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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에게 술탄 셀림이 롤 모델인 이유

by 신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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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브런치에 올린 첫 번째 글이 오르한 파묵의 책 리뷰로서 터키가 동양인지 서양인지 정체성의 뿌리를 찾는 글이었습니다. 터키는 14세기까지는 확실히 서양이 맞고요, 중국 서부의 돌궐 족의 일부가 이동하면서 터키 동부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뒤 오스만 튀르크를 세우고 비잔틴 제국과 치열하게 대립한 뒤 마침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15세기 중반부터 확실히 동양이었던 특이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에는 그리스와 로마와 같은 공동체였던 것으로 보이고요, 돌궐 족이 대규모로 이주해 와 지금의 터키 국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와 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한 뒤 주변의 셀트족을 정복했던 과거 영국의 역사와 놀라우리만치 유사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순수 돌궐 족 출신의 터키인도 없을 것이고 돌궐 족들은 그전에 동로마 제국 그 이전에 트로이 왕국의 주민들과 섞여서 현재의 터키인이 되었겠죠. 그러나 지금의 터기는 15세기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고 돌궐 족이 세운 오스만 튀르크 이후의 터키만을 자신들의 역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선봉장이 케말 파샤 이후 오랫동안 터키를 지배해온 제정 분리의 사회를 다시 제정일치로 돌리려고 하는 국수주의자 에르도안이 버티고 있죠.

이 에르도안의 롤 모델이 바로 오스만 튀르크의 9대 술탄이었던 셀림입니다. 셀림은 중동이 중국처럼 삼국지가 재현되던 14~15세기 같은 수니파로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해 현재의 이집트를 대부분 장악했던 맘루크 제국을 멸망시킨 주인공입니다. 칭기즈칸의 여러 차례 공격도 막아냈던 맘루크 제국이 셀림은 당해내지 못했죠. 그리고 숙명의 라이벌로서 어찌 보면 기독교 문명보다 훨씬 더 터키가 증오하는 시아파의 맹주 이란의 시파비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그 영향력을 더욱 축소시켜 터키가 수니파의 맹주를 넘어 이슬람교의 최대 강자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죠. 사실 셀림의 주적은 스페인도 아니고 포르투갈도 아니었으며 더더욱 베네치아 공국은 아니었죠. 이란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시아파를 증오했고 튀르크 내 시아파를 조직적으로 학살해 재임 기간 동안 민간인 수만 명을 학살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시아파의 거두인 이란의 이스마일 황제를 탁발하는 개라고 표현하는 서신을 보내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습니다.

시아파인 이란은 수니파인 튀르크라는 막강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오스만 튀르크와 같은 수니파인 맘루크 제국에게 SOS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맘루크는 당시 오스만 튀르크의 서진을 두려워해 중립을 지켰죠. 그리고 믿기 힘들지만 이교도인 기독교 문명국가인 스페인 포르투갈 베네치아 공국 그리고 로마 교황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호루무츠 해협을 장악하고 있어 필연적으로 오스만 튀르크와 충돌할 수밖에 없던 포르투갈만 최소한의 원군을 보냈죠.

셀림의 집권을 보면 이슬람 문명에서 권력을 놓고는 부자지간도 공유할 수 없고 형제간의 살인은 다반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태종 이방원이나 당태종 이세민은 특별할 게 없습니다. 일단 셀림은 알바니아 출신 어머니가 노예였죠. 그는 10명의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고 궁을 떠나 총독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변방을 다스릴 때 위로 배다른 두 형이 그를 극도로 견제하는 상황이어서 술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키죠. 일설에 따르면 독살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만 편애하고 큰 아들에게 술탄 자리를 물려주려는 것(그 이야기는 자신을 포함해 자신의 어머니까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을 알고 선수를 쳐서 아버지와 전쟁을 치르고 이긴 뒤 당당히 술탄에 오릅니다. 이어 차례차례 두 형들과 전쟁을 벌여 모두 죽입니다. 형들만 죽인 게 아니라 자신의 조카들도 모두 죽입니다. 정말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권력 교체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는 아들 한 명에 딸 6명을 두었는데 ‘술탄 셀림’의 저자인 예일대 교수 앨런 미카일은 실제로는 셀림이 큰 아들만 남기고 다른 모든 아들은 어린 시절에 죽여서 승계 구도를 확실히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자식이 부모와 형제를 죽이는 일도 있고 아버지가 권력 때문에 아들을 죽이는 일도 사실은 우리에게도 있었죠. 소현세자를 독살한 인조와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 영조가 있었군요. 권력은 그리고 그 권력이 클수록 잔인한 법입니다.

물론 셀림은 정복자이며 정치를 잘했죠. 기독교인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유대인이든 종교도 묻지 않고 튀르크인 인지 아닌지(사실 본인도 엄밀하게 말하면 순수 튀르크인이 아니죠. 그의 아들 슐레이만의 어머니 즉 자신의 첩 하스파도 우크라이나 출신이었습니다. 슐레이만까지 오면 사실 순수 튀르크 피는 20분의 1도 안 될 겁니다. 그때는 부계만이 DNA를 물려주는 줄 알았던 거죠.)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과 경쟁만으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습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늘렸지만 결국 통치를 위해서는 돈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조세면에서 기존의 제국들보다 훨씬 더 나은 제도를 도입해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분열돼 있던 유럽과 북 아프리카 이슬람 세력들의 갈등 관계를 파악해 철저하게 디바이드 앤 룰을 실현해 반란을 최소화했습니다. 확실히 그는 오스만 튀르크의 최전성기를 상징합니다. 슐레이만 이후에 발칸 반도의 지배력을 놓고 신성로마제국과 충돌해 빈을 공격하지만 함락하는 데 실패했고 1570년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국 연합군에 대패함으로써 오스만 튀르크의 국력은 서서히 쇠퇴해지고 19세기부터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영국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주도권을 넘겨주지요. 그래도 18세기까지는 유럽이 가장 무서워하던 적이 바로 오스만 튀르크였습니다.

우리가 알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실은 대서양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 가 대칸(그때는 이미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낸 후였지만)과 손을 잡고 동서에서 오스만 튀르크를 공격해 제국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이었다고 하죠. 아무리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해서 쿠빌라이 칸이나 그의 후계자들이 기독교 용병이 되어줄 리는 만무했을 것 같은데 자신들을 공격했던 한 때의 적 몽골과 손을 잡아야 할 만큼 15세기 유럽이 겪는 오스만 튀르크에 대한 공포심은 실로 어마어마했던 모양입니다. 현재 인플레이션 80%를 기록하고 리라화의 가치는 폭락하면서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에르도안이 제2의 셀림이 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가 그렇게 될 확률은 사실상 0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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