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독어독문과 김누리 교수는 독일이 몇 천 년이나 되는 역사 중에서 12년밖에 안 되는 히틀러 시절을 영원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만큼 그들이 자신의 문화와 전통에 긍지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독일이란 나라를 아무리 길게 봐도 1871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한 시점 이전으로 돌릴 수는 없거든요. 2차 세게 대전 패망 후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분리될 때 서독의 수도로 본이 지정된 것은 그곳이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아니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의 고향인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이 탄생했을 때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었죠. 베토벤은 19세 이후에는 독일에 간 적이 없고 빈에서 살며 스스로를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에 반이 들어가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조상은 네덜란드계이죠. 그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서 한 집에 살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오스트리아가 먼저 독립하고 나중에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독일어권 국가들끼리 통합하면서 소독일주의가 완성됩니다. 비스마르크는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 전쟁까지 치렀는데 당시 비스마르크 생각은 오스트리아에는 게르만족 외에 마자르족 슬라브족이 섞여 있으니 순수 독일인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부터 독일 역사가 시작된다면 역사가 150년으로 미국보다 짧은 나라가 됩니다. 히틀러 치하 독일의 미국 특파원으로 ‘제3 제국 흥망사’라는 서구판 삼국지를 쓴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는 실제로 독일이 완전 통일이 된 건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시킨 이후라고 봅니다. 히틀러 이전에 실제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때도 독일은 300개 도시 정체성에 갇혀 있었던 도시 국가들의 모임에 불과했던 거죠. 1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 황제가 독일 지역 전체를 다스린 게 아니라 히틀러가 활약했던 바이예른 주 군대는 바이예른 황제의 지휘를 받아 전쟁을 치렀습니다. 같은 독일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에 있어도 자신들은 다른 도시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지역 정체성이 19세기 후반까지 독일을 지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10월 3일 독일 통일의 날 외에 독일의 국경일이 드문 이유가 설명이 됩니다. 국가라는 관념 우리는 하나라는 관념 자체가 19세기 후반에 형성됐으니 따로 기념일이라고 부를 만한 날들이 있을 리가 없죠. 히틀러기 전쟁에 이겨 세계를 지배했다면 4월 20일 그의 생일이 기념일이 되었겠죠.
현대 독일인들이 10월 3일 다음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바로 11월 9일입니다. 그들은 이 날을 운명의 날로 부릅니다. 1848년의 혁명이 발발했던 날이죠, 물론 독일만이 아닌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전 유럽에서 발생했던 민주화 혁명이었습니다. 1918년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공산주의 국가를 선포했던 날입니다. 물론 그들은 독일 우파 군인들에게 잔인하게 처형당했죠. 바로 스파르타쿠스의 연맹이었죠. 23년에는 문제적 인간 히틀러가 뮌헨에서 첫 번째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했던 날입니다. 그 전인 22년에는 독일인이 영원한 독일인으로 기억하고 싶은 아인슈타인이 광전효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날이었죠. 그리고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동에 반쯤 넋이 나가 유대인들을 구타하고 모욕을 주고 상점을 약탈했던 그날 수정의 밤이 바로 11월 9일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 날의 만행을 보고 독일에서 대사를 철수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이 히틀러의 고향이면서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의 고향이기도 한 이유는 그만큼 극과 극을 오갔다는 증거일 겁니다. 아데나워 이후 메르켈까지 현대의 독일은 그럭적럭 잘해 왔죠. 가장 보수적인 기민당이 우리나라 민주당보다 훨씬 더 진보적입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한국 진보에게 현대의 독일은 뚜렷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독일을 위한 대안이 반이민 정서, 러시아에 대한 공포 때문에 군사력을 강화하고 독일이 다시 우향우를 한다면 그때 진보에게 남은 희망은 무엇이 될까요? 물론 히틀러가 재림하지 않는 한 독일을 위한 대안이 정권을 잡을 일은 없어 보이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