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게 지난 5월부터인데 관리자로서 통계를 볼 때마다 조회수와 좋아요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조회수는 높은데 좋아요가 적은 글이 바로 독소 전쟁 죽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 이야기였죠. 꾸준히 거의 매일처럼 독자들이 있는데, 다른 글에 비해 좋아요는 적더라고요. 스탈린과 히틀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 등 미국 중심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쟁 규모와 후세에 미친 영향 등 모든 면에서 독일과 소련이 치른 독소전 이상의 전쟁은 지금까지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앞으로 세계전쟁은 인류 공멸이니까요.
저는 독소전에서 이 사람이 없었다면 소련이 절대 못 이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러시아를 통제했던 스탈린일까요? 아닙니다. 소련군 최고 사령관으로 독일군 최고의 장군 만슈타인과 비견되는 주코프 장군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소련 스파이로 일본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했던 리하르트 조르게입니다. 조르게는 스파이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역대 최고의 스파이입니다. 세상의 스파이는 많지만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스파이는 그 외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전쟁이 인류 최대이자 최악의 전쟁이었으니 그 이름이 얼마나 유명했을까요? 스파이 하면 마타 하리를 떠올리는 사람은 실제 첩보사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실제 조르케는 러시아 국민 영웅으로 푸틴도 극찬하는 인물입니다. 소련 시절부터 서기장이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 그의 묘지 참배가 필수적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일본의 양심 언론 아사이 기자 출신으로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수상의 개인 비서였던 오자키 오자미로부터 9월 6일 열인 어전회의가 끝나자마자 확정된 정보를 가장 먼저 알아낸 외국인입니다. 그가 감언이설로 꼬셨고 상관으로 모셨던 오토 독일 대사보다 먼저 알아낸 사람이 그였습니다. 즉 히틀러보다 먼저 안 거죠. 그는 그 정보를 얻은 즉시 모스크바로 타전했죠. 스탈린이 정말 듣고 싶었던 메시지였습니다. “일본은 남하한다.”
당시 어전회의는 육군 대신 도조 히데키와 마쓰오카 외무부 장관이 강력하게 소련을 치자는 쪽이었습니다. 동맹국 히틀러의 간곡한 부탁이었죠. 마쓰오카 장관은 2월에 독일을 방문할 때 히틀러로부터 바르바로샤 작전의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나치의 외무부 장관인 리벤트로프는 6월 22일 독소전 이 주 전에 알려주죠. 일본의 담당장관으로서 섭섭했을 수도 있는데 그는 대표적인 친독인사였습니다. 그가 직접 스탈린의 외무부장관 몰로토브와 작성한 불가침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국 관동군으로 만주 쪽 소련군을 치고 해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자고 강력하게 제언했지만 이미 남벌을 준비 중인 해군대신과 독소전에서 독일이 이기리라고 확신하지 못했던 수상 그리고 묵묵부답으로 응했지만 노몬한에서 참패를 분명히 기억하는 히로히토 천황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시베리아는 석유든 천연가스든 지금의 러시아를 먹여 살리는 자원이 개발되기 전이라 일본 입장에서는 먹을 게 없었습니다. 당시 석유는 인도네시아에 많이 매장돼 있었고 인도네시아에는 구리 니켈 고무도 많았죠. 이미 독일에 무너진 네덜란드라 무주공산이라 판단한 일본 해군은 남하를 강력히 원했습니다. 물론 필리핀의 미군 육군과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세게 최강의 미 해군이라는 강적이 있었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노려서 남벌을 택한 겁니다. 당시 소련은 히틀러에게 연전연패하고 있었고 이미 모든 병력과 병참을 유럽에 쏟아붓고 있는 사정이었지만 소련의 육군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다는 점애서 그들은 소련을 친다는 전략을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으로 본 거죠.
당시 NKPD(KGB전신) 휘하 국제 스파이 조직인 GRU(일종의 미국의 CIA와 비슷한 조직)에서 조르케는 이인자로 거물 간첩이었습니다. 아버지기 독일인 어머니가 러시아인인 그는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는 물론 일본어와 중국어도 거의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하는 외국어 천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에는 극우적 성향과 독일 민족주의를 신봉했습니다. 독일의 대표적 신문 프랑케푸르트 자이퉁 지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나치 인사들과 친해졌던 그는 일본 대사관 시절 무관으로 일본어에 서툴렀던 오토 독일 대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며 그에게 도착한 모든 서한을 미리 읽어보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나치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히틀러의 입이었던 괴벨스와 저녁 만찬을 함께 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인사였고 나치는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죠.
