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시의 롤스로이스

대안 15 : 기왕이면 최고의 명품을 추앙하라

by 블루문


<나의 해방일지>에서 "추앙"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와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사랑보다 높고 존경보다 깊은 추앙. 우리는 누구에게 추앙받아본 적 있는가, 아니 요즘 추앙하는 존재라도 가지고 있는가.


"해방"역시 생경한 단어이자 독재시대에는 금기어이기도 했다. 교회에서 해방신학을 논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시기가 8-90년대이다. 비단 그때뿐 아니라 아직도 분단의 산하에서 해방이라는 말은 남쪽보다는 북쪽의 언어다. 그렇다고 북한이 해방에 가까운 나라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다. 김일성이 인민해방을 외친 지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제자리 아니 마이너스 해방이다.


그럼 80년대 체제우위를 강조할 때 남조선으로 내려오면 해방이었나. 물론 그것도 해방이었다. 배를 타고 귀순한 김만철 일가에게 많은 혜택을 주던 때에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 탈북민들은 그다지 해방이랄 것도 없이 K자본주의의 살 떨리는 레이스에 올라타야 한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은 선별적 해방의 세상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개편되는 질서에 올라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일단 양분된다. <나의 해방일지>의 산포시는 그렇게 살포시 격하된다. 경기도 비하라고 무조건 비난할 문제가 아니라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염기정, 미정, 창희는 그래도 버젓한 직장에 다니고 있고 싱크대 공장과 농업의 투잡을 지난하게 이끌어가는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것도 축복이니까 불평하면 안 된다고?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왜 두 시간 동안 환승하면서 서울(강남)이라는 곳으로 출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 더 문제다.


각설하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다소 눈에 걸리는 몇 가지 요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자동차 롤스로이스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1964년작 <옐로 롤스로이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잉그릿 버그만, 렉스 해리슨, 알랑 들롱, 셜리맥클레인, 조지 스코트, 잔 모로우 같은 호화 캐스팅의 코미디로 80년대 TV 명화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버지는 롤스로이스에 대해 말씀하셨다. 저게 세계 최고의 자동차라고. 그 후 우연히 본 일본자동차 잡지에서도 롤스로이스는 단연 1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직 대한민국엔 현대차와 대우차밖에 없던 8090 시기에 가끔씩 보이는 벤츠들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이끌기에 충분했다(오죽하면 나이트클럽이름이 벤츠 280이었을까). 그런데 이젠 길에 널린 게 수입차다. 사실 중고로 구매하면 아반떼보다도 저렴하다. 그런데도 아직 수입차에 대한 심리적 벽은 높다. "가오갤"세대인 젊은이들은 집은 없어도 '가오'는 있어야 한다며 수입차를 구매한다. 그래서 이제 길에는 수많은 벤츠와 비엠더블유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이 두 브랜드에 식상하면 재규어와 마세라티, 포르셰와 가끔씩 등장하는 람보르기니에 눈길이 간다.


어느 날, 고급 단독주택단지를 걷다가 전설의 RR(롤스 로이스)을 만났다. 정말 다가가서 만지고 싶더군. 진회색의 모던한 분위기로 전환한 RR은 이제 대중화 모드로 들어간 듯싶다. 개인적으로 롤스로이스만큼은 길에 넘실거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저 로봇태권브이가 있는 카페 마당에 신영균 씨가 보유한 올드카를 보는 것으로도 설렜으니까.


그래서 염창희가 구 씨의 화장실에서 롤스로이스 키를 보고 추앙하는 장면에서 감정이입이 되었다. 창희는 몇 억의 돈만 있어도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알고 보니 갑부?


"형, 제발 자동차 키만 있다고 말하지 말아 줘요. 진짜 있다고 말해줘요."

"야, 나 지금 서울 다녀오는 길이야. 또 가자고?"



구 씨는 창희에게 자기 집 주차장에 세워 놓은 롤스로이스를 보여준다. 창희는 차에 입을 맞추고 시운전하며 감격한다. 그런데 왜 하필 RR이었을까. 그건 하나의 설정이다. 구 씨의 차가 벤츠나 BMW였어도 창희는 감동했을 테지만, 롤스로이스라? 이건 로망을 넘어선 추앙의 자동차였기 때문이다. 영화 <아수라>에서 검사 곽도원이 말한 것처럼 '벤츠의 위의 윗급(경찰서장? 난 그 위의 윗사람이야)'인 자동차라는 것이다. 어설픈 부자 말고 진짜 부자들의 차. RR은 원래 항공기 엔진을 만들던 영국의 자동차 회사로 양산 전에는 모두 수제로 만들었던 자동차다.



산포시의 트럭과 롤스로이스를 대비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그건 미정이의 찌그러진 현실과 마음속 추앙 간의 거리만큼이나 큰 격차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희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돈이 다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돈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서에서 부자 삭개오는 외로웠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12명의 비렁뱅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다니는 걸 유심히 보니 틀린 말을 하지 않더라. 그래서 갑자기 마음이 열려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맛난 음식을 엄청 제공했다. 제자들은 이게 웬 떡이냐고 기뻐했고 와구와구 먹어댔다. 그 모습을 본 삭개오는 기쁜 마음에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부자의 기쁨을 누리는 제자들. 예수는 거기서 뜬금없는 해방을 선포한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진심으로 만나는 것. 기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죽기 전에 롤스로이스 시운전라도 해 보자. 이승환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덩크슛을 하고 싶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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