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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엄 Jul 08. 2024

긍정병이 뭐라고 욕도 참고 살았다.

양념처럼만.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란 노래를 차에서 듣고 있을 때였다. 발음을 뭉개 듯 맛깔나게 불러대는 신나는 노래에 아이들과 몸을 흔들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오늘 밤도 삐딱하게~~'

응? 오늘 밤도 삐딱하다고? 너무 부정적인데? 아이들과 듣고 있으니 긍정의 의미가 담긴 말로 바꿔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긍정의 말과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병에 걸려 있었던 나에겐 귀에 거슬리는 가사였다. 그래서 그 부분이 나올 때마다 크게 외쳤다.

"오늘 밤도 반듯하게~~"

"뭐라고요? 반듯하게라고요? 엄마답네요."

"왜? 밤에 삐딱하면 안 돼. 낮에도 그렇지만 밤에 삐딱하면 사고 쳐. 반듯하게 있어야지."

"예! 예!"

나의 괴론에 대꾸하기 싫은 아들은 공손한 말투로 대화를 차단했다.


10센티 노래 '봄이 좋냐'도 그랬다.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중략) 결국 꽃잎은 떨어지지 니네도 떨어져라 몽땅 망해라 망해라~'

망해라는 가사가 거슬렸다. 하기야 봄과 커플들이 얼마나 부러우면 그랬겠냐마는 그런 단어를 입에 고 있기엔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노래가 나오면 돌리거나 돌릴 수 없다면 개사해서 불렀다.

"몽땅 흥해라~~ 흥해라~~ 흥해라~~"

"엄마! 웃겨요."

"그래? 나는 개사하는 맛이 있는데."


한 단어도 뾰족한 걸 참지 못하니 이쯤 되면 긍정병에 걸린 거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의 개사는 마음에 평화를 주는 동시에 기분믈 좋게 해주었다. 남의 생각이 들어간 노래지만 내 생각으로 바꾸는 건 내 마음이었으니 편하게 개사했다.


당시의 나를 돌아보면 긍정병에 걸린 게 확실하면서 이해도 된다. 힘든 현실을 마주하며 부정이 침투하지 않게 긍정으로 방어하던 전쟁 같은 상태였으니 나의 마음과 말은 과한 긍정으로 무장해야 했다. 힘든 마음을 긍정으로 방어하고 있었으니 발악하며 나를 지키고 있던 거였다. 결과적으로도 긍정의 말은 늪에 빠진 나에게 동아줄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마음이 온한 지금 예전 같은 긍정병은 약해졌다. 그때는 부정이 버거워 긍정으로 이겨내려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현실의 힘듬은 여전하지만 마음의 여유만큼 달라진  생각은 평화로운 일상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부정적인 단어를 뱉으면서 느껴지는 개운함도 알게 되었다. 욕이 그랬다. 개인적으로 욕은 마냥 나쁜 말이어서 하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다. 물론 욕은 다른 사람이 듣기에 좋지 않고 나쁜 말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솟아오르는 분노로 스트레스가 쌓일 때 혼자 뱉어내는 욕은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어느 날 작은아이가 중학생일 때 하는 욕을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

"어디서 그런 험한 욕을 배우셨나요."

"요즘 애들 게임하면 익숙한 단어예요. 못하면 바보예요.

"그래?"

"게임 초반에 타자 치는 게 느리다고 놀림받고 욕먹었는데요."

"뭐?"

"손가락 두 개로 열심히 쳐대는데 계속 독수리로 살라고 욕하면서 놀리던데 얼마나 화가 나던지. 욕먹은 분노로 타자실력이 갑자기 늘었어요."

