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러시아는 작전에 성공했는가?
A 애매하다. 러시아의 목표가 돈바스 지역과 노보로시야 영유권 확보였다면 성공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만약 우크라이나 전체를 복속시키거나 키예프(키이우)를 점령하는 것이었다면 실패다.
Q. 유로마이단은 민주화 운동이었나?
A. 순수한 민주화운동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러시아로부터 경제 지원을 약속받고 유럽연합 가입을 포기한 야누코비치에 대한 저항적 성격이 강했기에 좋게 봐줘도 반러시아 운동이다. 또 시위 과정도 폭력적이었고 UPA 깃발이나 스테판 반데라 사진 같은 것들이 나왔다. 이 부분 때문에 유로마이단이 네오나치 운동이라는 비판도 받는 것이다.
Q. 유로마이단 이후 세워진 친서방 정권은 민주적이고 서구적인 가치에 부합했는가?
A. 전혀 아니었다. 유로마이단 이후 구성된 과도정부는 부총리, 스포츠 장관, 교육부 장관, 국방부 비서관, 국방부 장관 모두 스보보다(자유당)이나 프라비 섹토르 출신이었다. 이 두 단체는 스테판 반데라를 추종했다. 한마디로 네오나치 단체라는 소리다.
Q. 왜 하필 동부 지역(돈바스)는 유로마이단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는가?
A. 유로마이단 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는 서부와 동부의 차별이 없었다. 그러나 과도정부가 들어선 직후부터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시키는 조치를 시작했으며 끝내 오데사 지역에서 네오나치들이 50명의 노조원들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데사 학살). 결국 동부를 탄압하면서도 정작 경제적으로 발달한 동부를 잃을 수 없다며 난리치던 우크라이나 정부에 맞서 동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칸스크 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이다.
Q. 돈바스 전쟁의 성격은?
A. 러시아어를 쓰고 정교회를 믿는 30%의 동부 지역 사람들과 가톨릭을 믿고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70%의 서부 지역의 싸움이다. 러시아는 그 30%를 돕기 위해 나선거고. 우크라이나는 오랜 시간 분열되어 있었기에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동부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여기서 서방 문화와 유라시아 문화의 차이로 나뉜다.
Q. 전후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아조프 연대를 통제할 힘이 되는가?
A. 글쎄다. 나는 어렵다고 본다. 지금 젤렌스키조차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들의 꼭두각시라는 소리도 있고 아조프 연대가 어쨌거나 전쟁에서 활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아조프 연대는 전후에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정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Q. 왜 러시아는 동남부에 공세를 집중하는가?
A. 북부 전선은 애초에 양동 작전 용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생각 외로 북부에서의 저항이 너무 심해서 러시아도 양동 작전을 포기했을 것이다. 대신 우크라이나 동남부로 공세한 것일거다. 그리고 애초에 러시아가 돈바스 때부터 쭉 개입해온 명분은 우크라이나 전체 점령이 아닌 돈바스 지역의 독립과 노보로시야 영유권 확보였다.
Q. 민스크 협정은 무엇이고 왜 우크라이나는 이를 어겼나?
A. 돈바스 전쟁이 격화되자 민스크에서 휴전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민스크 협정은 사실상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칸스크 인민공화국을 인정하라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Q. 전쟁은 막을 수 있었나?
A.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른다. 다만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중립지대로 남는 안을 제시했고 러시아도 이를 수용했었는데 우크라이나가 거절함으로써 실패했다. 이 부분은 좀 아쉽다.
Q.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러시아에게 있어서 우크라이나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A. 다소 복잡하다. 첫번째는 당연히 키예프 루스로부터 시작된 러시아 역사의 뿌리라는 점이다. 두번째는 동포에 가까운 주민들이 억압받고 있기에 그 지역들을 해방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번째는 전략적 이득으로써 파이프라인 장악과 비옥한 국토 장악, 그리고 흑해 진출의 교두보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