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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l 13. 2023

조선 역사상 최악의 참패, 병자호란의 패배 원인

실패한 전쟁사-9

https://youtu.be/Ffn3zMft44c?si=zHt0dTiXTBzOmlAd

병자호란, 우리 역사에서 아마 일제시대가 없었으면 가장 큰 치욕으로 기록될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선의 왕이 삼전도에서 오랑캐라 취급받던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며 임진왜란이 벌어진지 약 40년 만에 많은 조선인들이 타지, 그것도 우리보다 아래인 오랑캐들의 나라에 끌려가는 비극을 또 겪어야 했다. 이 덕분인지 인조는 선조, 고종과 함께 항상 조선 최악의 임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소재로 우려먹히는 중이다.


물론 당대 조선 조정은 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왜란으로 유린당한 전국토의 피해는 여전히 복구 중이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패배의 원인은 당시 조선의 조정 단 한군데에 집중하여 그들'만' 비난함으로써 병자호란을 단순히 치욕스러운 위정자들의 실패로만 규정짓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최대한 오류가 없게 자료 조사는 많이 했으나 조선시대사가 그렇게 큰 관심 분야는 아니라 부족한 점은 있을 수 있으니 유념 바란다.

광해군에서 비롯된 호란의 전조


광해군에 대해 한국 사회의 인식은 2000년대 이후부터 급속도로 좋은 방향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21세기 이후 한국의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를 상징하는 작품으로서 이 영화에서 광해군은 마치 멋있고 백성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군주로 묘사된다. 역사학계에서도 광해군을 재평가할 때 근거로 들던 논리 중 하나가 광해군이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건데 사실 여부와 별개로 이 주장은 의외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건 분명히 말해야 할게 광해군이 괜히 인조반정으로 쫓겨난게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임해군이나 영창대군 죽이거나 인목대비를 폐위한 패륜짓을 얘기하려는게 아니다. 광해는 바로 군주로써 신경써야 할 내정도 개판 쳐놓은 사람이었다는 것. 먼저 궁궐 토목 공사를 살펴보자. 광해군 때 완공된 궁궐만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인경궁, 경희궁, 자수궁 등 광해군 정권 내내 궁궐 공사만 이루어졌었다.


경희궁은 1,500칸, 인경궁은 5,500칸이었는데 왜란 전 경복궁이 700칸 밖에 안되었던 걸 생각하면 거의 두 궁궐을 합쳐 10배 가량의 큰 궁궐을 지은 셈이었다. 재정을 메꾸기 위한 방법은 결포라는 토지에 원래 정해진 세금 외에 다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지을 때 1결의 토지에서 1포를 거두었다. 그랬기에 공사비용은 1년당 10만 석 가까이 들었으며 1년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나 많은 철을 석 달 동안 궁궐 짓는데 허비했다. 따라서 토목 사업에 실제로 들어간 돈은 국가 재정의 15~25% 가량 되었다.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개소리 중에서 개소리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사간원이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된 대동법의 폐단 극복을 위해 아예 확대해야 한다고 했을 때 광해군은 천천히 하자면서 거절했다. 오히려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은 신하들이었으며 재성청이 인조반정 이후에 설립되고 호란 이후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을 보았을 때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헛소리였다.


그리고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펼치면서도 강홍립의 조총부대 1만명을 사르후 전투에 파견하였고 조명 연합군은 후금에게 패하며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강홍립 부대는 왜란 이후부터 조선이 공들여오던 부대였으며 누르하치를 막을 군대가 사라진 시점에서 뒤늦게 광해군은 국경 대비에 필요한 병력 2~3만을 보충하고 싶었으나 실제로 모집된 병력은 도마다 1천여명, 총합 8천~1만명 가량의 부대가 전부였다.