"하하하"

얼마나 분했을까. 게임에서 나오는 욕을 삭히려면 게임을 하지 말아야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게임도 취미생활에 속한다니 험한 욕보다 순화된 욕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라디오를 듣다 치매 어르신의 사연을 접하게 되었다. 사연 속의 어머니는 늘 지적이었으며 험한 소리 한번 안 하고 사셨던 분이셨다. 그런데 연세가 드시고 치매가 왔는데 욕을 하는 치매에 걸리신 거였다. 그분도 사람인데 속으로 얼마나 많은 분노들을 참고 삭이셨을까.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욕도 인생총량 지랄 법칙이 있나? 그렇다면 나도 위험한데 욕을 조금씩 하고 살아야 되나 봐"

나이 들어 아들들에게 미친 듯이 욕을 해대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만약 평생 해야 할 욕이 정해져 있고 그 욕을 초반에 하는 것과 나눠서 하는 것, 나중에 나이 들어하는 것으로 나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뱉고 살아야 욕의 균형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혼자 욕을 해 봤다. 안 하던 욕을 하려니 처음엔 어색했고 용기가 필요했다. 간단한 두 단어를 뱉어내고도 무안해지며 주변에 눈치를 살피게 되었. 40대 이전에 할 수 있는 욕이라고는 아이들에게 하는 "자식아" "새끼야"가 다였다. 그것도 욕이라고 뱉고 나서도 욕을 했다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당당하다. 오히려 아들에게 네가 나의 자식이니 당연히 내 새끼가 아니냐며 따지고 있다. 


욕에 대한 반짝 효과로 늘어난 욕은 두세 가지 되지만 매우 조심하고 있다. 터져버린 입이라 욕이 나오려는 상황일수록 말을 아끼며 차분하게 대응하고 상황이 지난 뒤에야 쪼그려서 욕을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상대를 앞에 두고 욕을 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기에 차분하게 대응하는 척하는 것이다. 그때는 체통을 지키는 자아가 나를 지켜주고 있으니 감사하다.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 걸까? 그동안 체통을 지키느라는 긍정병에 걸렸던 자아에게 욕으로 반항하고 보니 속이 시원해지면서 개운한 박하사탕을 먹은 것 같았다.


예전과 다르게 가끔씩 욕을 하는 나를 보며 주변에선 말한다.

"안 어울려요. 하지 마세요."

욕이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동안 체면치레 하느라 참아오고 눌러버린 욕이 이제나오는 데. 표시 나지 않게 몰래 하고 있는 욕도 친한 사람들 앞에선 참지 않고 있으니 저런 소리를 듣는다. 물론 욕은 사람의 이미지를 좋지 않게 만든다. 조심해야 하고 안 하는 게 좋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체면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속 내면의 건강함을 지키고 싶다. 조신한 척하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좋은 말만 하고 살아야 한다는 긍정병에 걸려 욕도 참고 살았는데 이제 더는 못한다. 쌓지 않고 뱉어내며 살고 싶다.


전보다 나아진 마음과 욕의 개운함을 알아냈어도 긍정적인 생각은 중요하다. 과한 이상주의로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되겠지만 현실과 부정, 긍정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는 필요하니까 말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긍정과 부정을 헤아려 희망을 선택하려 노력한다. 욕은 맛있는 음식에 약간의 조미료 같은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다. 개운한 맛에 속아서 맛있는 음식을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하니 늘 조심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부정이 오를 때마다 나를 다그치며 나의 신념을 새기고 있다. 긍정병의 완벽한 치유는 힘들지만 약간의 긍정병은 가지고 살아가려 노력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개뿔 아무것도 없으면서 부정적이면 인생이 힘들다.

마음에 긍정이 들어차야 할 것들이 보인다.





개사하고 편곡해 버려



온갖 속어들과 부정의 글자가

눈앞을 어지럽혀도

너만의 필터로

걸러내 버려야 해


온갖 힘든 감정들이

너를 덮쳐도

너만의 신념으로

긍정을 심고

마음을 지켜야 해


거친 글자는

부드러운 가사로 개사하고

거친 표정은

단호한 리듬으로 막아내야 해


너만의 필터로

모든 것들을 걸러내고

너만의 신념으로

그것들을 재탄생시켜


모든 게 사실이라 말해도

너만의 필터로 확인해야 해


거침없이 개사하고

거침없이 편곡해 봐


한결같은 흐름은 없어

변화하는 흐름에

너만의 흐름이 만들어지니

너만의 흐름을 만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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