도 장 보러 가는 거야?”

복자는 멍하니 서 있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말이 맺혔다.

“… 그래, 응. 잠깐 화분 좀 보러 왔어.”

복자는 식물 코너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끝이 조금씩 떨렸다.

매끄러운 바닥에 닿는 고무 신발의 바닥이

삐끗거리며 내는 소리가 귓가에 아득하게 울렸다.

‘정말… 내가 돌아온 거구나.’

복자의 마음속에,

아무도 듣지 못할 속말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편이 살아있는 때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이 시간이 단순한 과거는 아니라는 거겠지…

이건, 두 번째 기회야.

다시 살아보는 거야.

후회하지 않기 위해.’

복자는 작고 둥근 화분을 하나 골랐다.

잎이 도톰한 산세베리아였다.

그 화분을 들고 계산대로 돌아왔을 때,

미자는 복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복자야, 오늘 얼굴이 참… 편안해 보여.”

복자는 살짝 웃었다.

“그래? 나, 좀 달라졌나 봐.”

“응, 그런 거 같아. 무슨 좋은 일 있어?”

복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조용히 말했다.

‘응, 좋은 일 있어.

아직은 말 못 할,

내 삶을 바꿔줄지 모르는 일이야.’

복자는 작은 산세베리아 화분을 양손에 들고

천천히 마트 앞 골목길을 걸어 나왔다.

햇살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도로 위로 부서졌고,

간판들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그 빛 사이로

복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걸음이 느렸다.

발밑에서 모래 알갱이 같은 시간이 사르르 흘러내리는 듯했다.

골목 구석의 구멍가게엔

다방커피 광고가 바랜 채로 붙어 있었다.

몇 해 전에 리모델링됐던 가게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예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

색이 바래지 않은, 분명 과거의 날짜.

‘성심학원 중간고사 대비반 모집’

그때, 지훈이 다니던 학원 이름이었다.

복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햇살 속에서 바스러지는 풍경이

그녀의 시야를 아득하게 뒤흔들었다.

길 건너편에서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깜짝 놀랄 만큼 젊은 얼굴이었다.

“복자 씨, 어머. 마트 다녀오셨어요?”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얼굴이 달랐다.

복자는 순간 멈칫했다.

그 얼굴은… 몇십 년 전 그 시절,

자주 수다 떨던 이웃 ‘순영이’의 얼굴이었다.

피부는 탄력이 있었고,

눈가에 주름 하나 없었다.

“응… 화분 하나 샀어.”

복자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복자 씨는 이런 게 잘 어울린다니까. 예쁜 거 골랐네요.”

순영은 웃으며 지나갔고,

복자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억과 현실이 겹치고,

걸음마다 세월이 접힌 종이처럼 뒤엉켰다.

“이게… 진짜라면.”

복자는 중얼거렸다.

“내가 돌아온 게, 정말이라면.”

그녀의 눈이 아주 천천히 젖어갔다.

‘그때 말이야.

지훈이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들…

딸아이가 울면서 전화를 끊던 밤,

혼잣말처럼 내뱉던 후회들…’

‘그 모든 것들을…

혹시 이 시간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복자는 멈춰 섰다.

길가 한편, 낡은 벤치에 살짝 주저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이 그녀의 무릎 위에 놓였다.

잎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조용한 정적 속에서

복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소리 없는 새의 날갯짓.

“부탁이야…

이번에는…

조금만 덜 후회하게 해 줘.”

그 말은 바람에 흩어졌고,

복자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빛엔 여전히 물기가 맺혀 있었지만,

발걸음엔 처음보다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복자는 두 번째 인생의 봄으로

조금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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