그러나 그는 20년대 GRU의 수장 얀 베르친으로부터 포섭돼 간첩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공산주의자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 그가 사귀었던 간호사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겁니다. 그런데 절반은 러시아의 피가 흘렀고 공산주의는 이념이 민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니 엄밀히 말해서 배신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사실 독소전의 발발 즉 히틀러가 스탈린을 배신할 거라는 사실을 6월 6일 알았습니다. 그날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에게 소련을 친다는 사실을 통보합니다. 그는 히틀러의 지시를 오토가 이행하고자 일본 육군 대신이자 군부 실세 도조 히데키에게 문서를 전하자마자 히틀러가 소련을 칠 거라고 그날은 하지인 6월 22일이 될 거라고 분명히 타전을 했습니다. 스탈린도 당연히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우선 조르케를 이중스파이라고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를 진심으로 믿었죠. 아니 정확히 히틀러의 이성을 믿었습니다. 소련의 영토와 인구수 그리고 군대수를 생각하면 히틀러가 절대 소련을 치는 모험을 할 리가 없다는 게 스탈린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확신이었죠. 더군다나 히틀러는 영국과 전쟁 중이었죠. 조르케를 완벽히 신뢰하지 못하고 최측근이자 같은 조지아 출신인 NKVD의 수장 베리아(그는 베르친을 견제했죠,)를 더 믿었기에 그의 보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얼마나 야비하고 기만적인지 몰랐던 거죠. 그는 조르게가 영국과 미국에 포섭돼 자신과 히틀러를 이간질하려는 음모로 의심했습니다. 모든 걸 의심했던 그가 히틀러를 의심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최악의 실수였습니다.
그러다 22일 완벽한 기습을 당하고 연전연패하자 스탈린은 더 이상 히틀러에 맞서기 위해서 모스크바를 지킬 군대를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큰 아들 야고브에게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죽으라고 모스크바 전투에 보냈다가 포로로 잡히는 망신을 당했죠. 그러나 그는 동쪽의 일본의 군국주의 또한 믿을 수 없었기에 최후의 배수진 아시아 주둔 군대를 모스크바 방어 전투에 보내는 결심을 못했습니다. 그랬던 상황에 자기가 무시했던 조르게가 일본의 남진을 타전했으니 그는 일생일대의 배팅을 할 수 있었죠. 50개 사단과 탱크 2000대를 이동시켜(그들은 주코프가 훈련시킨 최정예 부대였고 이미 일본 관동군을 노문한에서 괴멸시킨 실력을 발휘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코프는 당시 모스크바보다 더 위기였던 레닌그라드를 지키고 있었죠.) 가까스로 독일의 중부군을 막아냅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히틀러는 스탈린이 왜 아시아 주둔군대를 모스크바로 이동시켰는지 이유를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나중에 알았을 겁니다. 조르케는 모스크바에 급전을 날리고 한 달 뒤에 특고(일본 고등 경찰)에 체포되면서 그동안 벌였던 스파이 행각과 일본 내 첩보망이 모두 드러났거든요. 그는 살기 위해서라면 9월 6일 모스크바에 타전하고 바로 러시아로 도망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사랑하는 일본 여자가 발목을 잡았고 어쩌면 그녀를 영원히 못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러시아로 떠나지 않았던 겁니다. 사랑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되고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은 거죠.
재미있는 사실은 스탈린 생존에는 조르케가 영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스탈린에게 히틀러가 배신할 거라고 급전을 보냈을 때 스탈린이 무시했던 걸 스탈린은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그는 스탈린을 철저하게 부정하려고 했던 호르쇼프 때부터 소련을 구한 진정한 영웅으로 칭송받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모스크바가 풍전등화일 때 스탈린에게 아시아 주둔군을 이동시킬 확신을 주지 못했다면 그 해 안으로 소련은 모스크바도 잃고 레닌그라드도 잃었을 겁니다. 히틀러의 의도대로 러시아는 우랄 산맥 동쪽(아시아)으로 나라를 옮기든지 공산당 자체가 멸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였겠죠. 어쩌면 독일이 이기기 전에 전리품을 나누자는 생각에서 일본은 남진이 아닌 북진을 택해 협공을 가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히틀러는 일본이 필요했던 석유를 소련의 재 3 도시 스탈린그라드를 넘어 바쿠 유전을 차지한 뒤 우호국인 페르시아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더라면 일본이 세계 최강인 미국을 상대로 거의 자살에 가까우 전쟁을 벌였을까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말이지요. 그래서 조르게는 우리에게도 영웅일 수도 있습니다.