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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 두이, 띤! (एक, दुई, तीन)”

#Nepal 6

by Summer

트레킹은 힘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롯지 다이닝 룸에 여럿이 모여 삼삼오오 수다를 떠는 일은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저녁 먹을 때만 가능했다. 조용한 시간을 빌려 하루를 정리하는 글을 쓸 거라는 환상은 노트와 펜을 챙겨갔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딱 하루만 실천할 수 있었다.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 세상과 잠시 단절되어 볼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어딜 가더라도 구비되어 있는 와이파이와 여행자 대부분이 사용하는 유심 대신 더 잘 터지는 유심을 산 우리는 누구보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열심히 업로드했다. 사색을 하고자 했지만 앞서 나열했던 것들처럼 쉽게 됐을 리 없다.



엄마는 마지막 힘을 냈다. 푸르스름한 새벽에 일어나 빨갛게 변하는 산꼭대기를 보는 것에 성공한다. 너무 추워서 온몸이 떨리던 그 새벽에 ‘ABC에 발도장 찍기’라는 목표는 모두가 낙오 없이 잘 (엄마의 컨디션은 꽝이었지만 목표 지점까지 오는 건 했으니) 해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등반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하산까지 두 다리로 해야 진정한 ‘등반’ 아니겠는가. 올라왔던 길을 똑같이 내려가는 건 무진장 쉬워 보이겠지만 큰 일 날 소리.


하산은 1.5일 만에 완료해야 했다. 뱀부(Bamboo) 전 후의 그 오르막과 내리막을 다시 마주해야 했고, 셀 수 없이 많은 계단들을 이제는 내려가야 하는데 힘을 써야 했다. 그리고 수치적으로 4000m 정도 올라왔으니 그대로 내려가야 한다고 일러두면 실감이 될지 모르겠다. 심지어 나 빼고 우리 가족 셋은 무릎 부상 경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산은 더 신경 써야 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생겼다. 언니의 무릎이 고장 났다. 나와 오빠는 페이스가 빨랐고 엄마와 언니는 덜 빨랐는데, 이걸 감안해도 두 그룹 간의 거리는 계속 벌어졌다. 우리에겐 ’ 1. 뱀부(Bamboo)에서 자기, 2. 로워 시누와(Lower Sinuwa) 가기‘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뱀부 숙소는 트레킹 둘째 날 숙소랑 동일했고 사실 여긴 한번 더 가고 싶지 않은 숙소였다. 시누와는 2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하지만 핫샤워가 가능했고 숙소도 깨끗하다고 했다. 한 번 다짐한 건 해내고 마는 우리는 시누와까지 가기로 결정한다.


오빠는 오빠의 가방 위에 언니의 가방을 하나 더 들쳐 엎고서 속도는 더 올린 채 선발대를 자처하고 나와 걸었다. 분명히 내려가는 코스인데 오르막이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계단은 또 뭐가 이렇게 많냐며 악을 쓰던 건 우리에게 부스터 역할을 해줬다. 포카라로 돌아가면 윈드폴 사장님의 음식과 술로 여독을 풀자며 “소주! 맥주! 삼겹살!” 이 삼인방도 도파민이 되어주었다.




시누와에 도착하자마자 어느 롯지보다도 깨끗한 숙소에 감탄한다. 짐을 얼른 풀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엄마와 언니는 너무 고단했던 탓에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바로 잠에 들었고, 나와 오빠와 포터들은 고생한 서로에게 위스키를 선물했다. 보약이라며 꼭 먹어야 한다는 이 위스키는 ‘뜨거운 물 + 네팔 위스키 + 꿀‘조합이었는데, 한 모금하자마자 몸이 녹았다. 수다 타임이 끝나고 방에 들어와 누웠지만 쉬이 잠들지 못하고 괜히 뒤척였다. 다음 날이면 이 트래킹도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까. 찍었던 사진을 세어가며 잠이 들었다.




마지막 날에는 그간 고생한 포터들의 어깨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주고자 나와 오빠는 가방의 무게를 늘려서 하산했다. 나는 8kg을 메고 끝까지 내려왔다. 가방이 무겁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다. 그저 또 묵묵히 가게 되는 게 신기했을 뿐. 올라가던 날들의 날씨가 이렇게나 좋았다면 얼마나 지옥이었겠냐며 해가 없고 선선했던 날씨에 감사하며 내려왔다. 그리고 곱절로 무거운 가방을 메고 올라간 포터들에게도 한 걸음 한 걸음 감사하며 걸었다.


아차차 포터를 언급하니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난다. 포터들과 한국어, 네팔어를 서로 가르쳐줬는데 나는 숫자를 네팔어로 배웠다. 분명 10까지 배웠는데 ’에크 (1), 두이 (2), 띤 (3)‘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열심히 외치며 오르내렸는데 다 까먹었다. 4가 짜르, 5가 빠츠였나… 역시 언어를 배우는 건 어렵다.



트레킹이 끝나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항상 “맛있는 디저트 먹기”로 대답했다. 우리 가이드는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빵집을 하나 소개해줬고, 여기서 그 소원을 잠시 이뤘다. 커스터드가 든 빵이나 크럼블류가 맛있다는 후기가 있었지만 나는 나만의 갈 길을 갔다. ‘시나몬롤‘에 환장하는 나는 다른 메뉴는 보지도 않고 시나몬롤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내가 기대했던 빵의 촉감과 맛이랑 거리가 멀었지만 커피와 디저트를 히말라야를 보며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또 하나의 낭만이다. 그리고 엄마가 맛있어했던 귤. 한 봉지 사서 고생한 엄마에게 선물했다. 혹시 ABC 트레킹을 갈 예정이라면 귤은 꼭 추천하고 싶다. 아, 빵집은 ‘German Bakery & Coffee’.



트레킹은 이렇게 끝이 난다. 특별하지도 유별나지도 않은 일정과 계획들 그리고 마무리다.


“잘 다녀왔어?”에 대한 대답은

“응. 잘 다녀왔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먹을 수 있는 만큼 먹고, 잘 수 있는 만큼 자고, 헬기를 불러서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등반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엄마에겐 이 잘잘잘이 통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네팔을 다녀오고 다른 계절로 이행하는 이 시점에서 엄마가 먼저 네팔 참 잘 다녀왔다고 말하곤 한다. 엄마에겐 이 잘잘잘은 ‘잘 한 선택, 잘 도전했고, 잘 회상할 수 있다’라고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또 어떤 길을 가게 될까.


하나, 둘, 셋

순서대로 잘 가게될까? 나도 모르는 내 앞길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에크, 두이, 띤

때가 온다면 차분히 그 한 발을 잘 내딛어보자.

잘 모르겠지만 잘 될 거라고 나에게 심심찮은 위안을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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