사실 조명 연합군 입장에서는 사르후 전투 그 시기가 중요한 찬스였다. 당시 후금은 아직 막 생겨난 신생 국가에 불과했으며 병력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3만명 안팎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 전투에서도 홍타이지의 최측근이자 여진 통일의 주역이었던 슈무루 양구리가 조선 관군의 조총에 맞아 사살되기도 할 정도로 조선 관군의 실력은 나름 준수했으니 조선이 이때 명나라와 손잡고 후금을 협공했다면 아마 그들은 멸망했거나 지방 부족 국가 정도로 전락했을 것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궁궐 토목 공사를 하며 날려먹은 재정 주머니는 조선이 안보 공백을 조금이라도 수습할 정도의 여력만이라도 갖추는 걸 못할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이때부터 인조 때까지 북방 방어선 복구에는 돈이 제대로 투입되지 못해 병자호란 때 그대로 한양까지 고속도로마냥 뚫리게 되는데 일조했다. 매관매직의 성행, 신분제의 붕괴로 인한 몰락 양반의 양산까지 만들낸 건 덤. 그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 뿐만 아니라 농업 복구 지원에도 제대로 예산이 투입되지 못해 농민들은 자력으로 버텨야만 했으며 이는 병농일체 사회인 조선에서 군량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광해군이 연산군급 폭군이었다던 소위 '조선빠'들의 주장은 분명 과장이 지나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백성을 사랑했지만 비참하게 쫓겨난 비운의 개혁군주였다는 재평가론 역시 올바른 접근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싸울 수 있는 병력, 그리고 군량이 부족했다


1636년 청 태종(홍타이지)가 12만 8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러한 청나라군과 처음 국경에서 마주한 조선 관군은 청북방어사 임경업이 이끄는 8,000명이 전부였다. 선조 당시인 1593년 조선 관군의 군병은 172,400명이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되어 징집된 인원 수였다. 광해군 기에는 절반 이상을 차감한 7~8만 명이 끝이었고 황해도, 평안도, 개성의 군사 합계는 많았을 때 1만 9천명 정도였다. 게다가 이들은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진의 대규모 침입에 통합하여 대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안주목사(安州牧使) 정충언과 연안부사(延安府使) 남이홍은 후금군을 총 9만명으로 추정하며 정예병 확충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보고를 올린다. 그러나 군역의 기피로 대립제 덕분에 예상 만큼 인원은 모이지 않았으며 예전부터 조정에선 호패법을 실시해 군적을 대정리하는 작업을 하려 했으나 행정력의 미비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인조 대에 이르어 호패법이 완전한 시행되었으나 그마저도 정묘호란 이후 민심 수습을 위해 다시 폐기 수순에 들어갔으며 결국 정예군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군량의 확보인데 임진왜란 이후 나라가 피폐해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게 어려워졌다. 광해군 1년(1609년) 국가 경기는 7만석이었으나 세입은 4만석에 불과했다. 여기에 더해 은의 유출이 심각해지면서 더더욱 돈은 모이질 않았다. 인조반정 경비는 초기 11만석이나 세패(稅敗)는 10만석으로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모문룡 진영에 군량을 보급하는 일까지 하여 부담은 커졌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무리한 양병과 군량 조달을 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으며 군비 증강과 왜란 피해 복구라는 모순되는 과제가 부딪히는 형국이었다.


그렇기에 군량 확대를 포함한 국방력 증대가 국가 재정의 확대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었다. 특히 약 1500~1700년 사이의 소빙기는 자연재해로 나타났고 기근과 전염병까지 덮치기에 이르었다. 이 사태는 경작지와 인구에게 마저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결국 임진왜란 이전 150만~170만 결의 전국 결수는 종전 이후 30만으로 급감했다가 숙종 시기에야 130만까지 회복되었다. 거기에 16세기 중반 900만~1,000만명에 가깝던 인구는 종전 후 700만명까지 떨어졌다. 당시 조선은 병농일체의 군제였기에 병력 육성과 식량 조달에 큰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타이밍은 놓쳤고, 청나라는 커졌다


앞서 말했듯이 사르후 전투 때까지 후금은 사실 크게 강하진 않았다. 여전히 부족 국가의 성격이 강했으며 여진 통일을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기에 불안정성이 조금 존재했었다. 게다가 명나라는 비록 쇠락할대로 쇠락했지만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제국'으로서의 영향력이 상당히 존재했었던 시절이었다. 명나라가 실질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은 후금이 강력해서라기 보단 잦은 민란과 이자성의 난이라는 더 이상 수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크리티컬 결정타 때문인 것에 가깝다.


