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프랑스에서 나왔습니다. 국내에도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는 아니 에르노입니다. 저도 이 작가의 소설 여러 권(아마 출간 작은 다 읽은 듯)을 읽고 외고 프팡스어과 학생들에게 적극 추천했던 작가입니다. 한림원은 "사적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구속의 덮개를 벗긴 그의 용기와 꾸밈없는 예리함"을 노벨 문학상 선정의 배경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한림원 측의 평가가 독자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에로느하면 지금은 타계한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황현산 교수가 생각납니다. 황현산 교수의 유고집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에 보면 프랑스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 ‘남자의 자리’를 불문과 학생들에게 과제로 주었더니 학생이 아니라 학생의 엄마가 감동을 받아 울었다는 트윗이 실려 있습니다. 에르노는 40년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여류 소설가인데요, 특이하게도 자신이 체험한 내용만 소설의 소재로 사용합니다. 프랑스 문학은 다채롭습니다. 베르베르처럼 상상력만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도 있고 에르노처럼 100% 체험만 갖고 소설을 쓰는 작가도 있습니다. 저도 에르노의 소설을 몇 편 읽었고 그중에 한 권이 ‘남자의 자리’입니다. 울 정도로 감동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저하고는 필이 안 맞는 소설이었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게 과연 소설일까? 에세이일까?라는 의구심이 끝없이 들었죠. 소설가? 이야기 플롯을 만들 줄 알아야 소설가지? 이런 형식의 소설이라면 그때는 소설가가 아닌 작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에르노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인류학자나 미시 역사가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황현산 교수의 제자의 어머니는 왜 이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렸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감동 때문이 아니라 그냥 울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작가는 아버지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3인칭으로 객관화해서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거든요. 아버지는 일종의 범주죠.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미건조 속에서 소외를 찾고 플롯의 의도적 무시 속에서 집단적 구속의 덮개를 벗긴 용기를 찾는 한림원은 확실히 문학을 보는 관점이 일반 독자와 많이 다른 듯합니다.
일단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이 이번에도 드러났습니다. 즉 무라카미 하루키나 앤렌커나 조이스 캐롤 오츠처럼 언론이나 도박사들이 예상하는 후보들은 당연히 제외된다는 거고요, 두 번째는 대륙 안배인 거죠. 지난 해 아프리카, 재작년에 미국에서 수상자가 나왔으니 이번에는 프랑스가 받을 차레라는 거죠. 패트릭 모리아노 이후에 8년이 흘렀으니까 프랑스는 당연히 받을 차례가 되었죠. 프랑스는 실제 노벨 문학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입니다. 세 번째는 독창적인 자기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대중들보다는 평단에서 평가가 높을수록 노벨문학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내년쯤에는 중남미나 아시아 작가의 순서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