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하늘에 묻는다>
“망치질 몇 번에 담금질 몇 번 하니 수염이 하얘졌습니다.”
장영실(최민식)의 회고는 짧고 간명했다. 그는 더 이상 미련도, 남아있는 꿈도 없다. 관노였던 그는 남다른 천문학적 지식과 기가 막힌 손재주로 물시계를 만들어 세종(한석규)으로부터 종삼품의 파격적인 관직을 부여받았다. 게다가 세종과 개인적으로도 친밀해져 왕이 꿈꿨던 천문관측용 간의대를 발명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엔 과학기술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하는 장영실상이 있다. 아직도 그의 탁월한 업적을 기리는 후손들의 오마주다. 물시계인 자격루는 해가 진 후에도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가 되었고, 간의대를 통해 별자리를 관측, 우리나라의 시간이 명나라와 차이가 있음을 밝혀 냈다. 세종 말대로 명실상부 조선의 시간을 만들고 조선의 하늘을 연 장본인이 장영실이다. 그런 영실은 충심 또한 대단하여 세종이 묻는 소원에 “전하와 가까이 있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로 화답한다.
세종의 한글창제는 재임 중 후반부에 이뤄졌고, 전반부에는 천문학과 기상학을 발전시켰다. 중국보다 앞선 측우기와 아라비아에서 개발된 천문학 지식을 들여와 물시계와 천체관측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장영실과 세종의 수많은 토론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영화적으로도 이러한 발명품들은 꽤나 볼거리가 되었다. 궁중의 대신들도 그 원리를 궁금해했던 물시계는 가끔 유튜브에 등장하는 도미노를 보는 듯한 신기한 장면이었다.
관노와 함께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군주. 어쩌면 고관대신들의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는 장영실의 운명이기도 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황희(신구)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중재역할을 했지만 명나라와의 관계를 빌미로 계속 태클을 거는 무신 정남손(김태우)은 결국 일을 벌인다. 특히 별자리 관측은 명나라 황제만의 특권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부분의 신하들이 동조한 걸 보면 조선의 역사가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별자리 관측이 그 정도라면 한글을 만든다는 것은 그들 보기에 얼마나 참람한 사건이었겠는가.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세종대왕은 애민정신 강한 탐구자이자 개혁가였다.
장영실의 업적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만의 24 절기를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더위와 추위를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당시의 생업인 농경에 있었다. 작물의 재배에 최적화된 절기를 만듦으로써 중국과 맞지 않아 수확이 적었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앞서간 두 천재는 외롭게 그들만의 과학에 전념했다. 세종은 사실 장영실에게 조차 한글 프로젝트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이는 그 둘이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우정’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비가 오는 날 별을 보고 싶다는 세종에게 창호지에 먹칠을 해 어둠을 만든 후, 구멍을 뚫고 촛불로 별을 밝혀주는 장면은 극 중에서 가장 은은한 감동을 안긴다.
그리고 보니 감독이 허진호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감수성 넘치는 로맨티시스트의 솜씨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최민식의 카리스마와 한석규의 세종연기는 찰떡궁합이다. 조연들의 연기도 입체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조선의 과학자라는 주제를 흥미롭게 재구성한 소품도 뛰어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세종대왕은 문과였을까 이과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