그러나 조선이 중립외교를 취하며 후금의 성장을 견제할 시간을 놓친 사이 그들은 더 이상 무시할 만한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금나라 시절과는 달리 몽고족을 팔기제도에 편입시키고 한족에 대해서도 억압하는 정책을 펴지 않았다. 홍타이지에 이르어 2버일러 아민과 3버일러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대버일러 다이산을 등에 짐으로써 대칸과 3대 버일러가 정사를 보던 제도를 폐지하고 '남면독좌' 전제군주를 강화시켰다. 또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내삼원, 육부, 도찰원을 설립해 삼원 육부 2아문이라는 정부 조직 체제의 틀을 구축하며 관료제를 부족적 질서를 바탕에다가 두고 명나라식 체제를 가미하여 통치체제를 구축, 지배체제가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미 청나라는 정묘호란이 끝난 이후부터 군사적으로도 조선이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영화 <최종병기활>에서 나오는 청나라군의 활은 짧지만 매우 강했으며 숙달되기까지 몇년의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했으며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독특한 방법, 즉 오른손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동안 왼손으로 활과 말고삐를 잡는 독특한 전법을 사용해 실용적이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싸웠다. 보병은 약간의 궁수와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포수들이었는데 한족 출신 한군 기인들의 사격은 오랜 전쟁으로 숙련되어 전문가 수준이었다.


조명 연합군이 패한 사르후 전투를 통해 청나라군은 적들의 분산 진격에 한 곳만 올인해 집중적으로 공격한다는 전술을 강화했다. 이 전술은 병력을 집중해서 각기 격파하는 전략전술로서 중국 군제사상 약소병력으로 강적을 무찌른 사례로 꼽힌다. 특히 청나라군을 지탱하는 제도는 팔기제였는데 이는 여진족의 몰이사냥을 원형으로 만든 조직이며 이 중에는 몽고팔기와 한군팔기, 심지어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선군 병사도 팔기제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팔기제는 황제에게 종속된 것이기에 강력한 황권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다양한 민족들을 포함시킴으로써 금 시절 여진족이 범했던 오류인 타민족 억압 정책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 여진 통일 이후로도 불안하던 내부를 확고히 안정시켰다.


청나라는 후금 시절인 1631년부터 화약 무기를 주요 병기로 자리잡게 했다. 홍이포(紅夷砲)라는 대포는 그해 7월부터 명나라 요서 지역 방어 거점을 수개월 동안 포위했을 때 거점들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괴하여 명나라군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명나라 장수였던 공유덕, 경충명, 상가회 등이 후금에 투항했을 때 서양의 대포들과 기술자들을 그대로 후금군에게 넘겨줬는데 이 중에는 포르투칼인으로부터 직접 대포 제작 기술을 배운 자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로 후금의 화포 실력은 한단계 더 향상되었다. 공유덕은 아예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수군 및 기술자들을 그대로 후금에게 바친 건 덤.


결정적으로 영원성 전투를 통해  후금군 및 후신 청나라군은 공성전 발발시에는 정면공격을 피하고 화포 사정거리에서 떨어져 요새를 봉쇄하여 수성군을 아사시키는 치밀한 작전술을 익혔는데 이걸 그대로 써먹는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남한산성 전투다. 이때부터 청나라군은 화포 전력 구비의 중요성과 공성전이 벌어질 때 어떻게 빨리 피해를 최소화하며 저들의 항복을 받아낼 지, 알아낸 베테랑이 된 상태였고 조선과 명나라의 태만함이 저들이 저렇게 강성해지게 자초한 것이었다.

이괄의 난, 그리고 김자점의 은둔


청나라군은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장군 못지 않게 빠른 속도로 한양까지 밀어붙였다. 이걸 보고 임진왜란을 겪고도 얼마나 멍청했으면 교훈 하나 얻지 못한 채 어떻게 방어선이 다 뚫리냐,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하는게 먼저 당시 조선은 저 위에 문단에서 서술을 했듯이 병력을 밀집할 정도로 양병하여 침략에 대비할 방안을 세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이미 왜란으로 한번 파탄나고 이전 임금이던 광해군이 궁궐 토목 공사하며 15~25% 예산 쓰느라 재정 두번째로 파탄낸 시점에서 군사력 확충할 돈? 음...글쎄다?


