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종이의 집은 정말 굉장한 대작이네요. 참고로 저는 스페인 원작 드라마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 우선 순위가 언제나 SF물이었던 관계로 종이의 집은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미루다 시즌 6까지 밀려버린 계륵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잘 만든 드라마를 놓고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걸 보면 스페인 원작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일까? 시간 날 때 시즌 1부터 정주행할 것을 제 자신과 약속해 놓고 오늘은 한국판 종이의 집에 대한 리뷰를 해볼까 합니다.
◆계획대로 모든 게 돌아가는 걸 영화에서 보고 싶은 인간의 심리
인간이 왜 바쁜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려고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꽉 짜여진 스토리에 몰입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계획을 완벽하게 짜고 실행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선 나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얻고 싶은 마음입니다. 돈을 벌고 인생에서 최고의 배필을 만나고 자녀 교육에 성공하고 등등 인간이 만나는 모든 문제는 인간의 계획과 실행력에 따라 결과가 좌우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든 소수만이 성공하고 다수는 실패합니다.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의 계획과 실행력을 보면서 나도 배우고 희망을 얻자는 게 영화 관객 특히 종이의 집과 같은 두뇌 퍼즐의 범죄 드라마를 보는 이유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국판 종이의 집이 당당한 성공작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는 유지태의 정말 치밀한 계획과 바로 이 사람의 놀라운 실행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유지태가 아니라 박해수인 이유
저는 오징어 게임의 실질적 주인공이 465억을 번 이정재가 이니라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그의 고향 후배 박해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박해수의 연기는 최고였죠.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비열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인지를 박해수보다 잘 연기한 배우를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맹탕에 가까운 유지태보다 박해수의 빛나는 조연이 더욱 압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마치 다크 나이트가 베트맨 영화가 아니라 크리스천 베일이 조연이고 조커인 히스 래저가 진정한 주연이었던 것처럼 이 영화도 박해수가 완벽히 장악한 박해수의 모노드라마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박해수는 오징어 게임 때와는 다른 차원에서 관객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바로 권력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는 잘 보여주고 있죠. 그가 살아온 방식 그가 인류 최악의 독재국가 그리고 독재국가 중에서도 최악의 삶의 조건이 제공된 탈북자 수용소에서 25년 동안 벼틴 뒤 살아남아 이 4조 원을 홈치는 단군 이래 최대의 강도 행위에 사실상의 현장 지휘권을 쥐게 된 인물입니다. 교수가 그를 처음부터 현장지휘관으로 생각한 데에는 자본주의 사회건 공산주의 사회건 인간을 움직이는 유일한 인센티브는 공포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로 마키아벨리와 스탈린이죠. 그가 던진 한 마디 한 마디의 대사는 오징어 게임의 조상우 못지않은 명언들이고 특히 권력과 정치라는 관점에서 정말 뼈 때리는 명문장들이죠. 맞습니다. 인간은 돈을 벌 때도 공포가 탐욕보다 훨씬 더 큽니다. 돈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내가 가난해져서 놓치게 될 것들에 대한 공포, 즉 손실에 대한 회피가 돈을 벌었을 때 누릴 수 있는 쾌감을 압도하기에 사람들은 무서워서 돈을 벌려고 합니다. 즉 돈이 좋아서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돈이 무서워서 돈을 발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 그는 공포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법칙이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음을 아는 진정한 권력자입니다. 물론 남은 후반부 6부작에서 베를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박해수의 파괴력을 감독이나 작가가 방향을 180도 클릭해 공포가 아닌 사랑이 권력의 본질이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교훈으로 끝을 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김윤진을 사랑한 유지태, 마치 히틀러가 유대인과 사랑에 빠진 듯
이 드라마가 권력에 대한 드라마, 권력의 본질이 공포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그 중간의 자발적인 동의인지에 대한 메타포어라는 생각은 결국 주인공인 유지태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서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탐욕적인 자본주의의 나라 대한민국과 가장 공포스럽고 흉악한 공산주의 독재국 북한이 머지않아 그렇게 급작스럽게 통일될 확률이 0이라는 사실을 대다수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체제는 언제나 민족을 초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결말이 가장 기대되면서 걱정되는 이유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극단이 만나 균형을 이루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를 한국 관객들은 너무나 잘 알기에 그 과정을 정말 개연성 있게 그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기 때문입니다.
