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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by 제이슨

우리나라에서 201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궜던 사법 관련 이슈 중에는 미투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대략 2018년 초부터 몇몇 여성들이 폭로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 전체로 번져간 이슈였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용기있는 여성들의 고백이라 표현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감싸줬다. 그 절정을 찍은 사건이 바로 충남도지사이자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안희정이 비서의 폭로로 미투에 걸려 정치생명이 끝장난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몇몇 미투들이 허위사실로 밝혀지며 다소 힘을 잃었고 2019년 이후부터는 젠더 갈등 이슈가 부각되면서 미투 운동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곧 남녀갈등이라는 극한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런 미투로 인한 광풍 속에서 허위 미투들은 물론이고 성인지 감수성으로 인해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보배드림 곰탕집 사건이었고 여성폭력방지기본법 논란을 거쳐 양예원 사건 같은 여러가지 무고 사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각이 엇갈리고 정확한 사실 규명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안희정 미투만 해도 2, 3심 판결에서 사법부는 증거를 통해 재판하기보다는 피해자의 증언만을 토대로 삼았을 정도였다. JTBC는 아예 시류에 편승해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지껄이기도 했다. 물론 진짜 성범죄 처벌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무고 사건의 최소화, 증거재판주의,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증거재판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이 상실된 사법 제도가 평범한 개인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주인공 텟페이가 알바 면접을 보려고 지하철을 타다가 치한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고 실화 모티브라고 한다. 알다시피 일본 지하철은 출근길에 지옥철에 가까울 정도로 꽉 차있었고 이때 텟페이는 닫힌 문에 낀 옷자락을 빼다가 바로 앞에 있던 여중생에게 치한으로 몰리게 된 것이었다. 작중에서 정황상 누군가 그 여중생의 몸에 손이 닿은 것은 맞다고 보여지긴 하는데 텟페이는 확실하게 아님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진짜 범인이 누군지를 떠나서 영화 속 텟페이는 지하철을 타고 면접을 보러 가던 청년에서 바로 성범죄자가 되어버리는 과정을 일사천리로 한번에 보여준다. 텟페이가 치한으로 몰린 후 역무원에게 이끌려 간 후 텟페이가 아님을 증언해줄 다른 여성이 따라와서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듣지 못한건지, 귀찮아서 넘긴건지 역무원은 그대로 문을 빠르게 닫아버리고 여중생의 말만 믿고 그를 경찰에 인계해버렸다. 뭐 여기까지는 사실 역무원 입장에서 경찰이 담당해야 할 성범죄 사건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는 않으니 텟페이 시점으로 영화 속 이야기를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화가 날지언정 마냥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에 텟페이를 끌고 간 경찰의 태도부터는 진짜 고구마를 몇천 개 먹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막장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경찰은 아무런 법적 판단도 나오지 않은 텟페이를 벌써부터 범죄자로 취급하며 니가 저지른 거 다 아니까 빨리 혐의 인정하고 벌금이나 내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와 더불어 매우 강압적인 태도로 유죄 판결도 안나온 사람을 호통치는 건 덤이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실적을 올리는게 급선무니 텟페이가 범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한 여부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검찰로 넘어간 후 검사들끼리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진범이 누구건 내 알 바 아니고 실적만 올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유죄 나와서 인생 망하던 말던 상관 없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작중에서 검찰은 대놓고 텟페이를 범인으로 확정해놓고 수사를 하고 있다. 교도관들도 텟페이를 흉악범 다루듯이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 일본 교도소와 검찰로 취조받으러 이송되는 모습, 취조 과정이 잠시 나오는데 교도관들의 태도도 그렇고 수갑을 여러 재소자들을 한데 묶은 것도 그렇고 거의 인간말종 흉악범들 경멸하듯이 대하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증거재판주의는 찾아볼 수도 있고 기껏 해봐야 텟페이의 집에 있던 AV물을 압수해와서 변태 취향으로 몰아간다거나 여중생이 어렵게 신고한 힘든 심정을 생각이나 해봤냐는 식의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다" 급의 한 국가의 사법기관이 도저히 보여서는 안되는 행태들만 계속 내보이고 있다.