북부 방어선은 물론 광해군 때부터 병력이 부족했던 탓도 있지만 공백이 생기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1624년 이괄의 난이다. 한반도 북부 지역 일대의 대규모 반란이었던 만큼 진압된 이후에도 청나라의 침입을 방어할 북방 방어 체계가 상당히 망가진 채 복구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괄측 패잔병 중 일부는 청나라군이 침입해오자 길잡이 역할을 하며 청나라군이 한양까지 밀고 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앞잡이 역할을 했다.


그런 와중에 청나라군의 남한산성 포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 관료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자점이다. 훗날 효종 당시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는 인물로도 유명한데 이 자가 병자호란 당시에 거한 트롤링을 한다.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초기에는 청나라군과 교전했으나 동선역 전투에서 패한 후 정방산성에 틀어박혔다. 결국 그 타이밍에 김자점은 청나라군 선봉대가 남하하는 걸 놓치고 말았고 그대로 남한산성까지 밀고 들어간다. 당시 청나라군은 지방군과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별로 없었으니 나가서 쳐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이괄의 난으로 인한 안보 공백과 김자점의 실책은 나비효과가 되어 삼전도의 굴욕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패배 후 김자점은 잠시 동안 책임을 지고 유배를 떠나기도 했으며 후방에 병사들을 묶어놓고 제대로 행동에 나서지 않은 그의 병크는 아직도 병자호란 얘기가 언급될 때마다 까이는 소재다.

맺음말: 조선의 실패를 넘어 봐야 할 것


병자호란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을 보면 단순히 조선이 개병신이라 망했고 야만적인 오랑캐 여진 놈들 하나 못막은 인조는 조선 최악의 임금이라는 식으로 흘러간다. 인조가 그닥 유능하지 못했었던 임금인 것도 맞고 그 역시 병자호란에는 분명 책임은 있을 것이다. 나도 인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며 후금이 청나라가 된 시점에서 끝까지 여진 오랑캐라고 무시할 수만 없는 노릇이라는 점에서 조선 사대부들의 대외 인식 자체는 올바르다고는 못본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실패는 단순히 인조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조 이전부터 조선의 상황은 막장이었으며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것은 자국 내 물자 부족과 어느 정도 강력한 지방 강소국이 후방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기에 광해군이건 인조건 나발이고 이 상황에서 전쟁을 막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걸 알아야 하는게 화이질서에 녹아들대로 녹아든 조선 조정에서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 편에 적극적으로 붙자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기야 했을까?


병자호란은 조선 내부에서 누구 한 쪽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가 없다. 인조야 당시 최고 책임자였으니 당연히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중립외교를 펼쳤기에 호란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광해군도 실제로는 어중간한 포지션에서 갈피를 못잡아 혼란을 준 건 물론이고 뻘짓거리 하다가 북부 지역 방비와 군량 확보에 쓸 예산마저 궁궐 토목 공사에 빼돌려 투입하지 못하는 희대의 촌극을 벌였다. 그 결과로 조선은 호란의 조짐에도 양병을 섣불리 하지 못하고 북방 방어선을 공백 상태로 나둘 수 밖에 없다가 다 깨져버렸다.


우리는 병자호란으로부터 몇백년 지난 시점에서 얼마나 그 당시 조선의 조정보다 발전했는가? 그걸 스스로에게 자문해보는 것이 우리가 병자호란의 교훈을 되새기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단순히 '역사 재판'을 하여 누군가를 죄인으로서 심판하기 보다는 제대로 당시의 상황을 복합적으로 고찰해볼 시기다.


참고 문헌:


오항녕, <조선의 힘>, 역사비평사, 2022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옌 총리엔, <청나라, 제국의 황제들>, 산수야, 2017

허태구,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군사력 강화 시도와 그 한계 -인조대 초반 병력 확보와 군량 공급을 중심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정원열 외, <군사대비태세 차원에서 본 병자호란의 참패원인>, 육군군사연구소, 2014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윌러엄 T. 로,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너머북스, 2014

임용한,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레드리버, 2022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계승범, <광해군, 두 개의 상반된 평가>, 한국사학사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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