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2022년 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보았어요. 중학교 때 몰래 읽던 책이었죠. 당시 엠마뉘엘 부인인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 인기를 끌었는데 저는 볼 수 없기에 은밀하게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 책을 계기로 DH 로렌스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제가 최고 걸작으로 생각하는 ‘아들과 연인’, ‘사랑에 빠진 여인들’ 등을 성인이 되어 읽었습니다. 아중에 ‘사랑에 빠진 여인들’이나 ‘무지개’는 제가 좋아하던 영국의 컬트 영화감독 켄 러셀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국내 상영되지 않은 이 작품들을 힘들게 구해 보게 됐죠. 켄 러셀이 더 좋아진 것은 그가 로렌스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전문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로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죠. 그런데 로렌스에 대한 평가는 단일색이 아닌 무지개색처럼 펼쳐집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수전 손택은 호불호가 심한 작가인데, 개인적으로 로렌스를 참 싫어합니다. 억지스럽고 감상적이고 거침없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래서 좋아합니다. 인간이란 억지스럽고 지나치게 감성적이며 앞 뒤가 맞지 않는 비일관적인 동물이고 이를 로렌스 소설보다 잘 보여주는 작품은 없으니까요.
이 원작 소설이 1920년대 발간이 되었을 때 그 선정성과 파격성 때문에 영국에서는 금서로 지정됐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탈리아에서는 환영받았습니다.
아시겠지만 23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무솔리니는 파시즘 정권에서 영국을 잠재적 가상 적국으로 설정해 놓고 검열을 크게 강화했는데요, 타임머신을 쓴 H G 웰즈 같이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작가의 작품은 금서로 수입을 금지했지만 영국 정부와 평론가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규탄받던 로렌스의 이 문제작 ‘채털리 부인의 연린’은 번역 출간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의 광산 노동자를 보라. 이 나라에서 가장 차별받고 사람으로 인정받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은 파시즘의 영도 아래 아무 차별 없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느냐? 32년생 움베르토 에코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썼던 회고록에 나온 내용입니다. 무솔리니 밑에서 히틀러의 괴벨스 역할을 한 사람이 분명 있을 탠데 누구인지는 모르겠네요. 여하튼 이탈리아가 이 작품을 이탈리아 국내에 공개하고 어느 면에서 권장한 데에는 영국 특유의 신분제 사회와 비교해 이탈리아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던 의도였을 겁니다. 이런 논리라면 스탈린의 소련 정부에서도 이 소설을 환영했어야 했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부르주아 여성의 바람이 상징하는 성적 자유가 못 마땅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구 소련에서 로렌스가 읽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원작 소설을 읽을 때는 워낙 어린 나이라 몰랐고 대학 입학하자마자 B자 비디오로 본 ‘차타레 부인의 사랑’에서도 못 느낀 로렌스의 진짜 의도를 이번 넷플릭스 영화를 통해서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계급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기보다 사랑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이죠. 중학교 때 처음 읽고 50대 중반에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영화의 질문은 똑같습니다.
“사랑은 몸으로 하나, 아니면 마음으로 하나?”
낭만적 사랑은 서구의 낭만주의 시대를 이어 현대까지 이어져 오는 서구식 사랑의 전형입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에로스적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죠. 에로스의 반대인 타나토스의 사랑도 낭만적 사랑의 한 측면입니다. 낭만적 사랑을 상징하는 불륜의 사랑은 상당 부문 많은 문학 작품에서 동반 자살로 마무리됩니다. 이럴 때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 되는 경우죠. 낭만적 사랑을 하려면 몸, 그것도 젊고 탄탄한 육체가 필요합니다. 차타레 부인이었던 실비아 크리스텔이나 채털리 부인이었던 페이 마르세이가 원했던 것은 완전체로서 온전한 남자의 몸이었습니다. 몸이 없이 낭만적 사랑은 없다! 그 사실은 인간이 몸을 갖고 있는 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몸이 완전체가 아닌 사람들, 예컨대 스페인 영화 ‘씨 인사이드’의 전신 마비 환자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채털리 부인의 남편 역시 그런 상황이죠. 둘은 똑같은 상황인데 전자의 작품에서는 진실한 사랑이 가능했지만 후자의 작품에서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죠. 그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요?
여기서 로렌스의 통찰력이 드러납니다. ‘씨 인사이드’에서 바르뎀은 상대(여변호사)에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혼이 목표도 아니었고 소유와 독점도 관심사가 아니었죠. 그런데 채털리 부인의 남편 클리포드는 그녀에게 원하는 게 있었죠. 자신의 명예를 지켜달라는 요구였죠.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몸이 없는 사랑도 얼마든지 이론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은 보여줍니다. 오히려 열정 없는 비육체적 사랑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찰스 디킨슨의 ‘위대한 유산’, 귀스타프 플로배르의 ‘감정 교육’ 등 평생을 가는 영원한 사랑은 오히려 육체 관계 없이 이상과 동경이 욕정을 대신하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애서 그 영원한 사랑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사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상대로부터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원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아마 극히 예외적인 소설이라고 봐야죠. 상대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몸으로 하는 사랑은 가능해도 마음으로 하는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될 때 몸과 마음이 결합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로렌스가 말한 것은 시대정신에도 부합합니다. 20세기는 모더니즘 현실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사랑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었죠. 로렌스가 추구했던 것은 쾌락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결합이며 이는 곧 자유와 평등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클리포드가 부인으로부터 아음을 완전히 빼앗긴 이유는 실은 평등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클리포드는 자신의 하인(사냥터지기)으로부터 오쟁이 진 남편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죠.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나이도 없고 조건도 없다는 말은 사랑은 그 자체로 자유이면서 평등이라는 말입니다. 21세기 진보의 시대에 로렌스는 분명 다시 평가받아 마땅한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