유지태는 시즌 1의 절반을 보건대 한국과 북한의 경제적 통일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인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왜 남북 경제 협력의 상징과 같은 조폐국을 습격해 인질극과 함께 4조 원의 돈을 찍어내 바깥으로 빼내는 범죄 행위를 할까 진정한 이유가 돈 때문일까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은 아마 12월에 공개될 후반부에 드러날 전망입니다. 분명 그는 돈 때문에 이 계획을 세운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제 생각에는 현실 정치에 대한 보다 더 신랄한 비판을 후반부 시즌에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유지태가 공격하는 대상은 남북 정부가 아니라 그에게 경제적 통일의 밑그림을 그리도록 유도한 남한 최고의 채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고요.
여하튼 그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범죄계의 페르마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예상되는 모든 가능성을 대비하는 치밀함의 끝판왕으로 나오는데요, 그도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가 생겼습니다. 바로 김윤진과의 사랑이죠. 그는 이번 거사를 반드시 성사시키기 위해 일부러 남한 경찰의 네고시에이터로 김윤진을 택하고자 일부러 접근했는데요, 그가 6회에서 그녀와 진짜 사랑에 빠져 버렸음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공포라는 감정도 통제하지 못하지만 공포의 반대인 탐욕과 사랑(저는 사랑도 일종의 탐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독점욕이 사랑의 어두운 본질이죠.)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현재까지 본 소감으로서는 그가 실패하고 실패의 이유가 사랑 때문일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해 주지만 저는 그 결론만큼은 피했으면 싶습니다. 너무 뻔하고 너무 신파적이 되어버리니까요. 봉준호 감독처럼 전혀 예상 못했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신선한 결론으로 시즌 1을 마무리하기를 바랍니다.
사족이지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김윤진과 모든 것을 다 아는(즉 이성적으로는 절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유지태가 진짜 사랑에 빠진다면 이는 히틀러가 에바 가드너나 친조카인 켈리 리우발이 아닌 유대인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다소 결이 다른 독재자지만 권력을 위해 사랑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스탈린과 일치합니다. 물론 스탈린은 사이코패스로 사랑 자체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지만 여하튼 히틀러는 어떤 상황에서도 권력이 먼저지 사랑이 먼저일 리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지태가 히틀러는 아니잖아요? 그는 인질을 절대 죽이지 않겠다는 원칙, 여론을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가 단순히 거사의 성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철학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이 되었든 사랑과 가장 가까운 어떤 형태의 책무감(그는 죄책감이라고 느끼기도 하지만)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는 스탈린과는 정말 다르고 히틀러와도 정말 다른 사람이죠. 물론 권력자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리즈 후반부에 결국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김윤진이 유지태를 죽음으로 몰고 갈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 봅니다만 만약에 4조 원 탈취라는 이 프로젝트가 실패해도 유지태는 얻는 게 분명 있습니다. 어쩌면 실패한 로빈 훗으로 기억되고 싶은 게 그의 진정한 바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 예상대로 유지태가 죽는다면 이 작품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권력에 대해서 감독과 작가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고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은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죠. 저는 작가와 감독이 작품 전체를 통해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타워 팰리스를 바라보며 전종서가 유지태에게 가격을 물을 때 유지태가 답한 말, “북한이 계급이 세습되는 사회라면 남한은 부가 세습되는 사회”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감독은 후반부에 어쩌면 권력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계획과 실행을 넘어 세습이란 남북 공동이 처한 가장 큰 문제(실제로 통일 한국을 한국인들이 지상 최대의 판타지로 여기도록 만든 본질적인 이유)를 정면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아무튼 시즌 후반부가 정말 기대되는 작품으로서 한국 드라마가 정말 진화해서 이제는 정말 미국도 뛰어넘어 세계 최고의 드라마 제조 국가가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은 잘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비판 대신 찬사를 받아야 할 작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