변호사는 텟페이의 편일까? 스도라는 텟페이의 변호사는 변호인이라는 의뢰인을 위해 일해야 할 법조인으로서의 자각보다는 여성으로서 치한으로 잡혀온 텟페이에 대한 경멸과 혐오, 의심이 앞서는 인물이다. 처음부터 텟페이에게 진짜 범죄자가 아니냐며 되묻는 방식으로 의구심을 표한다거나 주임 변호사인 아라카와에게 치한 따위를 도저히 변호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는 등 법조인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마저 저버리는 짓거리를 일삼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스도 변호사는 텟페이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치한 사건 그 자체에 가해자 위치로 지목받았다는 것에 법조인 이전 여성으로서 반감을 품고 변호를 꺼려하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치한 사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스도 변호사는 여성 이전에 변호사라는 법조인이고 의뢰인이 설령 진범이라 할 지라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 <리갈하이>에서 마유즈미 변호사가 자신이 살인범을 변호해서 사회로 돌아가게 해준게 아닐까 걱정하자 코미카도 변호사는 "사람을 죽였건 안 죽였건 그런 건 나랑 상관 없고 아무 흥미도 없어. 검찰 측의 증거가 불충분했지. 그래서 그는 무죄가 된 거야"라고 하며 우리는 신이 아니고 변호사니 자만해서 안된다고 지적한다. 그 말로 보자면 변호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은 완전무결한 정의의 심판자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들이 다해야 할 최선은 의뢰인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스도 변호사는 법조인의 원칙보단 너무 개인 감정이 앞섰다.


그리고 작중에서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던 이 재판은 텟페이를 도울 시민단체들과 무죄를 입증해줄 결정적인 증인이 나옴에도 피해자의 증언이라는 절대적인 성역을 넘을 수 없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범죄 사건은 유죄 입증이 어렵기에 피해자의 진술이 판결에 안 그래도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는 구조인데 피해자인 여중생이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해 고통을 느끼며 호소하는 모습을 보이면 더욱 유리해질 수 밖에 없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이미 낙인이 찍힌 상태에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온갖 증거들을 모아서 하나하나 다 논파해야 하는데 정작 피해자는 증언 하나로 모두의 보호를 받으며 상대방을 유죄로 몰 수 있으니 판 자체가 굉장히 불리한 쪽으로 설계된 상태에서 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무고 사건에서 승리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결말은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끝난다. 아무런 반전도, 카타르시스도 없이 텟페이는 징역형을 선고받으며 성범죄 전과가 그이고 그렇게 한 청년의 인생은 망가지게 되었다. 비슷한 느낌의 작품인 영화 <더 헌트>처럼 비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난 작품인 셈이다. 판결문을 들으며 독백하는 텟페이의 마지막 장면은 정의가 불의를 쓰러트리는 흔한 법조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현실의 씁쓸함을 잘 보여주는 대사라고 볼 수 있겠다. 중간에 아라카와 변호사는 무죄 판결을 내리는건 경찰과 검찰을 부정하는 일이며 다시 말해 국가에 반항하는 일이기에 그래서야 출세를 할 수 없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애당초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일본에는 "원죄(엔자이)"라는 말이 사법 쪽에서 종종 쓰인다. 경찰, 검찰, 사법부의 관료주의 행태에서 나온 말인데 실제로 일본은 유죄율은 99% 이상인데 기소율은 33.4%에 머물고 있다.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도 비슷하다. 이 말은 즉 검찰과 경찰이 정밀수사해서 유죄가 나올 것 같은 것만 기소한다는 것인데 겉으로만 보면 수사 단계에서 억울한 사람들이 걸러질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니냐고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뒤집어 보면 국가기관의 판단으로 유죄가 나와야 하는 사람이 빠져나갈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며 법원으로 넘어가게 된 사건들은 여지를 두고 다툴 가능성이 생겨도 일단 기소가 되었기에 유죄로 방향성이 쏠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즉 기소가 된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유죄가 뜰 확률이 매우 높다는 말. 실제로 한국의 법원 판결도 사법부의 괘씸죄나 사회 분위기상의 이른바 "법감정", "떼법"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잦은 편이다.


" 얼마나 재판이 혹독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도 나는 정말로 하지는 않았으니까 유죄가 될 리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진실은 신만이 알고 있다고 말한 재판관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틀린 말이다. 최소한 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재판에서 진실로 심판을 할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다. 최소한 나는 재판관을 심판할수 있다. 당신은 실수를 범했다.

나는 결백하니까.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다. 재판은 피고인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모아들인 증거를 가지고 임의로 판단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유죄가 되었다. 그것이 재판소의 판단이다.

그래도...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 "


마지막에 판결문을 들으며 주인공 텟페이가 독백하는 대사다. 이 말에서 우리는 사법기관의 판단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으며 그 판단 기준의 임의적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열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법정은 그렇지 못하고 정 반대인 모습이 오늘날의 현실이 아닐까 씁쓸하면서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는 감정이 든다. 게임 "역전재판"이 플레이어가 아무리 피고의 무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상대 변호사들인 마츠루기와 카루마 등이 피고에게 유리한 증거를 감추던 그 모습은 게임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모티브가 된 사건의 무고 피해자는 항소, 상고를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진짜 리얼 현실은 그것보다 더 비참하면 비참하지, 결코 더 낫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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